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적응 기관으로서의 마음: 환경과 합리성

착한왕 이상하 2017. 6. 8. 22:46

인터넷 검색하다 글 하나를 발견했는데, 보니까 내가 13년 전에 썼던 글이다. 마음이 안 드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내용은 정체기 늪에 빠진 요새 인지심리학이나 과학의 상황을 고려할 때 여전히 참신한 면이 있다. 그래서 해당 사이트에서 이 글을 복사해 옮겨 읽기 좀 더 편하게 글만 수정했다. 내용은 뭐 그대로이다. 이 글의 원본은 2004년 한국철학자대회에서 발표된 글로 당시 대회보 2에 수록되었다. 올리는 것은 수정을 거쳤기 때문에 원본보다 낫다. 이 글을 보관해온 분께 감사 ...

 

 

 

적응 기관으로서의 마음

- 환경과 합리성 -

 

이 글의 목적은 마음을 적응 기관에 유비시켜 환경 구조가 감정에서 사고에 이르기까지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임을 보이는 것이다. 시작부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적응은 무엇인가? 현재 진화 생물학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더불어 신문 기사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적응 개념은 이렇다. 새의 날개는 날려고 진화했다. 날기 위해 적응되도록 날개가 발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느낌은 자연 신학의 디자인 논증과 잘 어울린다. 날개는 난다는 목적에 적합하다. 각각의 기관의 기능은 그러한 특정 목적을 위해 지성적인 신에 의해 디자인되었으며, 기관의 적응 목적들의 위계질서는 자연계에서 진화의 사닥다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목적론적 적응 개념을 따르면 다음 두 진술은 의미에서 차이가 없다.

 

(1) 새의 날개는 날기 위해 진화했다.

(2) 날기에 적합한 새의 날개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생물진화론에서 (1)에 담긴 목적론적 적응 개념이 부정된다. 하나의 종에 속하는 모든 새는 다르며, 변이는 자원의 유무와 상관없이 계속 일어난다. 축적된 변이들 중 환경에 적응된 것들이 자손으로 대물림된다. 현대적 의미에서 변이의 대물림은 유전형의 빈도수 변화를 가져오고, 이러한 자연선택의 오랜 과정 속에서 과거 종에서 새로운 종이 분화한다. 새의 날개는 난다는 목적에 적합한 디자인에 근접 진화를 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의 산물일 뿐이다. (2)는 이제 다음과 동치가 된다.

 

(3) 날기에 적합한 새의 날개는 자연선택의 산물이다.

 

(2)(3)의 동치 관계는 진화의 기제가 자연선택임을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1930년대와 1940년 대 다윈 진화론과 집단유전학의 결합함으로 탄생한 진화의 종합설 이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1) 선택의 단위가 유전자인지 개체인지 혹은 집단인지가 여러 철학적 문제와 맞물려 논쟁되었으며, 생물 철학은 성이란 유전적 변이의 기제, 즉 유전적 재조합의 기제에 불과하다는 선입관을 낳았다. 새의 날개가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데 혹은 날개 기능의 근접인(approximate cause)은 해부학적인 것이지만 궁극인(ultimate cause)은 자연선택이라는 데 다수가 동의한다. 두뇌 기능 또한 그럴까? 이 물음은 두뇌가 자연선택의 결과인지 부산물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 논쟁은 사회 생물학을 둘러싸고 진보 대 보수 혹은 좌파 대 우파 논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남긴 것은 도처에 깔린 상대편 관점에 대한 단순 확장의 오류와 애매함이다. 실례로 유전자 차원에서 효율성에 근거해 공리주의 입장을 강조했다고 하여, 이것이 맞바로 사회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옹호론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형의 다양성 확보라는 공리주의적 준칙은 역으로 농수산물 개방 압력에 대한 저항 논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사회 생물학의 진정한 의도는 가변적인 문화의 유전적 의존성과 관련되는 것이지 결코 현상의 하위 차원을 가지고 상위 차원을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애매함은 두 종류로 나타난다. 모든 형질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으로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선택 입장을 가지고 전체를 포섭하려는 것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두뇌를 진화의 부산물로 주장하면서 문화적인 것을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생물학의 자연주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다.

 

과연 역사적 다윈의 본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자신이 <종의 기원>을 대표작으로 생각했을까? 최근 생물학사적 연구는 다윈의 다양한 관심사가 오히려 현재 생물 철학 담론 속에 은폐되고 있음을 암시한다.2)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종 형성 및 변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할 수 없었다. <종의 기원>의 목적은 종 분화에 의한 공통 후손설을 설명하는 것에 가깝다. 성의 유래, 발생 및 발육은 훨씬 오랜 기간 동안 다윈이 고민한 문제였으며, 종 분화의 기제도 자연선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 문제와 관련해 다윈이 집단선택을 옹호했지만, 집단선택은 자연선택의 범주 안에서 다루어졌다. 다윈은 선택의 단위뿐만 아니라 종류에 대해서 다원론 입장을 지지했다. 이에 대한 실례로 그의 성선택 개념을 들 수 있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차이는 다음의 형질 구분 속에서 잘 드러난다.

 

자연선택에 의한 형질: 암수 구별을 전제하지 않고 개체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말한다. 그 형질이 자연선택에서 기인했다면 적응된 것으로 불린다.

 

성선택에 의한 형질: 암수 구별과 관련하여 암컷 혹은 수컷 한 쪽 개체에만 해당한다. 그렇기에 성 구별을 전제하지 않는 형질의 적응도를 성선택에 의한 형질에 맞바로 적용할 수 없다.3) 성선택에 의한 형질은 수컷 대 수컷 경쟁과 관련된 성내 형질(intrasexual trait)과 암컷의 수컷 선택 과정과 관련된 성간 형질(intersexual trait)로 나뉜다.

 

자연선택과 성선택의 이러한 구분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다윈이 주장한 가설들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가 진화의 기제에 대해 다층적이고 다원론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성선택이 성 구분 이후에 작용하는 것임을 눈치 챈다면, 성의 유래에 대해서 다윈은 선택 개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체 기관은 자연선택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성을 집단 결속력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감정의 유래에서는 성선택의 역할이 클 것이다.4) 이러한 다윈의 추측에 동의하더라도, 성의 유래는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진화 기제의 다층적이고 다원론적 측면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첫째, 두뇌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주장은 절대 자연선택의 결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하여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적응이 아니라는 적응주의자의 결론 자체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그런 정당화는 선택에서 진화의 주요 기제가 자연선택임을 전제할 때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두뇌는 자연선택, 성선택 그리고 여러 다른 기제가 함께 개입된 진화의 산물이다. 둘째, 적응 기관에 마음을 유비시킬 때 마음은 진화의 산물인 두뇌 기능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선택의 다층적 다원론은 자연선택에서 성선택에 걸친 적응의 여러 맥락 의존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맥락 의존성을 거부하지 않는 형질과 두뇌 기능은 유기체가 환경 속에서 만나는 문제를 푸는 데 복합적인 생물학적 기반이 된다. 두뇌 혹은 마음과 연관된 환경 적응 개념은 그러한 문제 해결의 폭 넓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적응의 맥락 의존성은 문제 해결 관점에서 환경 적응의 다양성을 뒷받침해 준다. 이 두 점을 망각한다면, 이 글의 의도는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형질과 유전자가 아니라 유전자망과 관련시키는 후성 유전학까지 확장된 현대 생물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 다수는 여전히 적응을 자연선택에 국한해 해석하는 관습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적응의 포괄적인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다음 단계를 거쳐 환경 구조에 의해 제한된 합리성을 아주 기본적인 진화론의 지식에 근거해 보일 것이다.

