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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기 개념과 아동 교육1. 아동기의 역사적 변화 방식

착한왕 이상하 2018. 1. 3. 16:17

* 다음 글은 진정으로 자식 교육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구성되었다.


 

아동기 개념과 아동 교육

 

우리의 관심 주제 중 하나는 아동기 개념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방식의 변화 역사와 아동 교육의 일반적 흐름을 알아보는 것이다. 아동기 개념이 시대별 지역별로 변화해온 방식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교육학 전공자뿐만 아니라 자녀를 가진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만약 아동기라는 것이 타고나면서부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라면, 이상적 아동기 개념은 변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경우, 아동기 개념의 변화란 단지 생물학적 지식의 불충분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의 유전적 요인에 대한 심층적 연구는 아동기 개념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요인들에 좌우되어 구성된다는 입장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아동기 개념의 사회문화적 측면에는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이 배어 있다. 그러한 어른들의 관점 변화는 당연히 아동기 개념의 변화를 수반한다.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이 아이들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파악하는 것은 아동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동 심리 및 인지 발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다음을 부정할 교육학자는 현재 없다.

 

아이들 역시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능력과 인지적 발달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행위자로서 아이들은 가족 내 그리고 가족 외의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적으로 축적되고 문화적으로 발달되는 지식을 얻는다. 또한 아이들은 경험을 통해 그들만의 지식을 생성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들을 능동적 학습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태도가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 어른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수동적 존재로 여기고 있다. 개인 간 거래가 활발해진 상황에서도 아동 교육은 전적으로 부모들의 몫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어른들이 여전히 많다. 교육학자들은 아동들을 능동적 학습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외치지만, 정작 자신들의 관점에 부합하는 교육 내용을 개발하는 데에는 게으르거나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 결과, 그들이 제안하는 정책은 내용 없는 형식적 절차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실례로 유치원 정보 보조금 지원 확대, 공공 유치원 확대 등이 마치 아동 교육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식의 정책적 발언을 들 수 있다. 또한 억압 계층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비판 이론(critical theory)의 후계자들은 질문에 근거하는 비판적 정책 분석(critical policy analysis)’을 통해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지만, 정작 기존 사회 질서를 개선시킬 수 있는 내용적 수단에 대해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교과서, 놀이 도구, 지적 발달과 관련된 사고 훈련 등 교육 정책의 내용적 수단들은 경제 정책의 돈이나 환율 가치 등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갖는다. 그러한 성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교육 정책에서 형식과 내용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이는 현재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면 될수록, 실질적 사회 개선은 점점 우리와 멀어지게 된다.

 

교육 정책에서 형식과 내용의 간극은 특히 아동 교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임으로써 내용을 강조했던 과거 교육학 전통을 지금 현실에 부합하도록 되살릴 필요가 있음을 역설할 것이다. 먼저 아동기 개념의 역사적 변화 방식을 간략히 살펴보자.

 

 

1. 아동기의 역사적 표현 방식 변화

 

아동기에 대한 유니세프(UNICEF)의 정의에 따르면, 아동기는 특별한 성장 기간을 뜻한다. 그 성장 기간의 아이들은 집, 학교, 놀이터 등에서 생활하며 그들이 속한 가족과 공동체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한 보호를 통해 아이들은 가족 구성원들을 신뢰하며 공동체 속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아동기에 대한 이러한 유니세프의 정의 방식에서 결혼은 아동기와 성인기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결혼 여부가 아동과 성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아동기에 대한 유니세프의 정의 자체가 아동기 개념의 변화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연령대의 사람이 아동기에 대한 유니세프의 정의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실례로 다음과 같은 상황은 현재에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나와는 다른 아동기 개념을 갖고 있다. 할머니는 나를 항상 어린아이처럼 대한다. 한 번은 나보고 가급적 짧은 치마는 입고 다니지 말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한국 남자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자를 진지한 결혼상대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결혼 전까지는 누구나 아이라는 것이다.

 

위 가상의 사례에서 할머니에게 아동기와 성인기를 나누는 우선적 기준은 결혼이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결혼과 같은 제의를 기준으로 아이들과 어른을 구분하고 특히 여자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은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다. 아동기에 대해 가상의 와 할머니가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는 아동기 기간이 단순히 생물학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물론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 있기 때문에, 아동기는 생물학적으로 미성숙 단계로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미성숙 단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문화적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환경 속의 성장과 교류를 통해 발달하며, 그 환경은 항상 문화적이다. 위 사례의 할머니는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억제되고 특히 여성 아이들을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는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았다. 만약 그 할머니가 다른 환경 속에서 성장했더라면 아동기에 대한 유니세프의 정의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인간을 생물학적 종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사회와 인류 역사를 다룰 때 명백한 한계를 갖기 때문에,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항상 문화적 과정의 맥락에 의존적이다.


