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진보의 시작

정조 대왕의 탕평책?

착한왕 이상하 2017. 4. 17. 19:38

오늘 신문기사를 보니, 문재인 후보가 자신의 통합 정책, 실상은 대연정 정책을 조선 후기 '정조 대왕의 탕평책'에 비유했더라. 가당치 않은 소리다. 왜 그런지 간략히 논하기 전에, 먼저 다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문재인이 되든 안철수가 되든, 여러분은 차기 정권에서 '개헌을 통한 한국형 자민련 탄생(김종필의 꿈)'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재인이 되면 총리는 누가 될 것인가? 김종인, 정운창, 홍석현 등이 거론된다. 김종인은 민주당에서 나갔다 하지만, 그의 실세인 진영 등이 다시 당내 높은 위치를 자리잡고 있다. 안철수가 되면 총리는 누가 될 것인가? 반기문, 손학규 등이 거론되고 있는 판이다. 이런 인물들의 성향만 체크해도 위 예상이 그리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위 예상에 대한 칠밀한 근거를 밝히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건너 뛴다.

 

정조 대왕의 탕평책이라. 드라마 및 신문 등을 통해 이 탕평책이라는 게 너무 긍정적으로 과대포장되어 있다고 여긴다. 왜 그런가?

 

 

 

임진왜란 이후 두 번의 전란을 겪으면서 고착화된 기존 구조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중앙은 사회기강을 바로 잡으려고 향촌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지방 사족들을 명문화한다. 그러한 명문화를 통해 중앙은 향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특정 사족들만 향촌에서 특권을 누릴 수 이었다. 그 결과 각 지역마다 권세가들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 세력 간 균형을 중재할 목적으로 숙종, 영조, 정조에 걸쳐 탕평책이 시행되었다. 이 탕평책은 고착화된 구조를 변통시키는 성격보다는 '그 구조의 생명 연장 장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 연장을 위해 사용하는 인공호흡기에 비유 가능한 정책이 탕평책인 것이다.

 

탕평책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에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결국 망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도 새로운 정치 세력에 자리를 내 준 것이 아니라 이웃 국가에게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탕평책에 대한 이러한 냉소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탕평책에서 배울 것은 있다. 정조는 기존 세력의 노인네들이 아니라 젊은 층 인재들을 끌어모았다는 것이다. 정조 대왕 스스로 사람들의 글을 읽어가며 또 천거받은 사람들과 면담을 통해 인재를 발굴했다. 지금 문재인이, 안철수가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방식은 정조 대왕의 방식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그 방식은 방아간 주변에 이삭을 더 뿌려 참새들을 끌어모으는 방식이다. 그러한 이삭줍기 참새들이 변통에 신경쓸 리 만무하다.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청와대에서 보톡스를 맞는 짓은 안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들이 끌어모은 쓰레기들로 이 땅을 더욱 쓰레기판으로 만들 것이다.

 

조선 후기로 돌아가고 싶은가? 어디서 정조의 탕평책을 운운하는가? 현재 각종 유착으로 고착화된 구조의 사회 상태는 요새 신문기자들이 빈정거리는 프랑스보다 심각하다. 극우파가 등장한 것을 가지고 마치 도덕성이 상실한 나라라고 기사를 써댄다. 그런데 이 번 프랑스 대선에서 흥미로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쩌면 기존 거대 정당들이 아니라, 이 나라 신문사들이 극우, 극좌로 분류하는 두 세력 중 하나가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프랑스의 '정치적 동력'이 우리보다는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정치적 동력이란  다음을 뜻한다.

 

간접 민주제의 고질병 중 하나는 정당이 거대화될 수록 개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중간층 확보라는 미명 아래 정당의 고유색이 바래는 것이다. 정치 영역을 이념보다는 문제 공유의 공론장으로 기능하도록 변통한 거대 정당은 현재까지 지구상에 없다. 정당이 거대해져도 그런 식으로 변통하는 것은 가능함에도 없다는 것이다. 거대 정당들의 정책적 전문성마저도 수준이 낮아진다. 직업정치가의 행태가 오로지 판세확보의 논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정당들에 맞서는 새로운 정치 세력들이 형성 가능한 사회일수록 정치적 동력이 높은 사회이다.

 

현 한국 사회는 정치적 동력마저 상실한 듯 싶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새로운 정치 세력 형성을 위한 시민포럼과 같은 것의 결성이다. 그러한 포럼의 철학, 성격, 구성 방식 등은 논외로 한다. 다만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차악의 선택으로 사회의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사람들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차악의 선택으로 사회 개선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반대의 사례가 많다. 마땅한 후보가 없어 투표하지 않는 것을 두고 반민주적 선택이라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모든 시민이 투표에 참가해야 한다고 의무화하는 경우, 투표 용지에 반드시 불신임안 체크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한 불신임안 체크가 있다면, 나도 이번 대선에 투표할 것이다. 불신임안으로 말이다.

 

위기는 새로운 정치 세력 형성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새로운 정치 세력은 기존 세력의 '이삭줍기 참새들의 해쳐모여'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새로운 세력은 좀 더 젊은 층 중심으로, 그리고 다수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확산계층, 실례로 여성계층의 입장을 끌어안는 세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이 어쩌면 새로운 정치 세력 등장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부정적으로 고착화된 구조의 붕괴 전에 말이다. 그리고 그 세력은 당장이 아니라 5-10년 앞을 준비하는 세력이어야 한다. 과거 독일 녹생당이 그랬던 것처럼, 현재 스웨덴의 해적당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누가 돈을 댄다면, 정말 제대로 된 시민포럼을 만드는 데 기여는 해 보고 싶다. 물론 허황된 발상이다. 어차피 '앞섬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집단이다. 그러니 탕평책도 획기적인 개혁 프로그램으로 과장되는 것이다. 내세울 게 없는 현실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20대, 30대, 40대 직업정치가들과 얘기해 보면, 의외로 당내 비판을 많이 한다. 술자리에서는 자신들의 두목 욕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그럼 나와서 시민포럼 결성과 같은 것을 해보지?"라고 반문하면, 죄다 뺀다. 그러면서 이 사회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학맥, 인맥 사회 구조라 힘들다는 등 사회탓을 하며 자기합리화에 바쁘다. 결국 이 젊은층 직업정치가들도 방아간 주변을 맴도는 '이삭줍기 참새'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태를 진단할 때, 온갖 유착으로 고착화된 구조는 변통될 리 만무하니 오히려 빨리 붕괴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선거에서 투표율이 높으면 자동적으로 좀 더 민주적인 사회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