 

첫째,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적응 기관으로서 마음의 은유를 끄집어낸다.

둘째,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을 거부할 때 다양한 인지 능력을 가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을 이분하는 전통적 관점 속에서 합리성의 기준은 상황 맥락과 무관한 규범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점은 적응 기관으로서의 마음이라는 은유 속에서 의심의 대상이 된다.

셋째,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것에서 그렇지 않은 판단에 이르기까지 환경 구조는 인간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한다. 이점을 인정하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은 깨어진다.

넷째, 환경 구조가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무리수 발견을 둘러싼 오류를 통해 알아본다.

다섯째, 환경 구조를 단순화하여 파악하고 변형하며 설계하는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서 사고를 논한다. 결론적으로 감정에서 사고에 이르기까지 환경 구조는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이고, 이는 합리성이 그러한 구조에 의해 제한되었음을 뜻한다.

 

 

행위와 행동

 

적을 만났을 때 앞발을 치켜드는 사마귀의 행동은 유전적으로 강하게 구속되어 있다. 행동 유형의 유전적 구속의 첫 번째 조건은 그 유형 자체가 유전자의 모임, 곧 유전형(genotype)에 의해 맞바로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환경 구조에 대해 즉시 나타나는 행동 유형은 행동의 사전 기제로서 감정과 사고 따위를 전제하지 않는다. 적을 만났을 때 앞발을 치켜드는 사마귀의 행동은 사전에 특정 감정이나 계산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유전 가능한 행동 유형은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유전은 유전자를 매개로 하며, 개체 발생은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난다. 머리카락의 색과 같은 조직의 형질 차이는 유전자 차원의 차이를 전제하지만, 머리카락의 착색 과정은 환경 요인의 고려 없이는 설명될 수 없다. 노란 머리카락의 유전자는 검은 머리카락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노란색 자체가 유전자의 직접적인 발현은 아니다.

 

유전적으로 구속된 행동은 생리적 반응이 아니다. 망치로 의사가 무릎을 때리면,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앞으로 튀어 나간다. 이러한 생리적 반응은 자극에 대한 기관 및 신경계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개체수의 증식에 유리한 신경계와 기관의 구조, 형질 및 행동 방식이 자연선택되었다고 하여, 생리적 반응 또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극에 대한 신경계와 기관의 구조 자체에서 기인하는 생리적 반응은 진화의 부수 효과(side effect)일 뿐이다. 그것은 개체의 환경 적응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구속된 행동은 식물에게서도 발견된다. 태양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의 굴광성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다. 해바라기의 굴광성은 해바라기의 생존과 증식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해바라기의 굴광성과 달리 인간의 행위는 유전자 차원에 구속되어있지 않다. 의도와 감정과 같은 정신 상태를 매개로 하여 상대편에 대한 공격적 혹은 온화한 몸짓이 나타난다. 의도와 감정 같은 것은 행위를 대리하는 경우가 흔하다. 실례로 복수를 상상하는 것은 실제 복수 행위를 대체시켜 버린다. 이 점은 역으로 정신 상태가 행위의 잠재 기반이라는 사실과 양립한다. 정신 상태와 관련된 형질과 기능이 유전 기제를 거부하지 않는 두뇌와 연관되기 때문에, 정신 상태에 근거한 행위가 생물학적인 것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이 점은 정신 상태를 인간 행위의 원인으로 여기는 일상적 관점과도 마찰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유전적으로 구속된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위의 상식적인 구별이 성립한다. 하지만 행동과 행위가 서로 배타적 관계를 맺는 범주적 원인들에서 기인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행동을 물질적 자극에 연관시키고, 행위는 물질과 독립된 실체로서 마음에 연관시키는 방식 혹은 행동은 자연적인 것이고 정신은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은 진화론에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화의 산물인 두뇌의 기능과 연관시킬 때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은 붕괴된다. 그 둘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행위든 행동이든 그것은 두뇌의 기능을 매개로 하는 표현이다. 인지 기능이 두뇌 기능에서 기인한다고 할 때 모든 인지 기능이 의식과 동기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동기의 유무에 의한 행위와 행동의 일상적 구별은 그 둘이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결론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상적 구별이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마음이 두뇌 기능과 관련된다고 하여 그 둘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두뇌 기능이 뉴런과 호르몬의 합성 과정이라고 가정하면, 합성의 결과로서 마음의 속성은 두뇌 기능에 의해서만 환원 설명 불가능할 수 있다. 심지어 환경이 단순한 자극의 원천이 아니라 두뇌와 상호작용하여 지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을 생성한다면, 지각 경험은 두뇌에 위치하지 않는다.5) 지각 경험이 나타날 때 뉴런 및 호르몬의 합성 과정에 의한 시너지 혹은 제 3의 효과가 감정과 사고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능성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합성의 미덕2차 대전 이후 과학과 철학에서 중요 주제가 아니었다. 뉴런과 호르몬의 합성 과정의 결과로 마음을 가정하는 것은 현재 생물학의 경향과 양립 가능하다.6) 하지만 우리의 주제는 두뇌와 마음의 관계가 아니다.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남긴다. 마음의 기원이 두뇌 기능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이것이 맞바로 그 둘의 동일성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 강조한다.

 

두뇌의 기능에 기반을 둔 마음은 환경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처리한다. 두뇌의 존재가 적어도 인간의 생존과 집단 유지에 유리한 것이라면,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을 부정한다면, 행위의 원천으로서 마음의 기원이 초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질 이유는 없다. 행위와 행동 둘 다 환경 적응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때 행위의 배후 존재로 가정된 마음은 적응 기관에 유비된다.

 

 

마음의 어두운 면

 

마음이 하나가 아닌 여러 능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옛날부터 인정되어왔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행복의 조건으로서 마음의 여러 능력의 조화가 강조되었다. 행복한 삶과 올바른 논증 혹은 아포데익시스(apodeixis)를 구별할 때 후자가 전자에 필요하지만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합리적 능력으로서 이성 개념은 다의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이성을 추론 능력과 연관시키는 전통이 확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논리학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 논리학의 임무는 논증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이다. 둘째, 논리학을 지식의 체계, 즉 과학(episteme)이 되게 하는 것이다.7) 이 두 목적의 관계는 미묘한 주제이다. 논리학의 첫 번째 목적에서 논증은 일상 논증을 포함한 실제 논증(substantive argument)과 관련된다. 과학의 이상적 체계는 종종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체계(axiomatic system)로 여겨졌다. 논리학의 두 번째 목적은 논리학을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과학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명제의 형식 추론 관계에 집중된 논리학의 흐름은 두 번째 목적을 반영한다. 논리학의 두 번째 목적은 첫 번째 목적의 필요조건인가 혹은 충분조건인가?

