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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타인의 정밀어와 한정어 1. 기본적 이해

착한왕 이상하 2017. 10. 12. 17:49

 

 

번스타인의 정밀어와 한정어

- 맥락 전달 및 변형 훈련의 교육적 가치 -

 

바실 번스타인(B. Bernstein)1924년에 태어나 2000년에 생을 마감한 영국 유대계 언어 사회학자이다. 계층과 언어 사용법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번스타인은 교육 사회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와 함께 따라다니는 것은 정밀어(elaborated code)’한정어(restricted code)’이다. 정밀어와 한정어 개념은 그의 1971년 저서 <언어 사회학에 관한 이론적 연구들(Theoretical Studies towards a Sociology of Language)에 등장한다. 여러 계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번스타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학을 포함한 모든 언어 체계의 사용법에서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중산층 아이들에 비해 낮은 학업 성취도를 나타낸다. 이러한 차이를 발생시킨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번스타인은 계층 간 문화적 격차에 따른 언어 사용법에 주목한 것이다.

 

정밀어와 한정어 개념은 번스타인을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접근법을 왜곡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번스타인의 부적절한 용어 선택도 한 몫을 한다. ‘정밀어한정어는 그의 의도를 오해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정밀어하면 문법, 어휘 사용에서 정확성 및 풍부성을 암시하는 느낌을 준다. ‘한정어하면 문법, 어휘 사용에서의 결손을 암시하는 느낌을 준다. 국내 낡은 사회 교육학 교재나 인터넷 백과사전 및 위키 등을 보면, 지나치게 문법이나 어휘 능력과 관련시켜 정밀어와 한정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점은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다. 번스타인의 정밀어맥락 비한정적 부호 체계, ‘한정어맥락 한정적 부호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 그런지는 번스타인과 관련해 많이 회자되는 두 사례를 비교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여러 부류의 아이들에게 특정 만화 장면을 보여 주고 그 장면을 설명하도록 한 결과, 다음의 두 가지 결과가 나왔다.

 

<맥락 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

그들이 축구를 하는데, 그가 그걸 찼어. 그런데 그게 날아가 창문을 깬 거야. 그들은 그걸 보았어. 그리고 그가 나와 소리를 질렀어. 그들이 그걸 깼기 때문이지. 그들은 도망쳤어. 그때 그녀가 창문을 통해 그들을 꾸짖었어.”

 

<맥락 비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

세 명의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공을 찼어. 그 공은 창문 쪽으로 날아가 창문을 깨버렸어. 아이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았지. 그리고 한 남자가 나와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어. 그들이 그의 집 창문을 깼기 때문이지. 아이들은 도망쳤어. 그때 이 광경을 창문을 통해 본 어느 여자가 그들을 꾸짖었어.”

 

위 두 사례는 특정 만화 장면이라는 공통 자료에 기대고 있다. 그러한 공통 자료를 외부 맥락(external context)’이라고 할 때, 그 외부 맥락을 공유한 아이들은 <맥락 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외부 맥락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은 <맥락 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에 등장하는 ’, ‘그것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외부 맥락은 그 맥락을 구체적이고 명료화한 <맥락 비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를 통해 그런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 <맥락 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로 대표된 한정어는 외부 맥락에 한정되어 있는 단어 사용법에 근거하는 반면, <맥락 비한정적 단어 사용법의 사례>로 대표된 정밀어는 외부 맥락의 정보를 객관화하여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위 두 사례의 단순한 비교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번스타인의 정밀어와 한정어를 단순히 문법의 정확성과 어휘의 풍부성보다는 맥락 전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때문에, 정밀어를 맥락 비한정적 부호 체계, 그리고 한정어를 맥락 한정적 부호 체계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이다. 정밀어 사용자를 한정어 사용자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어느 모임이나 그 모임의 문화에 맞게 형성된 한정어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모임의 형태는 사회문화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것은 특정 언어 사용법과 맞물려 있다. 한정어의 사용은 공동의 믿음, 지식, 상황 등을 바탕으로 정보의 압축률을 높여 소통의 경제성을 가능하게 해 준다. 다음 두 사례를 살펴보자.

 

<사례 1>

자기야, 거기에서 올 때 우리 아기가 입을 이뿐 겨울옷 하나 사와.

 

<사례 2>

강아지를 끔찍이 아끼는 신혼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일본에 출장 가 있는 동안 부인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강아지가 입을 이뿐 겨울옷 하나를 사오라고 당부했다.

 

<사례 1><사례 2>는 각각 한정어와 정밀어의 보기에 해당한다. <사례 1>의 경우, 신혼부부의 생활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기’, ‘우리 아기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사례 2>는 신혼부부가 처한 상황 맥락을 객관화시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전달시켜 준다. 맥락 전달 구성의 길이 측면에서 <사례 1><사례 2>보다 짧다. 그 만큼 <사례 1>은 신혼부부와 관련된 정보들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보 압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신혼부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대부분은 <사례 2>보다는 <사례1>처럼 한정어 표현 방식을 사용한다. 그들에게 <사례 2>처럼 서로 공유한 모든 정보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효율적 정보 교환 측면에서 접근할 때, 특정 상황 맥락을 공유한 모임의 사람들은 정보들을 압축시켜 소통의 경제성을 꾀하는 성향을 보인다. 소통의 경제성 덕으로 그들은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정보들을 서로 교환할 수 있다. 그런데 한정어 사용의 이러한 소통의 경제성은 주어진 상황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 상황 맥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정어 사용 방식은 소통의 장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례 1><사례 2>를 비교해 보면, 한정어 사용자의 지적 능력이 정밀어 사용자보다 떨어진다고 무조건 일반화시킬 수 없다. 소통에서의 지적 수준은 단순히 지식의 양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수준은 소통 상황 및 구조의 이해 능력과 관련되어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공유한 것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경우, 굳이 정밀어 표현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정밀어 표현 방식의 사용을 통해 주어진 맥락을 객관화시킬 필요가 있다.

 

번스타인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냈다.

 

노동자 계층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정밀어보다는 한정어 사용을 선호한다. 반면에 중산층 아이들은 정밀어와 한정어를 소통 상황에 따라 혼용하여 사용한다. 정밀어 사용이 한정어보다 논리적 추리 및 발견에 효과적이기 때문에, 노동자 계층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는 중산층 아이들보다 낮게 나타난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일련의 물음들에 답해 보자.

 

번스타인의 연구는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진행된 것일까? 번스타인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한가? 우리나라 일부 교육 사회학 교재 및 인터넷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정밀어와 한정어 규정 방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좀 더 구체적 이유는 무엇인가? 번스타인 주장의 유효성과 무관하게 그것이 함의하는 교육적 가치는 있는가? 있다면, 그 교육적 가치는 무엇인가?

 

 

- B. 번스타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