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쇠똥구리는 감성 자극의 수단?

착한왕 이상하 2017. 12. 18. 15:59



후기구조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일부 인류학자들은 사회학적 장소(place)와 공간(space)를 엄격히 구분하고, '장소가 아닌 곳'으로서의 추상적 공간 개념을 만들어 마치 엄청난 새로운 것처럼 과장한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장소는 특정 인물 혹은 집단의 기억과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 공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례로 백화점, 공항 등은 특정 인물 및 집단의 기억과 정체성을 초월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장소가 아니라 공간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공항에는 온갖 국적의 온갖 인물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항은 장소가 아닌가? 쇠똥구리 얘기를 하기 전에 사회학적 장소와 공간을 엄격히 이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멍청한 사고방식인지 간단히 언급한다. 물론 그러한 멍청한 사고방식이 온갖 추상적 미사여구로 치장될 때, "아 뭔가 대단한 게 있구나" 착각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멍청한 '죽은 머리'들이 수두룩하다. 그러한 죽은 머리들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삐끼질)를 하는 게 개한민국 출판문화다.


인간관계가 빠진 물리적 공간을 자연적 공간이라 하자. 그러한 물리적 공간 없는 사회적 장소란 불가능하다. 즉, 사회적 장소는 항상 물리적 공간을 기반으로 한다. 물리적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사회적 장소의 특성이 규정된다. 집, 히틀러 등 독재자가 선동을 목적으로 사용한 공공 장소, 정책 무능의 정치꾼들 그리고 인문학을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면서 대중을 현혹하는 각종 쓰레기 작가들의 콘서트 장소 등등 말이다. 특정 물리적 공간을 특정 목적에 따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장소들이 나타난다. 특정 장소는 개인 및 집단의 기억과 정체성을 담고 있다. 어떤 장소는 여러 장소들이 중첩된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사회적 공간이란 그렇게 중첩된 장소 혹은 '장소들의 장소'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공간에서 장소 개념을 박탈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며 큰 의미를 가질 없다. 장소를 초월한 별도의 사회학적 공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건축학 및 지리학과 연계해온 '장소 사회학' 혹은 '공간 사회학'의 오랜 전통에 대한 무지를 보여 줄 뿐이다. 이를 보여 주는 논문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Gieryn, T.F.(2000), "A Space for Place in Sociology", Ann. Rev. Sociol. 26:463-96.

다운로드: http://www.urbanlab.org/articles/Gieryn%20TF%20A%20Space%20for%20Place%20in%20sociology.pdf


토머스 기어린의 위 논문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논문이다. 기어린을 소개한 국내 논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적 장소'하면 그저 푸코, 하버마스, 들뢰즈 등을 언급하면 전부인 줄 아는 자들이 사회학계와 대중문화를 장악하고 있는 개한민국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담은 논문도 없고,,,, 쯧쯧. 아무튼 기어린의 논문은 사회학, 지리학, 건축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는 논문이다.


<쇠똥구리: 장소의 사회학> 혹은 <쇠똥구리: 공간의 사회학> 이런 연구서, 대중서도 필요한 것 같다. 쇠똥구리가 멸종 위기에 처하면서 쇠똥구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높아졌는데, 이러한 상황에 줄타기하는 기사나 칼럼은 그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치고 있다. 마치 개한민국 자연 다큐멘터리, 즉 그저 애매모호한 자연적인 것을 이상적으로 취급하면서 다양한 관점을 누락시켜 버리는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된 기사나 칼럼이 난무한다. 실례로 다음 경향신문의 기사를 들 수 있다.


<그 많던 소똥구리는 어디로 갔을까?>

http://v.media.daum.net/v/20171214221830603


쇠똥구리는 과거에는 흔한 공충이었다. 쇠똥구리가 멸종 위기에 처한 이유는 누구나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소똥의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그 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료의 일부 화학적 물질이 변형된 소똥은 쇠똥구리 먹이로는 적합하지 않다.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쇠똥구리가 흔했던 장소와 흔하지 않은 장소를 구분하고, 전자의 장소에 긍정적 이미지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돗보인다. 그런데 쇠똥구리가 흔했던 장소가 그렇지 않은 장소로 변형되는 인과적 과정을 정확히 다루고 있지 않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위 기사를 보면, 쇠똥구리가 흔했던 장소는 '자연과 함께 하는 인간'의 진정한 정서를 담은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쇠똥구리가 드믄 현재의 장소는 그러한 정서를 잃어버린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나 역시 어릴 때 시골에서 여러 종류의 쇠똥구리를 잡고 그 모습에 신기해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쇠똥구리의 모습을 다시보고 싶다. 쇠똥구리가 흔했던 과거의 장소가 현재에 일부 복원되는 것을 반긴다. 하지만 그 장소가 과연 모두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러한 장소일가?