 

1. 두 번째 목적이 첫 번째 목적의 필요조건이라고 하자. 논리학의 규칙들은 합당한 논증의 평가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합당한 논증을 만들어낼 수 없다. 논증은 형식 논리의 추론 관계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없다.

 

2. 두 번째 목적이 첫 번째 목적의 충분조건이라면, 논증의 합리성은 형식 논리의 추론 관계를 만족하는가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2를 지향했다는 증거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실제 논증은 정보에 근거한 판단이 대부분이다. 마음의 여러 능력은 환경 구조를 파악하는 데 민감하며, 환경 구조는 기억 속에 저장된다. 우리에게 환경은 광범위하다. 그것은 문명의 요소와 인간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의사소통에서 합당한 논증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설득과 연관된다. 논증이 설득과 결합할 때 추론 능력뿐만 아니라 청자의 성격과 감정 이입의 능력도 개입한다.8) 타인의 설득과 관련된 수사학의 기법이 일상적 논증에서 배제될 수 없다면, 추론 능력에만 의거해 논증의 합당성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두 목적, 즉 논증의 평가 방식을 개발하는 목적과 논리학 자체를 과학적 지식 체계로서 만드는 목적 중에서 후자가 주목을 받았다.9)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체계를 모방함으로써 논리학을 형식 과학(formal science)으로 정착시키려는 역사적 과정은 연속적이지 않다. 그 과정을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형식 과학에 대한 철학자의 동경은 논리학을 다른 분과와 독립된 자율적 학문(autonomous science)으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형식 추론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논리학이 자율성을 획득할 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두 목적 사이의 관계는 2로 귀결된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형식 논리학에서 명제와 진술의 상호 교환성을 들 수 있다.

 

참 또는 거짓과 관련된 명제의 개념은 다의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 개념은 참인 생각과 대등하다. 하나의 생각에 대응하는 객관적 사실이 있다면 그 생각은 참이다. 세계와 사고 그리고 사고와 언어 사이에 구조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고는 언어보다 심층적인 것이었다. 러셀은 명제를 사고가 아니라 모든 일상 언어에 공통된 것으로 가정된 상징기호(symbol) 체계의 추론 단위로 여겼다.10) 카르납(R. Carnap)에 이르러 명제는 참 또는 거짓 판단 가능한 진술의 의미로 여겨졌다.11) 이 시점에 이르러 참 거짓 판단에 있어서 단순 명제는 추론 및 의미의 기본 단위로 취급된다. 추론 과정이 내용 혹은 의미와 무관하게 형식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면, 진술과 명제는 상호 교환 가능하다. 이 점은 콰인이 논리학을 다룰 때 뚜렷이 나타난다.12) 추론에서 진술과 명제의 상호 교환성은 진술로 표현되는 실제 논증의 추론 또한 형식 명제 논리학의 규칙을 따라야함을 함축한다. 어떠한 논증이든 그것의 합리적 부분은 형식 논리의 추론 관계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논리학이 형식 과학으로서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은 필연적이다. 논리적인 것은 오로지 추론 능력과 관련되며, 추론 능력은 상황적인 맥락과 무관하게 형식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논리적인 것이 인간의 합리성을 대표한다면, 합리성은 규범적이고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행위든 논증이든 그것이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상황 및 환경과 무관한 보편적인 절차 혹은 규칙을 만족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합리적 행위에 대한 그러한 규범을 마련하느라 바빴다. 확률을 도입함으로써 합리성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지만, 합리성에 대한 철학자들의 태도는 그리 탄력적이지 못했다. 여전히 많은 철학자는 일상적인 확률 추론이 확률론의 형식적인 규칙을 따라야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합리성과 관련된 여러 규범과 규칙은 문제 혹은 논증의 상황과 환경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이다.

 

과연 인간의 두뇌에 상황 및 환경과 무관한 형식 추론 규칙과 같은 알고리듬이 들어있을까? 그러한 규칙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논증들을 근거로 추상화(abstraction)된 것이다. 마치 물리학자가 특정 법칙을 발견할 때 많은 현실적 조건을 제거하거나 혹은 고정시키는 것처럼 논리학의 형식적 규칙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상 언어에 공통된 형식 추론 규칙이 있다는 관점은 추론의 본질이 내용과 무관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실제 학생들에게서 발견되는 우리말의 삼단논법은 명제 사이의 추론 관계라기보다는 개념의 영역이 줄어드는 절차를 따른다. 죽는다는 개념은 동물이라는 개념을 포함하며, 동물 개념은 사람 개념을 포함한다. 죽는다는 개념이 사람 개념을 포함하므로 학생들은 사람 또한 죽는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개념 사이의 포함 관계를 집합론을 빌려 표현한다면, 이 표현 방식은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형식 논리학의 삼단논법과는 다르다.13)

 

논리적인 것이 합리적 측면을 대표한다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이 뒤따른다. 합리성의 기준은 환경 및 상황의 구조에 좌우되지 않는 규범적이면서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마음의 밝은 면이라는 은유가 합리적인 것을 나타낸다면, 비합리적인 것은 마음의 어두운 면이다. 비논리적인 것, 곧 마음의 어두운 면에 속한 것으로 여겨진 심리적인 것은 인간 합리성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없다. 발견에 심리적인 것이 필수적이라면, 전통적인 합리성의 관점 속에서 발견은 다루어질 수 없다. 실제 논증이 문제의 환경 혹은 역사적 배경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논증의 합당성은 합리성을 대체할 수 없다. 추론 능력이 필요 없어 보이는 즉각적인 행동은 합리적인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합리성을 철학의 고유한 범주 속에 구속하려는 이는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 논증의 상황적 합당성과 합리성의 이분법, 그리고 행위와 행동의 이분법에 미련을 갖는다. 이러한 이분법들이 쉽게 철학의 자율성을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순수한 의미에서 자율적인 학문이 있을까? 내 눈에는 그렇게 자율적인 학문은 없다. 철학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는 문제로 남기더라도, 과연 비합리적인 것을 대표하는 마음의 어두운 면이 있을까? 마음을 적응 기관에 유비할 때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이분법 속에서는 추론 능력 이외에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다른 능력들과 심리적인 것들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마는데, 이 점은 진화론의 사고방식 속에 포섭되기 힘들다. 비합리적인 것을 대표하는 마음의 어두운 면은 없다.

 

 

환경과 합리성

 

두뇌 기능과 연관된 마음의 능력은 하나가 아니다. 두뇌 기능이 그렇기 때문이며, 이 점은 진화론 속에서 정당화된다. 신경계망 속의 가장 복잡한 기관으로서 두뇌는 진핵생물(eukarya) 영역의 일부를 차지하는 동물계의 모든 개체에서 발견된다. 진화 역사의 초기에 출현한 동물의 두뇌와 인간 두뇌 사이에는 복잡성 증가의 경향이 나타난다. 적응 기능의 다양성을 함축한 이러한 복잡성의 증가는 이 글의 도입부에서 강조했듯이 자연의 설계자를 가정하지 않는다. 두뇌 기관은 환경 변화 속에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 변이의 축적과 유전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달해왔다. 여기서 발달은 개체의 환경 적응에 효과적인 것이 선택됨을 함축하고, 자연선택 및 성선택에 의한 진화는 단계적이기 때문에, 두뇌 기능의 다양성이 두뇌 출현 시점에서 한 번에 얻어질 가능성은 없다.

