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비판적 사고

낭설을 퍼뜨리는 출판문화: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

착한왕 이상하 2017. 5. 3. 02:23

 

낭설을 퍼뜨리는 출판문화
-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 -

 

나이팅게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램프등 아래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를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 나이팅게일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나이팅게일 앞에 붙어야 할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 간호학을 학문으로 정착시키려 한 19세기 여성
• 사회 통계학을 바탕으로 의료 정책을 펼친 여성
• 적을 몰아붙이려고 전략적 선택도 마다하지 않은 과감한 여성
• 빅토리아 시대 남성 지배권에 맞서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 했던 여성

 

나이팅게일 앞에 위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근거는 다음 글들에서 엿볼 수 있다.

 

<시각 소통: 사회 통계학과 아이소타입>
http://blog.daum.net/goodking/213

<서평, Victorian Medicine and Social Reform: Florence Nightingale among the Novelists, Palgrave Macmillan>
http://blog.daum.net/goodking/576

 

위 두 글을 본다면, 어두컴컴한 병원실 램프등 아래 환자 돌보기에 헌신하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낭설임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신문 기사, 전문가 칼럼 등을 통해 대중에게 퍼져나간 또 다른 낭설은 나이팅게일의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 관한 것이다.

 

• 나이팅게일은 레즈비언이었다.

 

국내외 인터넷에 떠도는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을 확증해 주는 근거는 없다. 이 점은 나이팅게일 연구자들의 일반적 결론이다. 그렇다면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크림 전쟁 중 나이팅게일의 유명세는 정점에 달했다. 그녀는 가족과 친지 등에게 여러 시적인 편지들을 보냈다. 그 중에는 그녀의 성적 취향을 시적으로 승화시킨 것도 있었다. 그러한 것들을 참조해 리튼 스트레이치(L. Strachey)가 에세이를 출판했다. 나이팅게일에게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 에세이에 이끌렸고, 이후 스트레이치의 의도와 달리 그녀를 둘러싼 과장된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그 중 하나가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크 보스트리지(M. Bostridge)의 2008년 나이팅게일 전기를 소개한 다음의 인디펜던트 기사를 참조하라.

 

“Florence Nightingale: A new biography sheds light on the Lady with the Lamp”
https://t.co/eDDrNsFZs1

 

나이팅게일을 다룬 전기나 에세이를 읽어 본 사람은 비판적 사고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도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을 의심해 볼 수 있다. 19세기 중엽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집안에서 가사를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럽 사회에서 동성애는 신이 부여한 자연적 본성에서 빗나간 것으로 간주되었고,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적 지향성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이 나타났다.

 

 

 

1865년 영국에서 나온 위 석판화를 보면, 도심지 도로변에 서 있는 여성을 매춘부로 착각한 목사가 그녀에게 회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축복해 주세요, 선생님. 그런데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아요. 저는 사회적 악이 아네요. 단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대답에서 보듯, 당시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커밍아웃’하기란 힘들었다. 특히 신앙심 깊은 기독교 신자라면 더욱 그렇다. 동성애를 신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이팅게일 전기 등을 읽어 본 사람은 그녀가 신앙심 깊은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개혁적인 동성애 여성일지라도, 편지에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커밍아웃하기란 쉽지 않았던 시대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판, 소문, 편지 등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야, 해당 인물의 성적 지향성을 어느 정도 정확히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이팅게일의 성적 지향성을 언급한 기록은 없다. 단지 나이팅게일의 시적으로 묘사된 특정 문구만을 가지고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이 돌았던 것이다.

 

과연 기독교 교리는 원천적으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는가? 이 웃긴 질문을 놓고 난리치는 두 곳을 들라면 미국과 한국이다. 성서의 기록들은 은유적이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저 성서의 특정 문구 하나를 가지고 기독교 보수 진영은 동성애를 금기시한다. 기독교 진보 진영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 문구가 다양한 해석에 대해 열려 있음을 보여 준다. 미국 기독교 보수 진영의 뿌리는 1920년 대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근본주의 운동이 대중매체를 타고 희석화되면서 공화당 세력과 결탁하여, 오늘날 미국 식 기독교 보수주의라는 것이 형성되었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에 매몰된 한국 기독교 세력은 그러한 미국 식 기독교 보수주의의 입장을 예수의 이름으로 선전하고 있다. 아예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격처럼 선전되고 있는 곳은 한국이다. 그나마 미국은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에 맞서 ‘게이 기독교인 협회’와 같은 곳도 많다.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이곳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이러한 물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음 책 제 1부를 참조하라.

