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얼굴

착한왕 이상하 2009. 11. 24. 08:03

 

 

 

결혼을 하여 애도 낳고 잘 살아 왔는데, 어느 날 남편이 부인의 얼굴에 총을 쐈다. 이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그 여인은 죽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물고기 메기의 앞면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최근 죽은 사람의 사전 동의 아래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첨부 사진의 제일 오른쪽이 원래 그녀의 얼굴 모습이다. 제일 왼쪽은 총기 사건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모습이다. 턱 기형으로 인하여 음식을 씹을 수 없게 되는 바람에 그녀는 목에 달린 보조기로만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다. 중간 사진은 피부 이식을 받은 그녀의 최근 얼굴 모습이다. 자가 면역 반응으로 인한 위험성과 치료, 그리고 좀더 원래 모습에 가까운 얼굴 복원을 위해 이어질 수차례 대수술 등은 그녀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다음은 그녀에 관한 기사를 읽고 순간적으로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다.

 

 

'자연의 눈(Nature's Eye)'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원래 하나인 까닭에 외부를 볼 일도 없고, 내부를 관찰할 일도 없다. 자연의 각 부분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며, 부분의 생성과 소멸은 단지 변화하는 전체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연의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에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과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눈이라는 것이 있다.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든 말든, 눈을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확인해 나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가 인간이다. 자신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은 다른이와의 유사성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철학자들은 '자아의 발견'이라는 거창한 말로 미화하여 왔고, 또 이에 속아 마치 '나'라는 것이 타고나는 것처럼 세뇌된 사람도 많다.

 

다른이의 성기 모양에 근거하여 나는 남자 혹은 여자로 구분되고, 또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해 집단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 나간다. 결국 자아라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없이는 불가능한 개념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속에서 남과 다른 나의 특징은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규정짓는 장치가 된다.

 

만약 내가 남성기와 여성기 모두를 갖고 태어났다면, 나는 쉽게 나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질 수밖에 없게 되고, 나의 인생 전체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방황을 자아의 상실이나 자아 찾기의 방황기로 규정지을 하등의 이유는 없다. 단지, 내가 정상적인 것에 포함될 수 없다는 운명을 어떻게 수긍할 수 있는가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그 범주에 자연적 제한이 깔려 있는 것은 맞지만, 자연 자체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에 무관심하다.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은 괴물로 불린다. 자신이 정상적인 것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안도감은 괴물이 아님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보니, 비정상적인 것, 즉 괴물의 원인을 인간의 능력 한계로 인한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탓으로 돌리거나, 심지어 자연 외적인 초자연적 현상으로 돌려 버린다. 그리고는 괴물을 우연적으로 발생했다고 여겼거나, 신의 풍만함 혹은 신의 저주로 여기곤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아 찾기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과정이 전제되어 있다. 신체적 형태 등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정상적인 것에 속하는 까닭에 그러한 구분 과정이 자아 찾기에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에 둔감할 뿐이다. 정상에 속한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놓고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는다. 그대신 남과 구분되는 자신의 특징을 연관시켜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며, 이때 중요한 것이 자신의 얼굴이 된다.

 

남성기와 여성기를 동시에 갖고 태어난 사람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문제로 평생 시달리게 된다면, 일명 정상적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얼굴 문제로 평생 시달리게 된다. 이때 '얼굴'은 단순히 남에게 보이는 표현형적 특징, 즉 남과 나를 구별시켜주면서도 나를 드러내주는 외적 특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얼굴에는 일명 정상적인 인간들의 모임을 유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온갖 상징성들이 반영되게 된다. 사실 사춘기를 지나면서 겪게 되는 많은 '나를 둘러싼 고민'들은 '얼굴을 둘러싼 고민'이기도 하다. 이들은 기형과 관련된 괴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괴물로 불릴 신체적 특징이 없다. 이들은 정상적인 것이라는 영역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거나, 숨기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부모가 강요하는 상징들을 환멸할 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얼굴들이 생겨나며, 내 얼굴은 그런 얼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한다. 또 자신이 보기에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의 얼굴은 모방해야 할 것으로 마음 속에 간직된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맞추어 자신의 얼굴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겪어온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얼굴이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완전히 뭉게졌다고 해보자. 이것은 단지 내가 지향해온 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속해 있던 정상의 범주에서의 완전한 일탈을 의미한다. 내가 신체적으로 정상에 속했던 까닭에 일명 자아 찾기 과정의 밑뿌리인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문제로 고민하게 됨을 의미한다. 예상치 못한 사실로 비정상이 된, 곧 괴물이 된 나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문제를 놓고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나의 얼굴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 복원될 여지는 없다. 집단 활동 속에 반영되는 상징성 따위는 뭉게진 나의 얼굴과는 무관하다. 다른 사람은 그 얼굴에서 그런 상징성 대신에 괴물만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한때 정상이었다가 비정상이 되어버린 얼굴, 이로 인해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은 자아 찾기 과정의 가장 원초적 단계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경험 이전에 주어진 자아, 타고난 자아 개념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사실 그러한 것은 날조된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이 가능했던 이유도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 때문이다. 우리 대다수는 끔찌간 기형으로 탸어나지 않았다. 괴물로 불릴 형태를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나의 성기 모영,팔과 다리, 얼굴, 어느 하나도 괴물적이라 불린 요소를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쉽게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까닭에, 얼굴에만 신경을 쓰고 살아 왔다. 이것이 우리 다수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얼굴에 반영되는 각종 상징성을 미화하거나 깍아내리기에는 열중해왔지만, 정작 나도 괴물일 수 있다는, 즉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가장 원초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실에는 둔감해졌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종결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관련된 괴물적이라는 것! 거기에는 얼굴이 갖는 폭력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얼굴에 반영되는 상징성이 그 차체로는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상징성을 획득하기 위한 얼굴 가꾸기 과정에서 그 상징성은 폭력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또 얼굴에 반영되는 상징성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라면, 그것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폭력적이다. 그래서 옛 성현은 말했다. '네가 괴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곱게 늙는 데 힘써라!'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둔감해진 우리가 이 말에 무심할 때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은 항상 나를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