 

점진적 진화 가설은 두뇌 기능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임을 함축한다. 마음의 능력이 두뇌 기능에 근거하는 한에서, 마음의 능력은 일종의 형질에 유추된다. 한 종의 형질은 과거에 축적된 변이들 중 환경 적응에 유리한 것들이 선택된 것이고, 적응에 유리하다는 것은 적응 맥락에 따라 상대적 의미를 띤다. 짝짓기의 맥락 속에서 적응은 성선택과 관련되고, 개체 생존의 맥락 속에서 적응은 일반적으로 자연선택과 관련된다. 수컷 공작새의 크고 화려한 꼬리는 짝짓기 맥락에서는 이득이지만 개체 생존의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개체 생존 혹은 생식적 적합성에 국한된 다윈적 이득은 이제 환경 적응 맥락에 따라 상대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어떤 형질이 특정 환경 적응 맥락에 유리하다는 것은 과거 대응되는 조상 형질과의 비교를 전제한다. 현재 형질의 조상을 추적하는 방법론의 문제를 제쳐둔다면, 특정 환경 적응 맥락에 유리하다는 것은 다시 두 가지 하부 전제를 갖는다. 하나는 환경의 상대적 안정성이다.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변이를 발생시키는 환경이 진화 역사가 불가능할 정도로 변덕스러워서는 안 된다. 아니면 개체의 신체 기관과 같은 표현형 및 형질 발생 과정이 환경 변화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기제를 갖추어야 한다. 진화 생물학은 다윈 진화론과 유전학의 결합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고, 개체의 표현형 및 형질 발생이 환경 변화에 저항하는 방식은 현재 후성 유전학(epigenetics)에서 연구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전통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던 진화론과 발생학을 결합시키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종 분화(speciation)를 수반하는 변이라는 진화론의 관심, 그리고 변이에 저항하는 요인들에 대한 발생학의 관심을 결합시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진화론과 발생학의 관계는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진화의 선택압으로서 환경, 형질 및 기능의 환경 변화에 대한 유기체의 저항은 환경 구조와 합리성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1) 형질은 특정 환경 속에서만 우선 의미를 갖는다. 특정 환경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러한 형질이 과거의 것에 비해 그 특정 환경에 더 적응적임을 말한다. 특정 환경에 적응적인 어떤 형질이 유전적으로 강하게 구속되었을 때 그것은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것으로 분류된다. 실례로 더러운 음식에 대한 역겨운 감정을 들 수 있다. 비논리적인 것으로 분류된 역겨움 같은 감정은 그저 믿음 혹은 판단에 수반되거나 아니면 특정 행동을 유발하는 성향 강화에 필요한 부산물 정도로 취급되었다. 논리학의 대상으로서 믿음과 지식은 합리성의 구성원으로서 인식 상태(epistemic state)로 분류되었고, 감정은 파생 상태(derivative state) 아니면 충동 상태(desiderative state)로 분류되었다. 인식 상태의 제한 없이 감정에 이끌린 행위는 합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점은 행위를 인식 상태와 충동 상태의 합성 기능으로 간주한 서양 통속 심리학(folkspsychology)의 뼈대가 되었다.

 

감정을 생존, 적응 그리고 환경의 복합 맥락에서 이해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더러운 음식이 주는 역겨운 감정은 일종의 환경 단서이고, 역겨운 감정은 더러운 음식을 피하도록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이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게 함으로써 더러운 음식에 대한 역겨움은 개체군에게 다윈적 이득으로 봉사한다. 다윈적 이득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더러운 음식을 피함으로써 개체들의 통계적 생존율을 높이는 데 봉사함을 뜻한다. 역겨운 감정은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후자를 택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인지적 지름길(cognitive shortcut)’이다.14) 성욕과 연관된 감정은 개체들의 짝짓기 빈도를 높인다는 맥락에서 다윈적 이득으로 봉사한다. 감정과 같은 형질은 환경 구조의 정보, 실례로 특정 냄새에 대해 즉각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지적 구성원이 된다. 선택이 판단의 일종이라면, 감정 또한 판단의 일종이다. 합리성을 맥락 의존성을 갖는 다윈적 이득과 연관시킬 때 합리성의 영역에서 신경계의 기능으로서 감정 형질을 배제할 수 없다.

 

(2) 상황 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은 환경 변화의 특정 임계치 내에서 보존되고 대물림된다. 그러한 보존과 대물림은 환경 변화에 대한 변이의 저항 기제, 즉 발생학의 중요 관심사인 기제에 의해 설득력을 얻는다. 특정 환경에 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일반적으로 변형되지 않은 채 보존된다. 그러나 이 점은 그 형질이 반드시 그 특정 환경 속에서만 활성화됨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 개념 자체가 형질 및 기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고, 여기서 상호작용은 상호협동과 제한을 동시에 함축한다. 역겨운 감정은 누가 토한 내용물 따위의 더러운 음식이 없는 곳에서 일반적으로 비활성화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 대한 지나친 원망은 그에 대한 역겨움을 발생시킬 수도 있고, 더러운 것에 대한 기억 혹은 더러운 것이 포함된 환경의 상상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심지어 형질들에 따라 하나의 환경이 중첩된 내용을 갖는다. 키스 때 침을 잘 흘리는 사람이라도 그가 애인이라면, 애정이 타인의 침에 대한 불쾌감을 제한한다.

 

특정 환경에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의 활성화는 유전자 차원에 의존하지만, 새로운 환경 속에 그 형질을 발생시키는 과정은 여러 형질 및 기능의 상호작용에 의존한다. 그 상호작용의 방식이 개체 혹은 집단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학습 및 모방에 근거한다면, 특정 형질의 강한 유전적 의존성은 그것의 환경 맥락 의존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역겨운 감정이 발생하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이라는 사실과의 양립 가능하다.

 

(3) 감정과 같은 형질은 두뇌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감정은 두뇌 기능과 연관되어 있다. 두뇌 기능에 근거한 마음의 능력 중에서 감정과 달리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합리성을 대표해온 개념적 영역으로서 믿음과 지식 그리고 의도를 생성하는 사고 능력이다. 사고는 단순히 환경 구조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위해 환경 구조를 단순화시켜 파악하고 그 구조에 대해 가치를 매긴다. 어려운 문제는 사고에 대응하는 단순 형질이라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언어의 발견과 발달이 집단의 의사소통 역사를 전제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사고 자체가 여러 기능의 상호작용에 의한 합성이라면, 그리고 합성이 환원 불가능성의 속성을 갖는다면, 사고는 그 어떤 단일 두뇌 기능에 국한하여 설명되지 않는다. 사고의 합성에 개입하는 각각의 두뇌 기능은 강한 유전적 의존성을 갖지만, 두뇌 기능의 상호작용까지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것으로 여겨질 이유는 없다. 이 점은 사고가 특정 환경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환경에 걸쳐 작용한다는 평범한 사실 속에서 반영된다.

