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비판적 사고

개의 내연, 공통적 특징의 두 가지 해석법과 플라톤적 유혹

착한왕 이상하 2016. 9. 26. 02:41

1.2. 외연 생략

 

 

1.3. 개의 내연, 공통적 특징의 두 가지 해석법과 플라톤적 유혹
‘개’의 외연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개들의 모임입니다. ‘개’의 내연은 개들이 아닌 개들의 공통 특징들의 모임입니다. 검은 색은 그러한 공통 특징들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검지 않은 개도 있으니까요. 또 강아지 때 털색이 성장하면서 바뀌는 개도 있으니까요. 반면에 ‘꼬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개들의 공통 특징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개들에게서 꼬리가 발견되니까요. 물론 유전자 변형으로 인해 미래의 개들은 꼬리를 가지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유전자 변형이 아주 심하다면, 그것들은 개를 조상으로 갖고 있지만 개와는 다른 동물로 분류되겠죠. 반면에 그 유전자 변형이 심하지 않다면, 그것들은 여전히 개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실현된 미래에는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은 개의 공통 특징으로 간주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개’의 내연을 규정하려고 굳이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미래의 개들도 꼬리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지금까지의 관찰을 바탕으로 어떤 대상들을 하나로 묶으려고 하거나, 특정 특징 아래 일반화하려 할 때,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한 가정은 추리 및 판단에 전제된 것처럼 기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신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개들을 포함한 세상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일은 없다는 신념 아래,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개들의 공통 특징으로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개들의 공통 특징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도구적 해석’이며, 두 번째는 ‘추상적 해석’입니다. 도구적 해석은 다음을 뜻합니다.

 

• 개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꼬리가 발견된다. 따라서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개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모든 개의 꼬리는 다릅니다. 단지 개들은 유사한 형태의 꼬리들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유사한 형태를 경험할 수 있는 우리는 각 개에게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개들의 공통 특징이라고 할 때, 어떤 이상적인 개의 꼬리를 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개 꼬리들을 유사한 형태를 바탕으로 ‘개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꼬리가 발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니면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개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들에게서 발견되는 꼬리의 특징들을 ‘T1, T2, T3, ...’이라고 합시다. ‘T1’은 1에 대응된 개의 꼬리 특징, ‘T2’는 2에 대응된 개의 꼬리 특징, ‘T3’은 3에 대응된 개의 꼬리 특징을 나타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가능한 개들은 자연수만큼 많으니, 꼬리라는 특징들도 그만큼 많습니다. 공통 특징 ‘꼬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T라고 할 때, T는 ‘T1, T2, T3, ...’를 함께 묶어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즉 통칭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도구(instrument)’인 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들에게서 발견되는 네 발로 걷는 특징들을 ‘F1, F2, F3, ...’이라고 할 때, ‘네 발로 걷는 것’ F는 ‘F1, F2, F3, ...’를 통칭합니다. 개들에게서 발견되는 젖을 먹고 자라는 특징들을 ‘M1, M2, M3, ...’이라고 할 때, ‘젖을 먹고 성장하는 것’ M은 ‘M1, M2, M3, ...’를 통칭합니다. 개들의 공통 특징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것’은 어떤가요? 각 개에게서 적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특징을 항상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없는 수캐의 경우, 젖을 쥐어짜도 젖은 나오지 않습니다. 암캐의 경우도 새끼를 낳으면 부풀은 젖에서 젖이 나옵니다. ‘젖을 먹여 새끼를 키우는 것’은 꼬리나 네 발로 걷는 것과 같은 특징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각 개의 특징이 아니라 ‘개들의 번식 과정’의 특징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시각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 (i)과 (ii)의 각 원은 ‘개’의 외연이 아니라 내연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각 원은 개별적인 개들이 아니라 개들의 공통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겠죠. (i)을 봅시다. 개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꼬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개들은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공통 특징을 공유합니다. 그렇다고 개들의 꼬리 형태나 기능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개 꼬리들의 유사한 형태를 바탕으로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모든 개에게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점선으로 표시된 영역의 ‘T1, T2, T3, ...’은 ‘1, 2, 3에 대응된 개들의 꼬리라는 특징들’을 나타냅니다. 마찬가지로 ‘F1, F2, F3, ...’은 ‘1, 2, 3에 대응된 개들의 네 발로 걷는 특징들’을 나타냅니다. ‘M1, M2, M3, ...’은 ‘1, 2, 3에 대응된 개들의 젖을 먹고 자란 특징들’을 나타냅니다.


시각 표상 (i)은 (ii)보다 사용하기 귀찮습니다. 이 점에서 (ii)는 개의 내연을 표현하는 데 더 효과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ii)에서 T, F, M은 각각 ‘T1, T2, T3, ...’, ‘F1, F2, F3, ...’, ‘M1, M2, M3, ...’을 통칭하는 ‘표현 수단’입니다. 이렇게 공통 특징을 도구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ii)는 그저 (i)을 효과적으로 줄인 형태입니다.


그런데 (ii)와 같은 표상법을 줄곧 사용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플라톤적 유혹’에 빠집니다.

