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3 (두 가지 물음)

착한왕 이상하 2016. 8. 31. 02:48

프레이리의 비인간화개념은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자본주의 기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노동뿐만 아니라 상품에 대해서도 소외된다. , 그들에게 노동과 노동의 결과물인 상품은 자신들의 의사 결정과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자신들의 노동을 제어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자유와 평등을 상실하게 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마르크스에게 필연적 의미에서의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가능적 의미에서의 여러 욕구 중 하나일 뿐인 것인가? 마르크스는 종종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한 표현에만 주목하는 경우,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질문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전자의 질문에 대한 긍정적 입장에 가깝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욕구를 진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분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진정한 욕구로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 점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자본가들 모두 본성에서 소외된 존재로 간주하는 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전제되어 있으며, 프레이리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면, 억압자의 행복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그 행복도 인간다움의 본성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성적 조율(intellectual control)에서 벗어난 것은 참다운 행복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관점, 즉 소크라테스 이후 서양 지식인들을 지배해온 관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관점 아래 피억압자들은 불행을 통해 지배적 착취 구조를 인식하며, 원시 공산 체제에 남아 있던 자유와 평등을 새롭게 실현하려는 혁명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부터 이어져온 인간에 대한 이러한 낙관적 입장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힘든데, 이에 대한 이유는 앞서 간략히 언급했다. 이제 다음 두 물음을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 자본주의는 경제적 측면에서 생산 기반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이념으로도 작동한다. 그러한 이념은 각종 제도에 침투해 사람들을 특정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위하도록 의식화시킨다. 그러한 의식화에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기존 지배 구조의 기저로 작동하는 이념을 대체할 이념, 즉 대체 이념의 정치적 세력화는 필수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한 세력화가 결코 소외된 노동자들의 자발적 의식 개선으로 힘들다면, 그들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 의미에서의 이념 교육은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닌가?

 

둘째,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는 교육을 통해 비종속적 자유를 당연시 여기며, 그러한 자유는 소비 활동 등에서 관계 주도적 균형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균형은 가정 내, 직정 내, 입시 및 취업 과정 중에서 금이 가고 만다. 이때 사람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주변 관계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심리적 소외는 우선적으로 근접적이다. , 자신과 관계를 맺는 주변 인물 및 집단들의 소득, 직업, 학력 등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쇠외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개인들의 근접적 관계에 파고들어 관계 주도적 균형형성을 방해하는 지배구조는 구조적으로 분화한 사회일수록 다양하다. 더욱이 그러한 사회일수록 노동자들을 단순히 상품 생산 수단의 범주로도 묶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주의 해체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 이념교육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까?

 

첫 번째 물음은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 특히 알튀세(L. Althusser)와 그람시(A. Gramsci) 등이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중 하나이다. 알튀세가 이념의 제도화, 억압 수단의 제도화 등 지배 구조에 관심을 갖고 자본주의에 대항할 대체 이념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다면, 그람시는 정치적 주도권 싸움 속에서 이념의 긍정적 역할 가능성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들 모두 교육을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교육이 동시에 사회 변화의 목적일 수 있다는 입장은 그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교육은 특정 이념을 이상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전파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념적이며, 이 점은 독재 시절에 유행한 많은 마르크스 강독회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한 강독회가 독재에 대항한 이념적 무장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실제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치적 실험 문화를 정착시켰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더욱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념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지, 교육, 보건 등 구체적 정책과 맞물릴 수밖에 없으며, 좌파 대 우파 혹은 진보 대 보수의 차이는 종종 선거 과정에서 희석되곤 한다. 득표수를 걱정해야 하는 정당은 항상 다수의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업 정치가들은 좌파든 우파든 혹은 진보든 보수든 그람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깔린 도덕적 측면을 무시한 채 이념을 내세우고 주도권 경쟁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정치가의 역할을 다한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이 지배하는 세태 속에서 정치라는 사회 영역을 문제 공유의 공론장으로 만들라는 정치가의 의무는 사회 속에서 기능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근접 관계들에 스며들어 있는 각종 지배 구조는 정치적 담론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게 되며, 결과는 다수의 불만족이다.

 

두 번째 물음과 관련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초기 자본주의는 신분 구조를 깨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은 결코 프롤레타리아 대 부르주아의 대립 구도를 고착시키는 방향으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근대 국민 국가 기반 형성과 맞물린 산업화가 계급 갈등을 희석시키려는 동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역시 적정 수준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희석시키려는 방식의 변화 과정을 겪었다. 물론 소수 자본가 대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는 오히려 더 커진 측면이 있지만, 현재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및 권리가 마르크스의 시절 노동자들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지식 노동’, ‘서비스 노동과 같은 신개념에서 보듯이, 노동의 범주도 더 이상 상품 생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임금 격차도 직업군 분포 방식에 따라 요동친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본주의 자체에 국한시키는 것은 현실 왜곡에 불과하다. 정당한 비판은 어떤 식으로 자본주의가 개인들의 근접 관계에 피고든 각종 지배 구조, 실례로 남성 우월주의, 성인중심주의(adultism), 학벌주의, 적자와 서자 구분 구조 등을 고착화시켰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지역 역사 및 문화를 무시한 채 지배 구조들의 보편적 결합 방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특정 지역의 것을 보편환 것에 불과하며 다른 지역에 적용할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 성인중심주의, 학벌주의, 적자와 서자 구분 구조 등이 경제,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서로 맞물리는 과정의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특정 이념을 전제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정치 영역이 문제 공유의 공론장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그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직업 정치가들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에 대한 개인적 고민은 나중에 선뵐 <억압자의 행복에 맞서서(출판사 미정)>에서 보게 될 것이다.

 

프레이리의 비인간화개념은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교육 방법론은 첫 번째 물음보다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교육이 사회 변화의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할 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념보다는 문제의 공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공유는 사회 변화를 위한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그는 교육에서 문제의 공유를 강조했을까? 이 물음을 다루는 가운데 그의 교육 방법론에 대해 조금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