 

논의 (2)는 두뇌 기능들의 상호작용 방식의 다양성을 함축한다. 여기서 환경의 복잡성을 무시할 수 없다. 환경의 복잡성은 그것이 상황선택적인 형질들에 의해 모두 포착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변이에 의한 형질 다양성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환경의 구조는 개체의 모든 유전적 형질 속에 포착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고와 합리성을 함께 고려할 때 합리적 판단이라는 것은 더 이상 다윈적 이득에 의해서만 평가되지 않는다. 환경 속에서 문제를 푸는 데 개인 혹은 집단의 목적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만족 수준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사고는 유전적 의존성을 갖는 두뇌 기능에 의해 제한된다. 시각 및 청각과 같은 감각 정보, 환경 적응에 유리함 및 불리함과 관계된 감정 형질이 제공하는 환경 정보는 사고의 형성에 원초적이다. 이 점은 사고의 원초적 기능이 환경 구조의 파악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집단적 차원에서 인간 사고는 장기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형질을 보호하도록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동물 종으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윈의 개념 틀에서 본다면,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은 계산을 수반하지 않는 본능’(instinct)에 대응한다.15) 그러한 형질이 특정 환경 속에서 우선적으로 활성화된다는 영역 특수성(domain specificity)은 강한 유전적 의존성을 갖는 본능의 표현(expression)’과 양립 가능하다. 불필요한 상황 속에서 본능의 표현은 과거 환경에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들이 아직 유전적으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윈은 본능에서 지능이 출현했다고 믿었다. 지능 출현 설명에서 그는 다양한 환경 맥락 속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본능들이 중첩된 합성 습관을 중요시 여겼다. 이 점은 다윈이 형질 및 기능의 상호작용을 배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6) 따라서 위 논의 방식 (1)-(3)은 다윈의 원래 개념 틀과 상충하지 않는다.17) 본능을 인간과 동물에 공통된 것으로 그리고 지능을 본능에서 나온 것으로 본 다윈에게 추론 능력을 인간에게만 고유한 합리성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그리고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에 매달린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위 논의 방식에 따르면 인지 작용의 모든 구성원이 결국 인간 합리성을 구성하는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인 것 따위가 합리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화의 역사 속에서 얻어진 인지 작용의 구성원들의 다양성은 합리성의 다양한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측면 중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만 언급한 셈이다. 상황 선택적으로 강화된 역겨운 감정과 같은 것이 개체의 환경 적응 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려면, 감정의 인지적 역할과 연관된 특정 환경 구조가 고려되어야 한다. 상황 선택적으로 강화되지 않은 사고의 원초적 기능은 환경 구조의 파악이다. 사고의 측면에서 인간의 합리성은 개체의 환경 적응 차원의 다윈적 이득에 종속되지 않지만, 환경 구조의 파악은 합리성의 평가에서 배제될 수 없다. 환경 구조의 파악과 사고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하나의 사례 분석을 하자. 피타고라스가 무리수를 발견했다는 러셀(B. Russell)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애매한 이 절의 논의와 상관없이 환경 구조를 고려하는 것 자체가 인간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임을 알 수 있다.

 

 

히파수스의 비극

 

유리수는 정수의 비례 혹은 정수의 분수 형태, 실례로 1/3, 5/3, 2/5와 같이 표현되는 수이다. 반면에 십진법으로 수를 표현할 때 주기성을 띠지 않은 채 끝나지 않는 수가 무리수이다. 유리수 1/3의 경우 0.3333...으로 표현한다. 이 수는 1;3이라는 비례를 나타낸다. 나누기에 의해 십진법으로 표현했을 때 이 수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수점 이하 n번째 수를 결정해주는 알고리듬이 있고, 1/33의 주기적인 순환적 반복성을 갖는다. 무리수의 경우 그러한 순환적 반복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무리수를 대표하는 원주율 파이(π)를 소수로 표현할 때, 그러한 순환적 반복성이 나타나지 않으며, 소수점 이하 n번째 수를 결정해 주는 알고리듬도 없다. 무리수를 완전하게 표현할 그 어떠한 방법은 없으며, 우리는 그저 근사치를 가지고 무리수를 표현한다. 원주율은 보통 0.314라는 근사치로 사용된다.

 

원주율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무리수는 2의 제곱근

이다. 원주율과 2의 제곱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2의 제곱근은 12+12=n2 이라는 방정식을 만족하는 수 n에 해당한다. 2의 제곱근처럼 어떤 대수 방정식의 해가 되는 무리수를 대수적 무리수(algebraic irrationals), 그렇지 않은 무리수를 초월수(transcendental irrationals)로 규정한다. 원주율이 그 어떤 대수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18세기 말 람베르트(J.H. Lambert)에 의해 증명되었고, 무리수와 유리수를 구별하는 보편적 방법 그리고 무리수를 다루는 수론의 확장은 19세기 바이어스트라스(K. Weierstrass)에 의해 그 기초가 다져졌다. 실수 영역에서 무리수가 유리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칸토르(G. Cantor)가 집합론을 근거로 밝혀다. 이렇듯 무리수 개념이 수학에 정착한 과정은 현대 수학의 출현 과정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무리수 존재의 발견과 인정을 전제한다. 과연 누가 혹은 어느 학파가 무리수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인정했을까?

 

대수적 무리수와 관련된 가장 널리 알려진 방정식은 피타고라스 정리이다. 직각 삼각형 대변의 제곱이 다른 두 변의 제곱 합과 동일한 경우에 대응하는 정리이다. 공리적 증명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측량 및 천문 관측에 사용된 피타고라스 정리의 발견은 중국, 이집트, 인도를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 제1권 명제 47에 해당하는 피타고라스 정리는 점, 선 혹은 원과 같은 기하학의 일반 개념(common notion)에 근거한 작도법에 의한 증명이다. 이러한 기하학적 증명은 직각 삼각형의 양변의 제곱과 대변의 제곱이 동일함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유클리드 원전의 증명에서 작도된 기하학적 모형은 유클리드 이전부터 피타고라스 정리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모형이다. 아래 그림이 바로 그 모형이다.

 

 

 

피타고라스 정리의 기하학적 증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정리를 만족하는 특정 기하학적 모형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기하학적 모형을 수로 표현했을 때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하는 가장 작은 세 쌍의 자연수는 3, 4, 5이다. 양변이 1인 직각 삼각형도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하는 전형적인 기하학적 모형을 갖는데, 그 정삼각형의 가장 긴 변인 대각선에 해당하는 정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러셀은 피타고라스 혹은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의 존재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18)

 

양립 불가능한 것들, 특히 정사각형의 양변과 대각선의 양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발견한 이는 피타고라스였다. 양변의 길이가 1이면, 대각선은 수로 여겨질 수 없었던 2의 제곱근,

가 된다.”

 

과연 러셀의 주장은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옳고 그름의 맥락에서 우리가 합리적 선택 및 판단을 접근할 때 선택과 판단은 환경 구조에 대한 정보, 즉 환경 단서에 근거해야 한다. 러셀의 주장은 논리적 추론의 관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피타고라스학파가 존재하던 시대의 환경 구조를 고려한다면 의심스럽다. 먼저 인용문을 약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러셀은 수학의 모든 분과가 논리학으로 귀속될 수 있다고 여겼다. 자연수와 자연수에 관한 모든 정리가 논리학의 중요 개념인 동일성, 관계, 명제 등에 의해 얻어지고, 유리수 및 무리수를 포함한 모든 수가 자연수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면, 수학 전체가 논리학으로 귀속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주의(logicism)에서 자연수 2는 두개의 대상에 의해 만족되는 모든 관계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수학에 대한 러셀의 관점에서 진정한 수학적 발견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러셀과 달리, 수란 자연의 추상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셈 능력은 그러한 구조를 파악하는 일종의 지각 기능이라는 입장도 있다.19) 서로 상반된 이 두 입장의 공통점은 자연수를 수의 기본으로 본다는 점이며, 이 점은 ‘2의 제곱근이 수로 보이지 않는다는 러셀의 말속에 잘 드러나 있다.

