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를 둘러싼 갈등과 미국 공교육 정착의 역사
정부 중심의 교육 제도가 미국에 정착되는 과정에는 극심한 교파 간 갈등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청교도를 둘러싼 교파 간 갈등을 들 수 있다. 영국 국교 내에 남아 있던 로마 가톨릭의 관습과 제도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고 했던 17세기 청교도 운동(puritan movement)이 실패하자, 많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인들 다수는 장로교(presbyterians)에 속해 있었다. 청교도 내부에도 정치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놓고 입장이 갈려 있었다. 독립파(independents)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 곧 정교 분리의 원칙을 옹호했지만, 청교도 운동을 주도한 일부 장로교 세력은 정교 분리 원칙에 반대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장로파의 청교도들은 그들의 꿈을 새로운 땅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그 꿈은 정부를 포함한 모든 국가 권력 기관 및 제도에서 신성을 위협하는 일체의 문화적 요인들을 제거시키는 것이었다. 청교도 세력이 선택한 전략 중 하나는 정부 중심의 교육 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교육을 통해 청교도 이념을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청교도의 전략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지만, 곧 반대 세력들을 만나게 된다.
청교도들보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유니테리언교, 곧 만인교 신자들은 때에 따라서는 청교도들과 협력했지만 경쟁 관계를 맺기도 했다. 두 교파 모두 표면적으로는 정부 중심의 교육 제도를 옹호했다. 또한 부모에게서 아이들의 양육권을 박탈할 때 진정한 공동체가 실현 가능하다는 입장도 두 교파를 관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교도 세력은 대학의 학제가 철저히 신학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본 반면, 만인교도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실례로 만인교 목사이자 과학자인 프리스틀리가 구원과 기적을 믿었다고 하지만, 과학은 신앙과 별개로 그 입지를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무신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고 했던 세력에 강하게 반발했던 프리스틀리도 학제가 신학에 바탕을 둬야한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한 입장을 지지한 청교도 세력과 만인교 세력 사이에는 항상 충돌의 불씨가 남아 있었고, 두 세력이 하버드 대학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던 과정은 19세기 미국 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다.
그러나 청교도 세력과 만인교 세력은 타 교파의 세력 확장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대처했다. 가톨릭 이주민들이 그들만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을 때 두 세력은 이를 막기 위해 학교 인가제를 도입했다.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의 교육은 무효라는 것이 그 골자였다. 학교 설립을 통한 가톨릭의 세력 확장을 막는 데 성공한 후, 청교도 세력과 만인교 세력 사이의 암투는 심화되었다. 승리한 쪽은 결국 만인교 세력이었다. 모든 학제가 신학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청교도 세력의 입장은 하버드 대학에서 그 권위를 잃어버렸다. 하버드 대학이 위치한 매사추세츠의 주정부 중심의 교육 제도는 미국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 이후 정교 분리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명시화되면서, 의무적인 종교 교육은 미국의 사립 및 공립 대학에서 사라지게 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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