 

이상하(2016), <세속화 ‘저기’와 ‘여기’: 무종교인의 관점>, 한국문화사
http://blog.daum.net/goodking/796

 

기독교 교리로 동성애 금지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미국의 여러 대중서 중 베스트셀러는 다음 책이다.

 

Vines, M.(2015), God and the Gay Christian: The Biblical Case in Support of Same-Sex Relationships, Convergent Books.
https://www.amazon.com/God-Gay-Christian-Biblical-Relationships/dp/160142518X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을 함부로 믿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소위 전문가라는 자들이 국외 인터넷 정보를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을 신문 칼럼과 책을 통해 흘리고 있다. 실례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성경원 박사의 '성경(性敬) 시대'] 여자를 사랑하는 아내
http://v.media.daum.net/v/20150413072314271

이민경(2016),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봄알람, 89쪽.

 

 

 

어느 분야의 박사라면, 기사나 칼럼 등을 쓸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터넷 등에 도는 왜곡된 정보를 확증된 것처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거짓이 진실로 둔갑해 버린다. 성경원과 이민경은 책에서 나이팅게일의 성적 지향성을 레즈비언으로 규정했다. 이들을 전문가라 할 수 있을까? 전문가가 특정 분야에 해박할 필요는 없다. 전문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비판적 시각 등을 발휘하는 능력을 키워야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전문가라 할 수 없다. 제대로 된 나이팅게일 전기나 논문 몇 편만 뒤져 보아도, 나이팅게일 레즈비언 설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설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세간의 관심을 끌려고 특정 유명인의 성적 지향성을 이용한 것이 불과하며, 이는 과거 인물에 대한 인권모독에 해당한다.

 

더울 놀라운 것은 높은 평균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낭설로 얼룩진 칼럼과 책에 ‘좋아요’를 누르며 미쳐 날 뛴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울대 학생들은 퀴어 축제에서 소크라테스, 나이팅게일 등을 LGBT 운동의 선구자처럼 소개하기도 한다. LGBT 개념이 정확히 언제 나온 것이지, 소크라테스 시절 당시 동성 관계가 지금의 동성애와 같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도 품지 않고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높은 평균 교육 수준을 자랑하는 이 땅의 교육 과정 자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페미니즘 운동을 소개하고 실천하는 것과 어느 과거 여성의 성적 지향성을 까발리는 것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왜곡된 정보를 확산시키면서 말이다. 신문사나 출판사 편집인들도 한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많이 팔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한다면, 할 말 없다. 다만 이러한 풍토의 출판문화가 페미니즘 정신이 지금 이 땅에 필요한 이유, 이 땅만의 고유한 문제 등을 진단하는 데 방해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을 이용해 대중을 등쳐먹는 출판사들이 너무나 많고, 그러한 출판사에 낚여 뭣도 모른 채 교양을 뽐내는 무지한 자들도 너무나 많다. 정말 묻고 싶다.

 

• 왜곡된 정보를 확신시키는 출판문화와 마약 딜러 중 어느 쪽이 사회적으로 더 악한 것일까? 정말 이 땅에 전문가 집단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신문사, 출판사 책선별 편집자들은 눈이라는 것을 달고나 있을까? 페미니즘이 사회의 화두가 되니, 페미니즘 관련 책 내어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면 다라고 생각하는가? 개인의 가장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성적 지향성을 확인 절차 없이 규정해 버리는 사람들이 과연 소수 인권에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을까?

 

아동 및 자녀 교육 책들은 문제가 더 많다. 그저 부모를 위한 무슨 가이드, 가이드, 개쓰레기 책들이 매주 나오고 있다. 아무 실속도 없는 그런 책을 읽으면서 키득거리는 부모들, 자식을 본인들 생각처럼 키울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한가할 때 다룬다. 아무튼 출판, 신문, 대중매체 비판 관련해 올린 또 다른 글로는 다음이 있다.

 

<과학의 전문 직종화: 페러데이와 데비의 관계>
http://blog.daum.net/goodking/808

<히펠과 칸트의 관계를 왜곡시킨 주니어 김영사>
http://blog.daum.net/goodking/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