 

사고 능력과 환경 구조를 함께 고려할 때 역사는 과거 환경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에게 환경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화적 방식까지 포함한다. 서양에서 자연수를 수의 기본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단순해서가 아니고 또한 환경 정보를 얻는 원초적 능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양의 합리성 개념 자체가 어원적으로 비례(ratio)에서 기인하고, 비례는 오로지 자연수 사이의 비례만을 뜻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추적은 여기서 불가능하지만, 피타고라스 혹은 그를 중심으로 한 집단을 무시할 수 없다. 수가 자연의 추상적 구조를 나타낸다는 생각은 피타고라스에게서 기인하며, 그러한 구조는 오로지 자연수에 의해 대수적으로 표현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러셀과 수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진 피타고라스이지만, 자연수가 수학의 기본이라는 러셀의 생각은 피타고라스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피타고라스의 관점에 따르면 정사각형을 대각선으로 자른 직각 삼각형의 경우, 양변의 길이와 정사각형의 대각선, 곧 그 직각 삼각형의 대변 모두가 자연수로 표현되어야 한다. 양변이 1인 이등변 직각 삼각형은 그렇지 않다. 그것의 대변은 2의 제곱근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에서 양립 불가능한 것들이란 하나는 자연수 영역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수가 아닌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뜻한다.

 

이등변 직각 삼각형의 대변의 길이가 자연수로 표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피타고라스가 아니다. 피타고라스의 초기 제자인 히파수스(Hippasus)이다. 그는 그 사실을 항해 중에 발견했고, 그 사실에 겁을 먹은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이 그를 배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 비극이 비록 전설일지라도, 그것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서 중요한 환경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자연수의 비례로 표현 불가능한 거리란 없다는 생각이 당시 사람들을 지배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히파수스는 피타고라스의 제자였지만 우주의 근원에 대해서는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랐다고 한다.20)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본 헤라클레이토스 입장은 전통적인 피타고라스학파에게는 용납될 수 없다. 피타고라스의 제자로서 히파수스가 추상적인 기하학적 패턴이 아니라 원소로서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여겼다면, 히파수스는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띤 피타고라스 집단에서 이단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에 얽힌 비극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히파수스에 관한 비극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비극은 자연수의 비례로 표현 불가능한 거리는 없다는 관점이 그 당시 시대를 지배했다는 환경 단서를 제공한다. 설령 피타고라스가 히파수스의 발견을 알았더라도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히파수스 자신이 정말 자연수가 아닌 다른 종류의 수를 발견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언급된 환경 단서를 인정한다면, 그가 발견한 것은 자연수의 비례로 표현 불가능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거리에 대응하는 자연수 혹은 자연수의 비례로서 유리수가 아닌 또 다른 종류의 수가 존재한다고 과연 히파수스가 가정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시대 배경으로서 환경 단서는 역사 속에 단절되었다. 저술 한편 남아있지 않는 히파수스의 이름이 전해지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렇게 결론짓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자연수의 비례에 의해 표현 불가능한 거리를 발견한 히파수스도 자연수 이외에 다른 수를 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가정했다면, 무리수를 사용한 흔적이 그리스 전체 역사의 한 구절이라도 차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흔적은 전혀 없다. 음수와 0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그리스 수학 전통 속에서 히파수스가 무리수를 가정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21)

 

러셀의 수리철학에서 무리수의 발견보다는 정의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어쨌거나 그 발견을 피타고라스에게 돌리는 그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 히파수스의 비극이 제공하는 환경 단서는 그러한 러셀의 주장이 오류일 가능성마저 보여 준다. 그의 주장이 오류라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러셀의 주장에는 아무런 논리적 결함이 없다. 결함이 있다면, 그가 시대적 배경에 대한 환경 단서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이 유도하는 선택부터 사고 능력이 개입하는 판단의 원초적 기능은 환경 구조의 파악이다. 어떤 경우에나 환경 구조의 정보, 곧 환경 단서의 파악은 합리성의 맥락 속에서 중요하다. 역사는 그러한 환경 단서를 제공해 주는 과거의 기록들이다. 올바른 판단에서 논리적 추론이 가장 중요한 요인 혹은 유일한 척도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철학자가 이러한 착각 속에 빠진다면, 그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역사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환경 구조의 파악과 사고

 

마음의 능력을 적응 기관에 유추할 때 마음의 능력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마음의 능력은 감정처럼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에서 그렇지 않은 것에 걸쳐 기반을 두고 있다. 사고는 그러한 능력들의 다양한 합성 방식으로 여겨진다.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에 기반을 둔 능력은 외부 환경에서 얻은 정보에 합당한 선택을 유도한다. 그렇지 않은 능력들은 정보를 적합하게 다듬어 기억하고 적응 맥락 속에서 문제 해결 과정에 개입한다. 이점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가치 판단 혹은 추론은 그러한 문제 해결 과정 속에서 기억에 담긴 정보로서 환경 단서들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 구조에 제한을 받지 않는 형식 추론은 없다. 내용과 무관한 추론의 형식은 구체적이고 일시적이며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실제 논증에서 이상화되어 비시제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이론화된 것일 뿐이다.22) 컴퓨터 공학이 보여주듯, 그런 이론화 작업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중요성이 형식적인 것과 내용적인 것의 이분법으로 이어져, 형식적인 것만이 합리성의 척도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실을 무리수의 발견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살펴보았다.

 

사고의 합성에 참가하는 다양한 능력은 환경 구조의 파악과 설계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생존에 필요한 환경 정보 흡수 능력

이 능력은 감정과 같이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과 관련된다. 보고 듣고 맛보는 지각 경험 속에서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은 그 경험과 연관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산출한다. 두려움과 같은 그러한 정보는 단순한 컴퓨터의 입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행위 촉발 정보(actionable information)로서 이해되어야 한다.23) 상황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과 관련된 능력은 특정 환경 구조 속에서 즉각적인 행위를 유발하며, 그 행위는 단순한 충동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빠른 선택을 가능케 해주는 인지적 지름길이다.

 

기억 저장 및 패턴 인식과 변형을 위한 다듬질 능력

지각 경험은 기억이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환경 정보 흡수 능력은 특정 환경 구조의 반복적인 인식을 요구하며, 그러한 구조는 개체의 환경 적응에 필요하게끔 다듬질되어 특정 패턴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다듬질 능력은 패턴의 기하학적 단순화, 변형 능력 및 대상의 사용과 접함 속에서 특정 감각을 대응시키는 능력을 전제한다. 다듬질 능력은 환경 구조와 적응 방식을 알려주는 정보 디자인(information design)의 의사소통 속에서 잘 드러난다. 유사한 생활 조건 아래 문맹자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남녀의 상징 패턴을 통해 남녀 화장실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특정 대상에 특정 감각을 대응시키는 것은 그 대상에 익숙한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서 실제 의사소통에서 무시될 수 없다.

