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4 (뱅킹 시스템, 약간의 프레이리 비판)

착한왕 이상하 2016. 9. 10. 03:36

교육이 사회화의 수단으로 가능하고 있다는 점을 프레이리는 은행 시스템(banking ssytem)’에 비유한다(<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2). 이러한 비유는 다음 사항 유비를 통해 표현 가능하다.

 

: 계좌 = 정보 : 학생

 

돈을 계좌에 집어넣듯이, 정보를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정보를 집어넣는 주체는 선생이다. 하지만 정보의 선별은 선생의 몫만은 아니다. 학제를 구성하는 권한은 대부분 국가에서는 정부에 속하며, 기득권의 지배 구조에 유리한 정보가 학제에 스며들어 있다. 은행 계좌에 유비된 학생들은 수동적이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수직상하의 서열 구조를 만들어내며, 학제 및 입시제도 등은 학생들이 사회 구조에 대해 성찰해 볼 기회를 박탈한다. 물론 학생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집단을 인식하고 그들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반감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증으로 발산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 땅에서 성장한 여성들 상당수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친 남성 지배 구조로 인해 온화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여성들조차 한국 남성 혐오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들의 반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사회 구조 변화를 도모할 수 없다. 새로운 변화의 구체적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은 결코 특정 집단에 대한 반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간단히 말해, 심리적 갈등 자체는 변화의 방향성 설정에 필요한 내용을 규정해 주지 않는다. 더욱이 억압자에 대한 반감 속에 억압자의 지위를 누리고 싶은 동경심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러한 반감으로 사회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사회 구조 변화의 방향성을 설정하려면, 교육은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위 물음에 대한 가장 단순한 대답은 이념적 교육일 것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 특정 이념을 가정하고, 그것의 의식화를 교육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한 이념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비된 민주주의 역시 개인의 비종속적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정치적 이념이다. , 이론적으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 정치적 이념이다. 그래서 현재 민주주의는 빈부 격차 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에 의해 부패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이념을 민주주의 틀 속으로 흡수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 어떤 이상적 이념도 현실 세계에서 부패할 수 있다. 더욱이 자본주의에 대한 심리적 반감 속에 자본가가 되고 싶어 하는 동경심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러한 반감은 일종의 애증에 해당한다. 그러한 애증이 사람들 심리에 내재화되어 남아 있는 한, 새로운 이념 역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를 낳을 수 있다. 이점은 프레이리 스스로 강조한 것인데 앞서 언급한 심리적 갈등 자체는 변화의 방향성 설정에 필요한 내용을 규정해 주지 않는다는 나의 입장과 괘를 같이 한다. 더욱이 이념적 교육 자체가 교육을 사회화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회 변화를 위해 특정 이념을 강조한다고 할 때, 그러한 강조에는 새로운 사회를 가정한 상태에서 그 사회에 사람들을 순응시키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새로운 이념을 확장하려는 시도 역시 일종의 은행 시스템으로 볼 여지가 있다면, 프레이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현 지배 구조의 상황에서 고려해 볼 만한 이념들이 집단에게 긍정적으로 수용되려면, 그러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인식 없이는 긍정적으로 평가 가능한 이념들은 내용적으로 왜곡되어 사회에 확산된다. 실례로 남성 우월적 지배 구조에 대한 구체적 인식 없이는 페미니즘도 여성을 대변하는 입장’, ‘여성과 남성을 동질화하려는 입장’, ‘새로운 지배 구조를 생성시키려는 입장’, ‘무조건 현실을 부정하는 입장등으로 왜곡되어 확산되기 싶다. 이러한 확산 속에서 다른 지배 구조들, 실례로 학벌 중심의 지배 구조, 성인 중심의 지배 구조 등은 드러나지 않게 된다. 심지어 기존의 지배 구조들을 강화시켜 줄 또 다른 지배 구조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프레이리의 다음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념보다는 문제 공유가 우선이다. 지배 구조로부터의 해방은 현 시점의 지배 구조들을 명확히 드러내 주는 문제들을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해방은 어떤 종결된 사회 상태를 전제하고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통을 통한 끊임없는 실습(praxis)이어야 한다. 사회 변화를 도모하는 실습은 비판적 성찰에 근거해야 한다.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를 드러내 주는 문제들을 프레이리는 시대의 주제들(themes of the epoch)’로 부른다. 그에게 그러한 지배 구조는 비인간화의 구조를 뜻하기 때문에, 지배 구조로부터의 해방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동시에 인간화를 가로 막는 것들이기도 하다. 시대의 주제들은 그러한 장애물뿐만 아니라 지배 구조의 이념들, 가치들, 정책들을 포함해야 한다. 시대의 주제들을 공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프레이리는 비판적 대화(critical dialogue)’를 강조한다(<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3). 인간의 자아는 말하기, 노동, 행위 속에서 형성되며, 그 형성 과정에서 고립된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성찰은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참된 대화란 개인들로 하여금 비판적 사고 과정에 참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개인은 세계와 사이의 비분리성을 인식할 수 있다. 세계란 탐구 대상으로서 주어진 통일체와 같은 것이 아니며, 또한 활동을 위해 미리 주어진 물리적 공간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개입된 변형 과정의 측면이다. 세계는 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만 역으로 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비판적 대화법을 정당화해 주는 핵심으로 그의 책 절반을 차지한다.

