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2 (약간의 인본주의 비판)

착한왕 이상하 2016. 8. 24. 23:20

프레이리를 대표하는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Pedagogy of the Opressed)>에 함축되어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책의 제 1장에 나타나 있듯이, 현재 사회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프레이리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화(humanization)과 비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선택지 중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인간화이다. 그런데 인간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애매모호하다. 비인간화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인간화이상적인 정의로운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특징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한 특징으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자주 거론된다. 여기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하는 물음이 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필연적 의미에서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가능적 의미에서의 여러 욕구 중 하나일까?

 

위 물음에 대한 구체적 답을 프레이리의 저술에서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희망을 인간다움의 근원처럼 규정하는 그의 사고방식을 고려할 때, 그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고 해야 한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 이유를 간략히 언급한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그것에 반하는 것들은 본성을 왜곡하는 것들의 범주를 구성하게 된다. 지배욕, 오로지 자신의 이득만 생각하는 것 등을 그러한 범주에 포함시키고, 그러한 것들이 사회 구조에 반영되지 않은 상태를 이상적으로 간주하는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은 근대 이후 인본주의를 대표해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러한 유토피아적 사고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희망을 갖고 행위하는 것은 일종의 인간다움의 당위성으로 규정된다. ‘인간다움의 미명 아래 열악한 상황에 처한 개인에게 희망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 이러한 잔인함을 개인적으로 인본주의의 잔인함으로 부르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 이유는 다른 기회에 논할 것이다.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인간 본성처럼 규정하는 것은 증거를 확보하기 힘들다. 가족 관계에서도 없애기 힘든 지배욕 및 자기중심적 성향을 무시한 인류사는 허구에 가깝다. 이를 받아들이면, 그러한 것들을 인간 본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도 설득력을 지닌다. 실례로 이기적 성향을 인간 본성으로 가정하고 사후 구원 혹은 사회 계약 가능성을 논하는 입장을 들 수 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필연적 의미에서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가정하는 경우, 역으로 그것에 반대되는 것을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가정하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다. 전자의 경우를 유토피아적 사고방식으로, 후자의 경우를 반유토피아적 사고방식이라 할 때, 두 사고방식의 긴장 관계는 서양 지성사의 한 장을 차지한다. 두 사고방식 중 무엇이 올바른가를 결정해 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이를 받아들이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가능적 의미에서의 여러 욕구 중 하나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에 직접 대응하는 정서나 단일 믿음은 없다. 그것은 사회 상태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일종이기 때문에,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 역시 단순하지 않다. 그 과정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 ‘이기심’, ‘부당한 대우에 대한 분노’, ‘세상에 대한 개인의 그림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 대한 좌절감등 성공과 실패를 둘러싼 경험의 복잡성이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가능적 의미에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할 때, 그 충족 여부는 삶의 물질적 환경, 정치 체제, 교육 방식 등에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도록 운명지워진 자아혹은 본성과 같은 것을 가정할 이유는 없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이로부터 그것을 가져야만 인간적이다라는 결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다수가 그러한 열망을 가진 사회일수록, 그리고 그 열망 충족이 어느 정도 실현된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지배 및 타인에 의한 지배 없이 삶이 개인의 적소(適所)가 될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정의롭다는 것에 대한 합의는 가능하다. 이러한 합의 아래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자유와 평등의 관계는 선택의 자유와 분배적 평등의 관계보다는 비종속적 자유와 구조적 평등의 관계이다. 개인의 능력 차이 및 경쟁으로 인해 자유와 평등은 전자의 관계에서는 갈등 관계를 맺게 되기 쉽지만, 후자의 관계에서 구조적 평등, 즉 지배 및 피지배의 제도적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 평등이 비종속적 자유에 대한 선결 조건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민주제가 정착한 지역 대다수 사람들은 비종속적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여기도록 교육받아왔고, 또 부분적으로나마 일상생활에서 비종속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비종속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지배 구조로부터의 자유, 즉 비종속적 자유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의 거래 속에서 관계 주도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거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관계 주도적 균형이 형성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바람이 충족된 경우가 일상생활에서 비종속적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이때 관계 주도적이라는 것타인에 대한 지배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구나 거래 관계에 필요한 자신의 역할 영역에서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관계 주도적 균형은 일상생활의 소비 활동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한 균형은 가족 내에서, 직장 내에서, 입시 및 취업 과정에서 깨지고 만다. 당연시 여기는 비종속적 자유가 다양한 지배 구조에 가로 막히는 상황을 개인들은 경험하게 되며, 그러한 지배 구조는 생산 양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 맥락속에 종속되지 않는다. 보게 되듯이, 이 점은 프레이리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여러 지배 구조를 드러내 보이려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을 필연적 의미에서의 인간 본성과 같은 것으로, 희망을 인간다움의 당위적 태도처럼 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것이 지금까지 논의의 결론이다. 프레이리의 교육 방법론에 대한 지적 반응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려면, 전통적인 계급 대립 구도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한 지배 구조들에 대해 약간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