 

기호 처리를 위한 개념적 능력

언어와 같은 기호 체계는 기하학적 패턴 등과 달리 직접 대상과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형성된다고 여겨지는 개념적 능력은 환경 구조의 정보를 더욱더 단순하게 저장시키며 의사소통에서 공적인 대상으로 만든다. 개념적 능력의 최고 미덕은 인식된 혹은 기억 속에 저장된 환경 구조 정보 사이의 상관관계 파악, 변경 및 새로운 환경 구조의 설계에서 드러난다. 추론 능력은 그러한 파악, 변경 및 설계에서 동원되는 개념의 함축 관계 등과 관련된다.

 

사고의 합성에 참가하는 세 범주의 능력을 자세히 논의하지는 않더라도,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의 이분법을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사고는 개념적 능력과 연관해 다루어졌다. 이러한 전통에서는 사고를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 보지 않는다. 생존에 필요한 환경 정보의 흡수 능력은 특정 형식 알고리듬을 갖는 개념적 능력에 대한 입력이거나 방해물로 여겨졌다. 다듬질 능력은 개념적 능력의 활성화로서 사고에 도움을 주는 주관적인 것으로 취급되며 궁극적으로 개념화 가능한 영역정도로 여겨졌다. 실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을 살펴보자. 삼단논법의 대표적 보기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A)는 사람이다(B).

사람(B)은 죽는다(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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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A)는 죽는다(C).

 

주어와 서술어는 각각 개념을 나타내고, 삼단 논법은 개념의 외연적 함축 관계를 나타낸다. 현대 의미론을 빌리면 이러한 함축관계는 류(class) 혹은 집합(set)의 포함 관계에 의해 해석된다.24) 크기 혹은 양적인 포함 관계는 좌우 혹은 안과 밖 같은 질적 관계를 포섭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대한 비판은 그러한 질적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코끼리가 사자 옆에 있다고 하자. 이러한 좌우 관계는 류 혹은 집합의 수학적 포함 관계가 아니다. 개념적 능력 혹은 논리적 능력 속으로 이러한 좌우 관계를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는 현대 논리학 탄생의 주춧돌로 평가된다. 이에 의해 크기의 대소 관계가 중요한 수학은 논리학에 의해 발달했다는 성급한 판단이 수학을 논리학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를 자극했다.

 

마음의 어두운 면에서 논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는 논리적 추론 형식을 합리적 논증 결정의 유일한 척도로 보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개념의 함축 관계에 의한 추론 형식을 다루는 것은 논리학에 속하지만, 좌우 관계 등은 다듬질 능력과 연관된 패턴 인식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한 패턴 인식은 환경 구조를 환경 적응에 적합하도록 다듬는 것이고, 삼단논법의 형식은 논증에서 패턴 인식과 동조한다. 패턴 인식 속에 담긴 좌우 관계 등을 수학적 기호로 표상하는 방식은 수학의 발전에 필요했지만, 그러한 표상 방식의 개발 자체가 논리학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개념의 함축 관계는 삼단논법이라는 형식에 의해 표현 가능하다고 할 때 특정 조건들 아래에서 가능한 것이다. , 그러한 형식의 보편성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고대 삼단논법도 무조건적이 아니라 개념의 범주화 가능성, 시제의 무시 등의 조건 아래 성립하기 때문이다. 대상의 관계를 다루는 것 역시 무조건적일 수 없다. 대상의 관계는 개념의 관계보다 더욱더 대상이 속한 환경 구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좌우 관계는 세 대상이 일렬로 나열된 환경 구조 속에서는 이행성(transitivity) 조건을 만족한다. 이행성 조건을 만족하는 한 사례는 ab의 왼쪽에 있고 동시에 bc의 왼쪽에 있다면 ac의 왼쪽에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성의 조건은 a, b가 특정 시간에 좌우 관계를 이루고 b, c가 다른 시간에 좌우 관계를 이루는 시공간적 환경 구조 속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 수학의 여러 공리 체계를 살펴보면 동일한 추론 체계에 근거하지만 대상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공리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수학적 증명을 포함한 실제 논증에서 개념적 능력과 다듬질 능력이 동조한다는 점과 양립 가능하며, 논리학은 과학적 지식 체계로서 개념적 능력에 속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의가 이와 유사하다면, 그는 추론 형식을 합리적 논증의 유일한 기준으로 보지 않았다. 더욱이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서 사고를 다루는 것은 개념적 영역만이 논리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현대 명제 단위의 2치 논리학도 특정 조건아래에서만 성립한다. 참과 거짓만 있다는 진리치의 쌍극성(bipolarity) 등의 조건은 2치 논리학의 형식적 추론 규칙을 제한한다. 이러한 제한을 만약 논리학의 규칙은 알고리듬으로 존재하고 다른 능력은 그저 입력 제공자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다른 능력의 인지적 역할은 무시된다. 이것은 사고를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 보는 자연스러운 관점과 어울릴 수 없다.

 

2치 논리학의 적용 방식에 대한 제한 조건을 새롭게 해석한다면, 그 조건이란 개념적 능력과 다른 능력들이 합성하는 특정 방식을 이상화한 것이다. 지각 경험에서 참 혹은 거짓 판단 가능한 내용, 즉 명제는 실제 특정 환경 구조를 적응에 유리하도록 개체가 흡수한 것이며, 추론은 그러한 내용적 구조와 연관된다. 비가 오는 것과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중첩된 상황은 시공간을 규정하기에 따라서 가능하더라도, 그렇게 중첩된 상황은 실제 경험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속한 환경 적응에 비효과적이서 인지 작용에서 배제된다. 인지 작용의 측면에서 그렇게 배제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판단과 추론 방식을 제한한다. 그 결과, 동일한 사실에 대한 동시 긍정과 부정을 허락하지 않는 논리학의 배중률 규칙 또한 환경 구조의 파악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라는 것을 다양한 능력이 동조하는 방식들 각각의 적용 범위를 규정하는 메타 활동이라고 규정해 보자. 이러한 규정에 따른 논리는 능력의 합성으로서 사고라는 관점과 잘 어울린다. 환경의 복잡성에 따른 다양한 능력의 합성 방식 때문에 범주적으로 차이가 나는 여러 논리들을 가정하는 것은 그럴듯하다. 개념적 능력이 아니라 다듬질 능력에 우선을 둔다면, 다듬질 능력이 특정 환경 구조 속에서 다른 능력과 합성하는 방식을 이상화할 수 있다. 실례로 환경 구조의 정보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고 변형하는 패턴 논리라는 것도 불가능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논리는 개념적 능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정 환경 구조 속에서 감정이 작용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논리도 사전에 차단될 이유가 없다. 이 점은 사고를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 보는 것, 그리고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의 이분법을 부정하는 경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환경 구조와 결부시켜 인간 합리성을 논할 때 인간의 선택과 판단은 정보에 근거한 것이며, 정보는 환경 구조의 내용을 나타낸다. 사고는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 여겨지며, 진화의 산물로서 마음을 적응 기관에 유비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의 다양성을 함축한다. 환경 정보 흡수 능력과 다듬질 능력은 두뇌를 가진 모든 종에서 발견되며, 개념적 능력도 인간에게만 고유하다는 주장은 다양한 능력의 합성으로서 사고를 접근하는 관점 속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고에서 인간의 개념적 능력은 기호 처리와 관련된 복잡한 영역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특이할 뿐이다.

