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비판적 사고

절차, 수학적 과정, 응축

착한왕 이상하 2017. 1. 7. 01:26

* 다음은 <수학적 표현과 사고: 원놀이에서 연속체 가설까지>에 들어갈 실험적 글이다. 이 때문에 앞뒤 연결 맥락을 모르는 상태에서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혹시 원고가 나중에 책으로 출판되면, 그런 부분들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이 해소될 것이다. 원고가 완성되면, 출판 유무와 무관하게 관련 글들은 모두 삭제할 것이다.

 

3.3. 표현

3.3.1. 문화, 생존 환경, 신체 구조와 표현법

http://blog.daum.net/goodking/803

3.3.2. 절차, 수학적 과정, 응축 (여기에 올림)

3.3.3. 기호의 대상화 (생략)

3.3.4. 수학적 과정의 표현들과 형식 공리 체계의 표현들 (생략)

3.5. 보기들 (생략)

 

 

 

미국에서 이미 실패한 것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개념수학'이라는 것이 여전히 이 땅에서 판치고 있다. 실례로 중학교 및 고등학교 과정 단원별 개념 정리, 여기에 교과서 유제를 덧붙인 것을 학습하면 누구나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고, 입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대중매체 및 출판사 선전들 말이다. 자식의 수학 성적을 걱정하는 부모라면, 차라리 자식이 교과서에 충실하도록 환경을 마련하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수학 교과서는 그나마 다른 교과서보다 낫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 구성 방식은 수학정석이나 해법수학보다 한 수 위이다. 아무튼 개념수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글을 정독하는 것만으로도 눈치 챌 수 있다. 특히 아동 수학교육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왜 아이들은 산수를 배우면서 '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방해받지 않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나 나름대로의 답은 본문에서 <생략>으로 처리해 놓았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이 글을 정독한 사람은 그 <생략> 부분에 들어갈 내용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종 수학 대중서에 현혹당하지 말고 교과서를 중심으로 공부시킬 것을 부모에게 권고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절차, 수학적 과정, 응축

 

수 개념을 가진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요? 수 개념을 가진 아이는 ‘1’, ‘2’, ‘3’, ‘=’, ‘+’ 등 기호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용 속에서만 수들의 모임을 가정할 수 있게 되고, ‘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져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질문에 대해 고민하면서 산수를 배우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는 이유를 밝혀 보려 합니다.

 

산수를 습득한 아이들은 ‘3’에 대해 무엇을 떠올릴까요? ‘3’에 대응하는 수 자체라는 것은 있다 해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것을 떠올릴 것입니다.

 

(i) •••, •• •

(ii) •••, ••+• → •••, (••+)=•••

(iii) 3, 2+• → 3, (2+)=3

(iv) 3, 2+1, 2+1 3, 2+1=3

(v) 3, 1+1+1, 2+1 1+1+1=2+1 3, 1+1+1=2+1=3

 

(i)~(v)는 아이들이 수 개념을 익히는 전체적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절차수학적 과정을 규정할 때, (i)~(v)는 일상적인 셈 및 연산 절차가 수학적 과정으로 구체화되어 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절차

손가락, 직관적 표상, 기호 등을 사용하여 주어진 조건 아래 특정 결과를 산출해 내는 폭넓은 활동을 뜻한다. 대상들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세어 보는 것, 숫자에 대해 점들의 모임을 떠올려 보는 것, ‘+’, ‘-’ 등의 기호를 가지고 더하기 빼기를 하는 것 등 모두 절차를 나타낸다.

 