 

• 혹시 ‘꼬리를 갖고 있는 것’ T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없을까?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개 꼬리들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상적일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개 꼬리들은 특정 기간 동안 지속하며 크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변화한다는 점에서 구체적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개 꼬리들은 모두 다 다르다. 그 어떤 개의 꼬리도 모든 개 꼬리들을 대표하기에는 이상적이지 않다. 따라서 T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이상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불변하는 어떤 추상적인 것이다. 그런 추상적인 것을 ‘꼬리를 갖고 있는 그 자체’, ‘네 발을 갖고 있는 그 자체’, ‘젖을 먹고 자라는 그 자체’라고 할 때, 개들은 그런 추상적인 것을 예시해 주는 일종의 ‘보기’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위와 유사한 생각을 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이 때문에, 위의 유혹을 ‘플라톤적 유혹’이라 한 것입니다. ‘꼬리를 가진 그 자체’라는 추상적인 것은 눈, 코, 입, 손 등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들을 ‘경험 세계’라고 할 때, 추상적인 것들은 ‘경험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 즉 ‘추상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경험 세계는 추상 세계를 반영해 주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플라톤은 추상 세계의 존재들을 형상 혹은 이데아로 불렀습니다. 그가 ‘꼬리를 갖고 있는 그 자체’라는 형상을 가정한 것은 아니지만, 위의 ‘플라톤적 유혹’은 그의 사고방식을 나타내 줍니다.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개들의 공통 특징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대해 추상적 해석을 한다는 것은 일단 ‘플라톤적 유혹’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에 빠지면, (ii)는 단순히 (i)의 줄인 형태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ii)는 ‘꼬리를 가진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포함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i)에서 (ii)로의 전이 과정은 그러한 대상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추상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 과정을 통해 추상적 대상을 도입한다고 하여,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근거는 불충분합니다. 추상화 과정을 통해 그러한 존재를 가정할 수 있다는 정도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단순히 ‘가정된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는 것’이 교과서적 플라톤주의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경험 세계’와 ‘추상 세계’의 관계를 따질 수밖에 없습니다. ‘추상 세계’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경우, 개들은 ‘꼬리를 갖고 있는 그 자체’, ‘네 발을 갖고 있는 그 자체’ 등 추상적인 것들을 일시적으로 반영해 주는 보기들로 규정됩니다. 반면에 하나의 세계의 두 측면으로서 ‘경험 세계’와 ‘추상 세계’를 강조하는 경우, ‘개들은 이러이러한 추상적인 것들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 세계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과 같은 것은 이 작업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입니다.

 

•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을 개들의 공통 특징으로 고정시키는 것에 대해 추상적 해석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답은 ‘없다’입니다. (i)에서 (ii)로의 추상화 과정을 통해 ‘꼬리를 갖고 있는 그 자체’와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 존재들은 새로운 차원의 대상들이 됩니다. 즉, ‘추상 세계’의 대상들이 됩니다. 외연은 일단 대상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추상적 존재들은 ‘추상 세계’의 특정 외연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상적 해석에 따른 (ii)는 ‘개’의 내연보다는 추상 세계의 어떤 외연을 표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개’, ‘소’, ‘돼지’, ‘사람’ 등 경험 세계의 범주 개념들에 국한해 내연을 다룰 때, 굳이 ‘... 그 자체’로 표현되는 추상적인 것들을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이, 왈도, 개, 고양이, 포유류의 외연적 관계를 1.2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것들의 내연적 관계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문제만 더 집고 넘어 가겠습니다.

 

• ‘3+2=5’라는 표현에서 ‘3’은 무엇을 지칭합니까?

 

숫자 ‘3’은 수 3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수는 눈, 코, 입, 귀, 손 등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추상적 대상으로 가정됩니다. 숫자 ‘3’을 개들의 모임, 사과들의 모임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서, 수가 그런 모임들은 아닙니다. 굳이 수 3을 그런 모임들과 연관시킨다면, 3은 그런 모임들에서 ‘특정 양’이라는 패턴을 반영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추상화 과정을 통해 3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플라톤은 추상화 과정을 통해 3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죠. 추상화 과정을 통해 ‘추상 세계’의 3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무튼 ‘3+2=5’와 같은 산수의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한, 수 3, 2, 5라는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범주 개념 ‘자연수’의 외연은 그러한 수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수’의 내연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개’의 내연은 개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들의 모임입니다. ‘꼬리를 갖고 있는 것’은 각각의 개에게 적용 가능합니다. 이러한 방식의 공통 특징을 자연수들은 보여 주지 않습니다. 물론 각 자연수에 대해 그것보다 1만큼 큰 자연수가 있다는 패턴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실례로 3에 대해 1만큼 큰 자연수 4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패턴은 수 3, 4 등 자체에 공통된 특징은 아닙니다. 따라서 ‘개’, ‘소’, ‘돼지’, ‘사람’ 등 범주 개념에 대한 내연의 규정 방식을 자연수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개’의 내연에 들어가는 공통 특징들은 ‘개’의 정의에 사용됩니다. 즉, 개들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개’의 내연은 ‘개’의 정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연수’의 정의 공간은 무엇일까요?

 

 

 

위 그림에서 왼쪽 원은 ‘자연수’의 외연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오른쪽의 정의 공간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요? 이 물음에 답하려면, 자연수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패턴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한 패턴들을 이용해 ‘자연수’를 정의하는 방식은 ‘개’를 정의하는 방식과는 아주 다릅니다. 이 점은 수학적 표현의 구성 방식 및 의미 해석도 일상적 표현의 구성 방식 및 의미 해석과 다름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다름을 보여 주는 것은 이 작업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이 작업의 말미에 이르면, 수학적 사고라는 것은 수학적 표현의 구성 방식을 논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임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1.4. 개와 고양이의 내연적 관계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