 

비판적 대화법에 대한 프레이리의 정당화 방식은 인본주의적이다. 이때 인본주의적이라는 것은 모든 문제를 진정성(authenticity)’의 문제, 실례로 참된 말’, ‘참된 지식’, ‘진정한 행복’, ‘진정한 자아등의 문제로 끌고 들어가는 경향을 일컫는다. 그러한 경향은 플라톤부터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양 인본주의의 한 획을 긋는다. 그런데 그 실상은 진정성을 빌미로 결국 자신의 입장을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하는 보편적 당위성으로 규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불변의 진리를 강조한 플라톤에게 참된 사회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 불변의 진리를 파악한 현명한 사람들이 사회를 이끌어 가야 한다. 그 어떤 세속적 행복 추구도 그러한 현명한 사람들의 행복과 비교할 때 위선에 가깝다. 프레이리 자신이 이러한 플라톤의 결론을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성에 대한 여러 입장 중 누구의 것이 올바른 것인가? 인류 보편성을 지향하는 인본주의는 항상 이러한 물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할 수 없다. 진정성을 따지는 것이 인본주의에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인본주의적 교육이라는 것은 참된 인간이 그렇지 않은 인간을 선도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선생과 학생의 좀 더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문제의 공유를 우선시하는 교육 등에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거창한 인본주의적 정당화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수가 비종속적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에 살고 있지만, 그러한 자유는 개인의 근접 관계에서조차 여러 지배 구조들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그러한 교육의 필요성을 논제로 정당화할 수 있다. 진정성을 전제하는 인본주의의 전통이 과거에는 오히려 지배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지배 구조의 구체적 인식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억압자의 행복에 맞서>에서 다룰 것이다.

 

프레이리가 제시한 교육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하더라도, 지배 구조들을 명확히 드러내 주면서도 문제 공유의 구체적 교육 방법론을 그에게서 찾기는 힘들다. 더욱이 교육자로서 그의 실천적 측면은 문명 퇴치 운동가로서의 프레이리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가 문명 퇴치 운동에 관심을 가진 것에는 브라질 사회의 특수성도 한몫을 한다. 극심한 빈부 차이로 인해 브라질 문화는 슬럼가 혹은 피억압자 문화부유층 혹은 억압자 문화가 다른 어느 곳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다. 슬럼가 사람들은 부유층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슬럼가 문화에는 또 다른 지배 구조가 기존 지배 구조들에 맞서 형성되어 있다. 실례로 슬럼가 갱 문화를 들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 심지어 어린아이들마저도 그러한 갱 문화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그 문화는 그들의 근접 관계의 일부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들 다수는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안다고 해도 그들 자신을 둘러싼 지배 구조들을 파악하지 못한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문명 퇴치 운동을 벌인 것이다. 문맹 퇴치 운동에서 교육 방법론을 이끌어 내고 실천한 프레이리는 존경받아 마땅한 교육 철학자이다. 하지만 문맹 퇴치 운동에서 효과를 낸 방법론들을 이 땅에 적용할 수 없다. 이 땅은 브라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으며, 지배 구조들이 서로 엮여 기능하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 남는다.

 

이 땅의 현재 지배 구조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그러한 문제들을 인식시켜 주는 자료는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 그 내용은 어떤 식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기존 학제와는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야 하는가? 과연 비판적 대화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복잡한 지배 구조를 파악해 내는 역량이 키워질 수 있을까?

 

프레이리의 교육 철학은 비판 철학 전통의 일명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들 스스로 여러 교육 방법론을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 역시 위 물음에 대해 답하기에는 구체적이지 못하다. 많은 경우, 내용 없는 공허한 말장난과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왜 그런지 페미니즘 교육과 연관시켜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