수학적 과정

절차들 중 수학적 기호들만 사용한 것들 중 의미있는 것들을 일컫는다. 수학적 과정은 특정 절차들 중에서 발견되는 규칙성, 즉 패턴을 기호로 처리하는 과정의 일종이다. 따라서 ‘3’, ‘+’, ‘-’, ‘=’ 등의 조합으로 구성되는 수학적 표현들은 수학적 과정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i)은 수학적 과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절차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절차는 셈 등의 행위, 직관적 표상들을 사용하는 것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습니다. (i) 단계의 아이는 기호 ‘3’에 대해 셈 활동을 통해 특정 대상들의 개수를 확인하거나, 세 개의 특정 대상들을 떠올립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세 개를 구성 하는 여러 패턴들을 익힙니다. (ii)의 절차는 그러한 패턴들 중 더하기 연산에 해당하는 기호 ‘+’뿐만 아니라 연산 입력을 출력화하는 과정 ’, 그리고 연산과 연산 결과의 관계 ‘=’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에 이르면, 아이는 기호 ‘3’을 생성시키는 여러 과정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수들의 연산을 쉽게 수행하기는 힘듭니다. (ii)의 단계에서 연산은 여전히 셈 활동에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iii)의 단계 정도에는 이르러야 아이는 큰 수의 연산도 어느 정도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iii)의 단계에서 셈 활동은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셈 활동이 ‘3’ 등으로 표현된 특정 양에 하나를 더하는 것‘+에 의해 단순화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i)~(iii)과 달리, (iv)(v)의 절차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수학적 과정들을 나타냅니다. (iv), (v)에는 셈 활동과 연관된 직관적 표상은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연산, 대응, 관계 등의 규칙성과 관련된 패턴들도 ‘+’, ‘’, ‘=’로 대체되었습니다. (iv) 단계에 이른 아이는 큰 수의 연산도 어느 정도 쉽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암기한 것에 적합하도록 수들을 적절히 쪼개어 처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35+3 (30+5)+3=30+(5+3)=30+8 38’처럼 말이죠. 이런 식으로 연산을 처리하는 절차를 통해 아이들은 더하기의 결합 법칙 등을 암묵적으로 익히게 됩니다. (v) 단계에 이른 아이는 모든 자연수가 0+1로만 생성 가능함을 암묵적으로나마 파악하게 됩니다.

 

산수를 할 수 있는 아이는 ‘3’에 대해 세 개의 구체적 대상들뿐만 아니라 (i)~(iii)처럼 직관적 표상이 개입된 표현 및 (iv)~(v)처럼 수학적 과정의 표현들을 대응시킬 수 있습니다. 개념을 그저 특정 대상들에 적용 가능한 기호의 일종으로 간주할 때, 아이들에게 ‘3’이라는 개념은 세 개의 대상들에 대해 적용 가능하며, 동시에 여러 절차나 수학적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는 기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학자 피아제(J. Piaget)는 수 개념을 응축 개념(encapsulation concept)’으로 규정했습니다. 셈 활동 등 특정 행위나 인지 활동을 기호 사용을 통해 구체적 표현법으로 발달시키는 과정 속에서 수 개념이 형성된다고 본 것이죠. 다만 피아제는 그러한 발달적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 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당장 수학적 과정을 나타내는 표현 구성에 사용되는 기호들 채택 여부는 피아제의 심리적 발달 단계 모형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채택 여부는 특정 수학적 표현법을 장려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수학적 사고의 발달이 표현법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표현법을 구성하는 기호의 선별은 결코 수학 교육에서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물론 더하기 연산, 같음의 관계 등에 반드시 ‘+’, ‘=’가 사용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호 없이 산수가 발달하기는 힘들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기호는 산수에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수 개념을 응축 개념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i)~(v)처럼 기호들의 표현법을 존중하는 관점이 배어 있습니다. (v) 단계에 이르기 까지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놓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수란 무엇인가?

 

