과학과 정치적 이념들
세속화된 사회 상태란 특정 종교가 더 이상 사회의 지배적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한다. 그러한 상태가 ‘문제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해지고 사회 구조가 더욱 분화될수록, 사회를 구성하는 교육, 과학, 기술, 경제 등 영역들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유기적 통합을 모색하는 정치가 요청된다. 이러한 요청을 실현하는 방법론을 마련하는 것은 시대적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사회 속에서 기능 방식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과학이라는 사회 영역의 고유성은 ‘여러 해석을 허용하면서도 특정 조건 아래 반복 사용 가능한 지식 체계를 산출하는 것’에 있다. 이는 다양한 세계 이해 방식에 대해 열려 있는 과학적 생활양식의 성격을 고려할 때 당연한 것이다. 정치라는 사회 영역의 고유성은 다른 영역들의 고유성을 존중할 때 ‘문제 해결의 공론장으로 기능하는 것’에 있다. 정치 영역과 과학 등 다른 영역이 상호 제한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사회 상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미소 냉전 체제가 붕괴되기 전까지, 즉 1970년 대 중반까지 과학은 정치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 시대까지, 정치가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 즉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에 벌어진 다양한 정치적 실험들 속에 반영되어 있는 신념이 ‘직업 정치가들에 집중된 권력’에 기대어 과학 등의 사회 영역을 지배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성향을 상징하는 용어로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ideologically correct science)’이 사용되곤 한다.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의 사례들로 아리안 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려는 ‘히틀러의 과학’, 제국 확장의 수단으로 기능했던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과학’,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소련의 과학’, 자유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미국의 과학’, 실용성을 중시하는 ‘마오쩌둥의 과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에서 ‘과학’이 ‘과학적 지식 체계’를 뜻한다면,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은 ‘자체 모순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가설 발견 과정에 개입하는 세계 이해 방식은 다양하며, 가설들에 근거한 지식 체계는 특정 세계 이해 방식, 실례로 여러 정치적 이념들과 관련된 이해 방식을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적 지식 체계가 자체 모순적이라는 사실은 히틀러, 스탈린(J. Stalin), 마오쩌둥(毛泽东), 닉슨(R. Nixon), 일본 천황 모두 ‘검증 과정을 거쳐 신뢰할 만한 것으로 굳어진 과학적 지식 체계’를 각자의 정치적 이념을 빌미로 부정할 수 없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들 모두 각자 추구하는 이념이 과학의 고유 기능을 촉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과 관련해 과학과 정치적 이념의 관계를 규정할 때,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보다는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이때 ‘과학’은 과학적 지식 체계뿐만 아니라 과학 정책, 연구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한 조직 구성 및 제도 등을 포괄하는 ‘과학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소련 과학’의 경우, 과학자들 간 경쟁보다는 협동이 강조된다. 스탈린 체제의 과학 정책을 보면, 일정 수준의 훈련을 마친 과학자들의 직업적 활동을 보장해 주는 것을 최우선시 한다. 논문 인용 지수 등을 근거로 인적 자원을 마련하는 것은 중복 논문 수만 불려 연구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빅 사이언스(big science)’로 대표되는 미국의 과학 정책을 보면, 논문 인용 지수 등에 근거한 경쟁 원리를 중요시 한다. 여기에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되 개인차에 따른 경쟁으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이념이 깔려 있다. 과거 소련과 미국의 과학 정책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언급만으로도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은 사실 히틀러 및 스탈린 시대의 과학 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생겨난 용어이다. 그러한 용어가 자체 모순적이라면, 그 시대 과학 정책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자세한 분석을 하지 않았지만,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라는 용어가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보다 더 적합한 것임을 언급했다.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의 폐해로 리센코(T. Lysenko) 사건과 같은 것이 자주 거론된다. 우크라이나 태생인 리센코는 춘화 처리(vernalization)의 효용성을 용불용성에 함축된 ‘가변성 유전’ 개념에 근거해 옹호했다. 정치적 권력에 종속된 과학 아카데미를 장악한 리센코는 멘델(G. Mendel) 전통의 유전학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가변성 유전을 부정하는 멜델 전통의 유전학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진보 개념에 반한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유전자’의 존재를 부정한 리센코에 대항한 바빌로프(N. Vavilov)는 투옥되었고 1943년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유전에 대한 리센코의 이론은 과학적으로 반증되었고, 1960년 대 중반 이후 소련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리센코의 이론이 만약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쳐 살아남았더라면, 그것을 ‘스탈린의 과학’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랬더라면, 리센코의 이론은 정치적 이념을 달리 하는 다른 지역 과학자들도 그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리센코의 이론과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무관한 것으로 규정했을 것이다. 