아동기가 표현되는 방식은 지역별 시대별로 차이를 보이며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 이 사실은 영국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와 당시의 삽화 하나를 비교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은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를 경험했다. 과학에서는 분과들이 다양해졌고 더욱 전문화되었다. 여기에는 기술 체계의 급진적 발전의 기여가 있었으며, 생산 방식 및 운송 수단의 기계화와 함께 광범위한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부유층과 빈곤층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노동자 계층은 빈곤층에 속했다. 중산층 및 상위 소득 계층의 재화는 그들의 만족 수준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다. 반면에 노동자 계층의 삶은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노동자 계층 가정은 재력의 한계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고, 아이들의 교육에 큰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이들의 양육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길거리를 배회하며 구걸하는 고아들이 많았다. 고아들은 심지어 범죄에 이용되기도 했다. 당시 고아들의 이러한 비참한 삶은 1898년에 출판된 <올리버 트위스트>의 삽화 그리고 1922년 로이드(Frank Lloyd) 감독의 영화 장면에 반영되고 있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19세기 아동 범죄를 다룬 중요한 텍스트이다.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잡힌 디킨스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쁜 짓을 해야만 했다. 범죄 집단의 두목 페인은 그가 다른 아이들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올리버를 타락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올리버에게는 선하며 순수한 본성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 함축된 디킨스의 관점에 따르면, 아이들은 본성상 순수하며 선한 존재들이다. 디킨스의 이러한 관점은 루소(Jean-Jacque Rousseau)의 <에밀(Emile)>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루소에게 좋은 사회란 아이들의 선한 본성을 보존시켜 줄 수 있는 사회이다. 그는 아이들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인간의 왜곡되지 않는 본성이며 조화로운 사회적 유대 가능성의 핵심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소와 디킨스의 아동 관점은 19세기 아동 권리의 사회적 확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적어도 그들은 아이들을 노동 대상으로 허용하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이들을 능동적인 사회적 행위자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아이들은 어른들의 뜻에 따라 길들여질 수 있는 사회화의 대상이며, ‘좋은 어른이란 아이들의 타고난 순수하며 선한 본성을 보존시켜 주는 존재이다. 아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다음 빅토리아 시대 삽화에도 반영되어 있다.

 

  


위 삽화는 월터 크레인(Walter Crane)의 것이다. 크레인의 삽화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이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삶을 보여 준다. 잘 정돈된 기차 객실, 고가의 인형, 정장을 한 부모들과 자녀들, 엄격한 모습으로 신문을 읽는 아버지, 딸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어머니 등은 중산층 가정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물질적 후원, 지적 자극, 부모의 태도 등을 암시한다. 또한 남녀의 엄격한 젠더(gender) 구분이 나타나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순응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창문 너머로는 산업 혁명으로 급격히 발달한 당시 영국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빅토리아 시대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명령에 순응적인 복종을 강요받았다. 순응적 복종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태도는 종종 아이들에 대한 체벌의 형태를 띠곤 했다.


아동 체벌은 아이들을 악한 존재로 취급하는 관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실학자 아정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동규편과 단원 김홍도의 서당그림을 비교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 아정 이덕무의 사소절 동규편과 단원풍속도첨 서당 그림 비교 분석은 생략!

 

아동기의 표현 방식은 다양하며 지역별로 시대별로 차이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질문들을 던져 볼 수 있다. 아이들과 어른들을 구분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것이지만, 과연 고대와 중세에도 아동기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아이들을 특별한 보호 대상으로 여기고 공동체의 중요한 담론 주제로 여기는 관점은 언제 형성되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다루지 않더라도 분명한 것이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아동기 개념이나 아정 이덕무의 아동기 개념을 그대로 수용할 사람은 지금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체적 체벌이 아이들의 지적정서적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데 모두 동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한 출신 성분과 무관하게 모든 아이들을 동등하게 대하고, 아이들을 능동적 학습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은 교육학의 대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러한 입장이 사회 전체에 걸쳐 진지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아동 교육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다.


  * 아시아, 유럽 과거 시대의 아동기 이해 방식을 보여 주는 여러 그림, 사진 및 간략한 분석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