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1

착한왕 이상하 2016. 8. 13. 23:40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압받는 자들의 교육

    

지금까지의 교육의 역사를 살펴보면, 개인의 잠재 역량을 이끌어 내 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설계된 적은 거의 없다. 또한 인성 교육은 개인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individuals)’로 기능해왔다. 여기서 개인의 사회화사람들을 기존 질서 및 가치 체계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은 지금까지 실천된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는 정치가 사회를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했다. 다시 말해, 사회 변화의 중심축은 정치라는 관점이 지배했다. 특정 정치적 이념 혹은 이론이 사회의 변화를 주도한 경우는 다수가 그러한 이념 혹은 이론에 동조한 경우에 국한된다. 변화 이후의 사회 상태는 다시 고착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정치가 문제 해결의 공론장으로 기능하기보다는 특정 사회 질서를 고착시키는 방식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기능 방식의 토대였으며, 사람들은 경쟁 속에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길들여졌다.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정치 속의 사회라는 은유로 표현 가능하다. 교육, 과학과 기술, 경제, 종교 등 사회를 구성하는 영역들은 정치 영역의 하부 분과처럼 기능해왔고, 특히 교육 학제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처럼 짜여졌다. 이 점은 경제 민주화’, ‘교육 민주화등의 구호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구호에서 민주화정치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현대 여러 정치론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 정치적 권력의 평등한 분배를 이상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공산주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의 명칭에 민주 공화국과 같은 표현이 들어가는 것에 당황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공화국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유는 비종속적 자유이다. ‘비종속적 자유는 단순히 외부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지배적 구조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비종속적 자유가 충분히 실현된 곳이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자신있게 긍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억업자와 피억압자의 지배적 구조가 여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남아 있음을 반영해 준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발견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그것의 다양한 정부 형태에도 불구하고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를 허용하지 않는 정치론이다. 현실은 이러한 정치론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지배 구조에서 사회가 벗어나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시대의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속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 속의 사회라는 은유가 지배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정치가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위 딜레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정치로만 사회를 특정 상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를 지배한 관점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정치 속의 사회사회 속의 정치로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실험이 현재 필요하다. 교육이 그저 사회화의 수단으로만 기능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교육은 사회 변화의 중심축이 될 수 없을까? 브라질 출신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교육을 사회 변화의 중심축으로 간주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그의 교육 철학 및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것인데, 이를 위해 그의 실천적 동기를 먼저 지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