 

 

결론

 

마음이 진화의 산물인 두뇌 기능에 의존하고 그래서 마음이 적응 기관에 유비될 수 있다면, 인간의 모든 선택과 판단은 환경 정보라는 단서에 의존한다.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 그리고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의 이분법은 깨어지며, 환경 구조 자체가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을 구성한다. 환경과 사고의 유기적 관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사고는 다양한 능력의 합성이다.

 

환경 구조의 파악이 합리성을 따질 때 무시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간 합리성 자체가 환경 구조에 의해 제한되어 있음을 뜻한다. 상황 선택적으로 강화된 형질로서 감정은 신속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 점은 환경 적응에 불필요한 요인들을 무시하도록 두뇌가 진화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형질과 기능의 합성으로서 사고는 특정 환경 구조에 종속되지 않지만, 합성에 참가하는 형질과 기능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그렇기에 사고 또한 간접적으로 형질 및 기능과 연관된 환경 구조의 제한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다. 이 결론은 문화가 유전적 의존성을 갖는 동시에 유전적으로 종속된 것이 아님을 함축한다. 지식을 개체 혹은 집단 차원에서 반복 사용 가능한 사고의 유형이라고 하자. 문화의 중요 부분을 지식 연결 방식의 현실화라고 하자. 마음의 능력이 두뇌 기능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고의 산출 방식은 유전적 의존성을 갖는다. 하지만 능력의 합성 방식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주는 유전 기제는 없고, 그 방식은 환경이라는 맥락에 의존적이다. 사고의 유형으로서 지식 연결 방식이 개입된 문화 또한 유전적 의존성을 갖지만 결코 유전적으로 종속된 것은 아니다.

 

 

미주

1) 이를 반영하는 책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에른스트 마이어(신현철 옮김): 진화론 논쟁, 사이언스북스, 1998.

2) J. Hodge and G. Radick(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Darwin, Cambridge University 2003. 4부로 나눠진 이 책의 내용은 정합적이지 않다. 자세히 분석한 사람은 역사적 다윈을 분석한 1, 2부와 생물철학자들이 참가한 3, 4부 사이의 간극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3) C. Darwin: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1871, p. 639.

4) 성선택에 대한 다윈의 고민은 감정의 유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성선택을 다룬 인간의 유래가 출판된 다음 해인 1872년에 감정에 대한 다윈의 책이 출판되었다. 다윈(최원재 옮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 대하여, 서해문집, 1998.

5)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에 관한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이상하: 시각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에 관하여, 철학연구63, 2003.

6) 이 점은 중요하게 탐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 진보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 두뇌 기능과 마음 사이의 관계는 무시될 수 없다.

7) Aristotle: Prior Analytics, 24a10. 용어 episteme'는 일반적으로 '혹은 지식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그 용어는 복수의 개념으로서 지식의 체계, 곧 과학을 뜻하기도 한다.

8) Aristotle: Rhetoric, Book1 2.

9) S. Toulmin: The Uses of Argument, Cambridge University 1958, p. 2.

10) B. Russell: "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 The Monist, 1918-1919.

11) R. Carnap: Introduction to Symbolic Logic & its Applications, New York: Dover 1958, p. 40.

12) W.V.O. Quine: Mathematical Logic, Harvard University 1981, p. 11.

13) 다음 논문의 악어 대 볼보 실험 그리고 진화심리학 탄생에 기여한 웨이슨 선택 실험(Wason selection test)은 인간의 추론이 환경 구조의 내용에 민감함을 보여준다. 이상하: 지식 기반 사회와 교육, 대동철학 제26, 2004, pp. 189-190.

14) 베이컨(F. Bacon)의 통속적인 해석을 따른다면, 감정을 이러한 인지적 지름길로 보는 것은 그가 말한 종족의 우상에 반하는 것이다. 합리적 판단에 방해가 되는 그의 네 가지 우상 중 종족의 우상은 선천적인 것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진화 생물학에 근거해 인간의 행위 기제를 해석하는 진화 심리학에서 감정은 단순히 합리적 판단의 방해물로 취급되지 않는다. 기존의 관점에서 비합리적으로 여겨진 인간 행위 유형이 진화 생물학의 관점에서 그렇지 않음은 다음 글이 보여주고 있다. D.M.T. Fessler: "Emotions and Cost-benefit Assessment: The Role of Shame and Self-esteem in Risk Taking" in G. Gigerenzer and R. Selten: Bounded Rationality, the Adaptive Toolbox, MIT 2002, pp. 191-214.

15)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성은 계산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본능은 계산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성 개념에서 계산과 무관한 본능은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글에서는 아니다.

16) R.J. Richards: Darwin on Mind, Morals and Emotions in J. Hodge and G. Radick(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Darwin, Cambridge University 2003, pp. 94-111.

17) 다윈은 감정과 같은 형질의 유래가 자연선택 기제에 의해 충분히 설명된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후천적 사용이 대물림된다는 용도 유전(use-inheritance)의 과정 중에서 강화된 습관을 본능으로 간주했다. 용도 유전은 획득 형질 유전과 유사하지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형질은 어디까지나 개체가 아닌 개체군으로서 종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도 유전은 종의 기원이후 본능을 설명하려고 다윈이 라마르크의 용불용성에 어느 정도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역으로 다윈 진화론이 다층적 다원론임을 잘 보여 준다.

18) B. Russell: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 London: G. Allen & Unwin 1919, p.4.

19) 이 점은 괴델의 입장이기도 하다. K. Gödel: "Russell's Mathematical Logic" in P. Schillp(Ed.): The Philosophy of Bertrand Russell, New York 1994, p. 137.

20) Aristotles: Metaphysica, Book I, 3.

21) 측정 과학으로서 그리스 수학의 측면에서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이 무리수의 발견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P. Hugly and C. Sayward: "Did the Greeks Discover the Irrationals?", Philosophy 74, 1999, pp. 169-176.

22) 구체적이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과 이상화되고 시간과 무관하고 필연적인 것의 대비는 실천적(practical)인 것과 이론적(theoretical)인 것의 대비에 대응하는 것이다. A.R. Jonsen & S. Toulmin: The Abuse of Casuistry, A History of Moral Reasoning, University of California 1988, pp. 26-7.

23) 공개하지 않은 글 지식 기반 사회의 철학적 규정의 행위와 지식 편에서 행위 촉발 정보를 다루었다.

24) 류와 집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수학적으로 류는 집합론의 공리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직관적인 의미에서 대상들의 모임(collection)을 뜻한다. 모든 집합들을 원소로 갖는 전체 집합을 가정한다면 집합은 그 자신을 원소로 가질 수 없다는 속성 때문에 역설이 발생한다. 전체 집합은 그것 자체를 원소로 가져야 하는 동시에 언급된 속성 때문에 또한 그것 자체를 원소로 가질 수 없다. 현대 집합론의 공리 체계에서 전체 집합은 배제되지만, 모든 집합들로 구성된 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