위 기사를 보면, 어떤 목축업자 노인의 말을 빌려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나온다. 많은 노인들이 그러한 회상에 동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쇠똥구리가 흔했던 과거로 돌아가 살고 싶습니까?


이에 무조건 동의하는 노인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과거 목축 방식을 대관령, 스위스, 호주 등의 방목 방식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과거 목축 방식은 매우 한정된 형태의 방목만 허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가끔 소를 끌고 특정 장소에 모인다. 그런 곳에 쇠똥구리가 흔하다. 당연히 소똥이 많기 때문이다. 소를 먹이려고 매일 꼴을 베고 작두로 썰고, 추운 시기에는 소죽을 쑤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많은 노동력을 요구한다. 쇠똥구리가 흔했던 과거의 장소는 많은 양의 노동을 포함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한 장소가 잃어버린 정서를 현재 대표할 수는 있어도 다수가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장소는 아니다.


위 기사를 보면,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이 마치 쇠똥구리가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처럼 암시되어 있다. 나 또한 새마을 운동에 비판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새마을 운동 때문에 쇠똥구리가 멸종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쇠똥구리가 흔한 장소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노동력이 감소하기를, 그리고 소가 더 빨리 살찌기를 바랬다. 따라서 새마을 운동이 없었어도 대부분이 1970년대 본격적으로 양산된 사료를 택햇을 가능성이 크다.


'쇠똥구리의 장소학'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개인 및 집단에게 현재의 장소는 항상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을 담고 있는 곳이다. 미래의 희망이 실현된 장소는 불확실하다. 반면에 과거에 대한 기억은 상대적으로 확실하다. 상대적으로 확실한 기억은 그것이 좋든 좋지 않았든 현재의 개인 및 집단에게는 '잃어버린 곳'으로서의 향수로 기능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잃어버린 곳이 항상 '다시 돌아가 살고 싶은 곳'을 뜻하지는 않는다. 무엇을 잃어버리게 된 과정에는 과거 시점에서 미래에 대한 개인적 혹은 집단적 희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쇠똥구리가 흔했던 장소에서 그렇지 않은 현재의 장소로 변화한 과정 속에서 잘 드러난다.


* 개인적으로 소똥이 난무하는 장소가 현재 복원되길 바라지 않는다. 곤충원이나 대관령 목장 등에서 쇠똥구리를 쉽게 볼 수 있는 정도의 환경 복원을 바란다. 일반 농가가 방목을 할 여건은 지리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쇠똥구리는 나에게 특별한 곤충이다. 당시 국민학교 4학년 때 시골에게 가서 거의 100마리 이상의 쇠똥구리를 잡은 적이 있다. 소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살펴보면 구멍이 난 곳이 있다. 그곳에 오줌을 누면, 커다란 쇠똥구리들이 기어나왔다. 담기만 하면 채집 끝이다. 100마리 이상의 쇠똥구리를 잡아 서울 변두리 집으로 돌아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팔았다. 팔고 남은 쇠똥구리들은 구멍을 뚫은 상자에 소중히 보관했다. 먹을 것을 주어보았자 쇠똥구리들이 먹을 일은 없다. 쇠똥이 아니었으니까. 쇠똥구리의 생명력은 참 질기다. 거의 한 달 버티다 모두 죽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산에 갔는데, 집체만한 쇠똥구리들이 나타나 나를 공격했다. 이 꿈을 꾼 후, 부러 곤충을 잡는 짓은 그만두었다.




사진출처: http://www.stagbeetles.com/bbs/board.php?bo_table=webzine_specimen&wr_id=4285&pim=1&ipw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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