리센코의 사건에 대한 이러한 간략한 분석만으로도, 과학과 정치적 이념의 관계를 둘러싼 담론에서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보다는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 많은 정치가들이 강조한 ‘이념적으로 올바른 정치’란 사실은 ‘특정 정치적 이념이 과학적 발견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현재는 과연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할 필요가 없는 세태인가? 자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회학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과학 체계는 본질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만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논거가 확보되어야 한다. 과학 정책론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회학자들 상당수는 그러한 논거로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이 지배한 히틀러 시대의 독일, 스탈린 시대의 소련 등에서 실패한 사례들을 강조한다, 또한 지역별 노벨상 수상자 수들을 비교해 그러한 지역의 과학 정책의 한계를 증명하려 든다. 하지만 그 지역들의 실패 사례들만 강조할 수 없다. 막대한 자본이 특정 과학 분과에 투입되는 경우, 그 분과는 정치적 이념의 영향 아래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 시대, 스탈린 시대, 마오쩌둥의 시대, 일본 제국주의의 시대에도 간과할 수 없는 연구 성과물들이 있으며, 그러한 연구 성과물들은 세계 도처로 확대되었다. 미국의 ‘빅 사이언스’만 해도, 그것은 소련의 우주 항공 정책의 성과에 대항하려는 정책적 노력의 산물이다. 지역별 노벨상 수상자들의 수를 비교해 자유 민주주의가 과학 체계의 효과적 기능을 보장해 준다는 입장도 설득력을 가길 수 없다. 그러한 입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노벨상 결정 과정이 정치적 이념과 무관함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증명은 노벨 위원회가 소련 연방에 속한 가상의 경우까지 고려해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누구도 노벨 위원회가 정치적 이념에서 자유로운 조직이라 단언할 수 없다.
미국의 ‘빅 사이언스’도 비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 강조했듯이, 우주론은 아직 엄밀 과학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으며, 다양한 우주론들이 있다. 그런데 빅뱅 우주론과 관련된 연구 계획에만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바람에 다른 우주론의 가설들은 이론적 맥락이 아니라 실천적 맥락에서 ‘경쟁 가설’의 지위를 잃어 버렸다. 빅 사이언스의 폐해를 보여 주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더욱이 빅 사이언스 덕으로 과학 공동체의 자율성이 더 강화되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자유 민주주의 틀 속에서만 과학 체계는 효과적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낙관적 입장은 아직 ‘역사라는 여과기’를 통과하지 못했다.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자유 민주주의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면, 절차적 혹은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진화에 필요한 정치적 상상력 또한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한 진화가 자유 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기존의 정치론,실례로 사회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중 하나를 선별하는 과정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문제 해결의 공론장’이라는 정치의 고유 기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려는 집단적 노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은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정책했고 남아 있는가? 정치 영역과 과학 등 다른 영역이 상호 제한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사회 상태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한 사회 상태에 다가가기 위한 효과적인 과학 정책이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정말 과학자들에게 완전한 자율권을 주는 것이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일까? 지나친 관료제가 정말 과학의 고유 기능을 억제시키는 주원인일까? 과학자들도 사람들이라 과학 공동체도 하나의 동질적 집단이 될 수 없다면, 관료제를 무조건 적대시하고 과학 공동체의 자율권을 강조하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정치 영역과 과학 등 다른 영역이 상호 제한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사회 상태에 다가가는 것을 가로 막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과학의 고유 기능을 고려할 때, 세속화된 현실에서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다.
(생략)
* 덧글
이 연구 주제를 실행할 의도는 없다. 이 연구 주제를 실행하려면 ‘히틀러의 과학 체계’, ‘스탈린의 과학 체계’, ‘마오쩌둥의 과학 체계’,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과학 체계’, ‘이 땅의 과학 체계’ 등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소개하고 다루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흥미롭지만 짜증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구 인적 자원을 마련할 수 있거나 아주 돈이 많다면, 사람들을 모아 진행해 보고 싶은 연구 주제임은 확실하다. 만약 진행한다면, 대충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을 통해 본 과학의 성격
2. 정치적 이념, 정치 체제와 현실 정치
3. 정치에 대한 신념이 지배한 시대와 그 여파
4. 이념적으로 올바른 과학 또는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
5. 이념에 부합하는 과학의 사례들 (히틀러의 과학, 스탈린의 과학 등)
6. 과학과 자유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
7. 과학과 민주주의의 진화
8. 과학의 고유 기능을 가로 막는 요인들
9. 관료제의 역사와 변통 가능성
10. 과학과 정치의 공조 관계를 위한 정책적 모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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