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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타인의 정밀어와 한정어 2. 논쟁

착한왕 이상하 2017. 10. 19. 18:51

번스타인의 연구는 1960년대 말에 진행되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정보의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하지 못했다. 노동자 계층의 상당 부분은 빈곤층, 흑인 및 소수 인종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교육에서 상대적 약자 계층을 형성했으며, 지역적으로도 격리되어 있었다. 반면에 중산층 사람들의 정보 활용 방식은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측면에서 그 분포 범위가 넓고 활동적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중산층 아이들은 탄력적 소통, 즉 상황에 따라 정밀어와 한정어 표현을 혼용하여 소통하는 방식에서 더욱 탁월한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점은 과거의 사실일 뿐이다. 그것을 정보의 공유가 손쉬워진 지금의 상황에 직접 적용하기는 힘들다. 공교육의 경우, 과거보다 다양한 계층이 뒤섞여 있다. 정보 기술의 발달로 과거와 달라진 지금의 상황에서 번스타인의 연구 결과가 여전히 성립한다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번스타인의 연구 결과를 둘러싼 또 다른 논쟁은 정밀어 사용이 한정어보다 논리적 추리 및 발견에 효과적이라는 주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 주장의 유효성을 평가하려면, 번스타인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려고 제시한 다음 근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i) 문법은 한정어보다 정밀어 표현 방식에서 더욱 정확하게 사용된다. 또한 단어가 지칭하는 방식이 정밀어 사용에서는 명확한 반면 한정어 사용에서는 애매모호하다. 실례로 한정어 표현 방식에서는 대명사가 정밀어 표현 방식보다 빈번하게 사용된다.

(ii) 논리적 연결사 기능을 하는 접속사들이 한정어보다는 정밀어 표현 방식에서 빈번하게, 또한 정확하게 사용된다. 이 때문에, 사건들 사이의 인과 관계 및 관련 상황 맥락 구조 등이 한정어보다 정밀어 표현 방식에서 쉽게 객관화되어 전달된다.

(iii) 상투어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한정어 표현 방식은 사실 및 추상적 개념을 전달하기 힘들다. 그러한 상투어들은 개인의 태도나 감정을 전달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사실 및 추상적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발견 및 창의적 발상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한정어보다는 정밀어 표현 방식의 사용이 발견 및 창의적 발상에 더 효과적이다.

 

(i)~(iii)을 보면, 외부 상황 맥락의 객관적 전달에서 정밀어 표현 방식이 한정어 표현 방식보다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정밀어와 한정어 표현 방식을 소통 상황에 따라 혼영 사용하는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가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높다는 사실은 (i), (ii)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시험 문제 구성 방식은 특정 상황 맥락에 한정되지 않는 객관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 정밀어 표현 방식에 근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의 연구 결과는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노동자 계층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질 낮은 공교육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로부터 정밀어 표현 방식의 사용이 한정어보다 논리적 추리뿐만 아니라 발견 및 창의적 발상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렇게 주장하려면, 다음을 전제해야 한다.

 

첫째, 논리적 추리는 본질적으로 언어적이며, 논리적 추리의 패턴은 한정어보다는 정밀어 표현 방식 속에서 잘 드러난다.

둘째, 모든 발견의 핵심은 논리적 추리이다.

셋째, 감정 및 태도가 발견 및 창의적 발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항은 (ii), 그리고 세 번째 사항은 (iii)에 함축되어 있다. 논리적 추리, 발견 및 창의적 발상과 관련해 위 세 가지 사항을 무조건 수용하기는 힘들다. 논리적 추리가 본질적으로 언어적이라면, 인간 외의 다른 동물은 추리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그러한 결론은 현대 과학에 의해 뒷받침될 수 없다. 논리적 추리의 본질을 언어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관점은 추리에 개입하는 다양한 표현 수단을 언어적인 것에 한정시키는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실제 발견 사례들을 살펴보면, 인과 관계 및 상황 구조들을 나타내는 표현 수단은 결코 언어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또 언어적 표현 수단도 정보 압축률이 높아 작성자가 아닌 경우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은 과학자, 수학자, 예술가들의 실험 및 습작 노트를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한 노트는 작성자 및 작성자와 정보 및 지식을 공유한 모임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성있고 정보 압축률이 높은 한정어 부호 체계에 가깝다. 물론 과학 및 수학의 발견에서 논리적 추리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다양한 발견 맥락을 고려할 때, 논리적 추리가 무조건 모든 발견의 핵심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작곡, 회화 등 예술 활동에서 특정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은 결코 논리적 추리만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 개입하는 감정 및 정서적 태도를 무시할 수 없다면, 감정 및 태도가 발견과 창의적 발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사소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정밀어 사용이 한정어 사용보다 논리적 추리 및 발견에 효과적이라는 번스타인의 주장은 무조건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1900년대 초 미국 흑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한정어를 닮은 특정 언어 체계를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한 언어 체계는 흑인들이 공유한 것을 외부에 드러내 주지 않기 때문에 지배층에 맞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언어 체계를 기반으로 한 문화에서 흑인들의 여러 음악 장르가 생성되고 형성되었다. 그러한 음악 장르에 독특한 선율의 발견 맥락은 집단적 측면에서 번스타인 주장의 유효성을 약화시킨다. 또한 개인의 의도나 목적을 숨기려고 창의적 발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외교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그러한 경우에도 정밀어보다는 한정어 표현 방식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정밀어가 한정어보다 논리적 추리 및 발견에 효과적이라는 번스타인의 주장은 무조건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의 유효성을 둘러싼 논쟁과 무관하게, 정밀어와 한정어 구분 방식은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국내 일부 교육 사회학 교재 및 인터넷 사전의 정밀어와 한정어 규정 방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자.

 

국내 일부 교육 사회학 교재 및 인터넷에 등장하는 정밀어와 한정어 규정 방식은 번스타인이 제시한 근거 (i)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i)은 특정 외부 상황 맥락을 공유하는 한정어 표현 체계와 그렇지 않은 정밀어 표현 체계를 비교할 때 나타나는 각 체계의 특징이다. (i) 자체로부터 그러한 맥락 공유 여부와 관련된 단어 사용의 목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기능의 측면에서 정밀어와 한정어 표현 방식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특정 외부 상황 맥락 공유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정밀어는 그 상황 맥락을 구체적으로 객관화시켜 그 상황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확히 전달시켜 주도록 기능한다. 반면에 한정어는 그 상황 맥락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정보 압축률을 높여 소통의 경제성을 높여 주도록 기능한다. (i)은 이러한 기능 차이에서 수반되는 특징이다. 그 특징을 중심으로 정밀어와 한정어를 구분하면, 정밀어와 한정어 사용의 기능 방식이 그 특징에 묻혀 드러나지 않게 된다. 이제 정밀어가 한정어보다 논리적 추리 및 발견에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의 유효성과 무관하게, 번스타인의 정밀어와 한정어 구분 방식이 탄력적 소통 능력을 키워 주는 데 응용될 수 있음을 살펴보자. 그의 구분 방식이 그렇게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