아이들이 무비판적이라서 위 물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유니콘이라는 단어를 배울 때 뿔 달린 말을 종이 위에 그려놓고 묻습니다. “이런 게 다른 세상에 정말 있어?”, “종이 위에 그린 것이 유니콘 맞지?”, “이런 건 사상만 할 수 있는 거지?” 이러한 질문 속에서 유니콘이 정말 있는 것인지를 둘러싼 아이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수 기호 및 수학적 표현들을 배우면서 그러한 고민과 유사한 것을 아이들에게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언급했듯이, 만지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그림을 떠올리는 것 모두 에게 외적인 것으로 경험됩니다. 이러한 경험에서 를 타고나는 것 혹은 고정된 것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일상경험을 존중할 때, 유니콘 모양을 상상하는 것도 마음이라는 가공의 내적 공간이 아니라 주로 머리 근처에서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손가락으로 뒤통수에 유니콘을 그리면, 유니콘의 모양이 뒤통수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니콘 모양을 떠올리는 것과 외부 대상인 특정 사과를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과는 공적 대상인 반면에, 머리 근처에 떠올린 유니콘 모양은 사적 대상입니다. 둘 다 에게 외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실재해도, 내가 떠올린 유니콘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적 대상들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는 것은 우리 삶의 기반과 같은 것입니다. 공적 대상들 중에는 표상으로 취급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사과의 그림자, 종이 위에 그린 사과 모두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적 대상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과의 그림자는 진짜 사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과에 대한 자연적 표상이며, 종이 위에 그린 사과 모양은 사과에 대한 인공적 표상입니다. 그러한 표상들 대부분은 시각에 의존적입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며 맛볼 수 있는 특정 사과의 존재를 당연시 여긴다고 할 때, 그 사과는 사과의 그림이나 그림자와 같은 표상이 아니라 표상의 대상으로 취급됩니다. 또한 사과는 특정 믿음들의 합의 가능성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됩니다.

 

머리 근처에 떠올린 유니콘 모양이 에게 외적인 것으로 실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과와 같이 몸 밖의 외부 대상이 아니며, ‘표상의 대상이 아니라 표상의 일종입니다. 이 때문에, 유니콘의 모양은 믿음들에 대한 객관적 증거로 기능하기 힘듭니다. 머리 근처에 떠올린 유니콘의 모양이 실재하는 것이지, 유니콘 자체가 객관적인 것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니콘을 종이 위에 그려 공적인 대상으로 나타 낸 경우에도, 종이 위의 표상으로서 유니콘 모양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유니콘 자체가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니콘 모양에 대응하는 공적 대상으로서의 동물을 몸 바깥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 근처에 떠올리든 종위 위에 쓰든,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이라는 표현도 외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에 대응하는 대상은 가정조차 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환경과 방식은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인 대상의 존재가 불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이라는 표현에 대응하는 존재는 없다고 합니다. 수 기호 ‘3’은 분명히 둥글면서 동시에 사각형이라는 표현과 같은 것으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수학은 결코 존재 불가능한 것을 다루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기호 ‘3’을 유니콘 모양과 같은 표상으로 취급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특정 모양을 상상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니콘 모양을 기하학적으로 접근할 수는 있으나, 기하학의 삼각형’, ‘사각형등 역시 그것에 대응하는 형태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그런 형태들의 특징이나 관계를 다루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기호 ‘3’사과라는 단어를 비교해 봅시다. 개념을 기호의 일종으로 간주할 때, ‘3’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셈 활동 등의 절차 및 수학적 과정 등을 함축한 응축 개념입니다. ‘사과를 응축 개념처럼 취급하기는 힘듭니다. ‘사과에 셈 활동 등의 절차에서 발견되는 규칙성, 즉 패턴을 처리한 기호와 같은 것은 함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사과모두 중의성(ambiguity)을 띨 여지를 갖고 있지만, 각각이 보여 주는 중의성은 성격이 다릅니다.사과에 대한 중의성은 사과를 바라보는 관점틀(frame)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특정 관점틀에 따라 우리는 사과를 사랑의 상징으로, 혹은 질투의 상징으로 해석합니다. 반면에 ‘3’에 대한 중의성은 간단히 ‘2+1 3’ 혹은 ‘2+1=3’ 등으로 나타납니다. 해석의 차이를 동반한 관점틀의 차이는 수학적 언어 구성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임은 논의가 진행될수록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3’사과사이에는 중요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 유사성을 안다면, 아이들이 (i)~(v) 단계를 거치는 동안 수란 무엇이란가?’라는 물음에 방해받지 않는 이유도 드러나게 됩니다.

 

<생략: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부분에 들어갈 내용 추측해 보기>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정 수 기호에 수학적 대상을 가정하는 것을 의미있도록 만드는 학습 단계는 어떤 단계인가?

 

기호를 대상처럼 취급하는 관점, 기호의 대상화관점에서 위 물음에 대해 답해 볼 것입니다. 그렇게 답해 보는 과정에서 집합론을 산수보다 나중에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를, 그리고 수학적 과정의 표현들과 형식 공리 체계의 표현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도 따져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