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K 비판적 사고/GCTC 청소년 교육

아동기 개념과 아동 교육2.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동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

착한왕 이상하 2018. 1. 18. 18:07



2.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동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

아동기 개념은 변화 가능하다. 생물학적 요인들만 가지고 그 변화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다. 특정 생물종의 생물학적 요인들이 변하지 않는 한에서 그 생물종은 형태나 습성의 측면에서 일관된 특징들을 보이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의 인류와 현재 인류 사이에는 생물학적 차이가 거의 없다. 반면에 원시 시대에는 아동기 개념이 있었다는 증거도 불확실하다. 더욱이 현재 주류 아동기 개념은 불과 100년 전 아동기 개념과도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아동기 개념이 변화 가능한 사회문화적 맥락속에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아동기 개념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고찰은 사회문화적 맥락의 변화와 차이를 다루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문화적 맥락은 어느 지역에서나 동질적이지 않다. 다만 유사성의 측면에서 좀 더 동질적인 맥락과 그렇지 않은 맥락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 집단의 일반적 특성들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집단일수록 좀 더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우리나라와 유럽 국가들을 비교하는 경우, 우리나라의 현재 사회문화적 맥락이 좀 더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유럽 국가들이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동질적 집단이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나 동력도 약하다고 단정짓기는 힘들다. 또한 다민족 국가로 분류되지 않는 집단에 고유한 사회문화적 특성들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문화적 맥락의 동질성 정도를 따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집단 간 비교에 필요한 도구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 정도는 문제의 성격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다. 집단의 민족 구성 분포는 그러한 동질성 정도를 따지는 양적 기준 중 하나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민족의 수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주류 구성원들과 비주류 구성원들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구성적 측면의 차이로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뉴스나 신문기사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그러한 뉴스나 신문기사 대부분은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백인과 흑인 문화의 갈등은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인종차별 문제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는 영화에서조차 백인과 흑인 문화의 갈등이 내용 구성의 중요한 측면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실례로 2017년 개봉된 조던 펠레(Jordan Peele) 각본 감독 캐나다 영화 겟 아웃(Get Out)’을 들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백인 여자가 흑인 남자를 부모에게 소개하려고 하는 데, 흑인 남자가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모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 과속으로 교통경찰의 제지를 받는다. 교통경찰은 흑인 남자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면서 불필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던진다.

 


위 영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반전 요소들이 등장한다. 그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위 장면에만 국한해 생각하는 경우, 세 사람의 사회문화적 이해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차이는 그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흑인 문화 배경의 아이들에 대한 교통경찰의 태도는 너무나 뻔해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주류 문화와는 다른 배경의 아동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에는 특정 문화에 대한 그들의 선입관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의 아동기를 특별한 것으로 규정한다. 특히 다른 민족이나 소외층 아이들의 아동기를 비정상적인 것 혹은 열등한 것 평가하고 아이들을 대하곤 한다. 다민족 국가의 경우, 아동기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화적 맥락에는 여전히 차별의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런데 그 차별의 관점은 동시에 배려의 관점과 경쟁 관계를 맺고 있다. 배려의 관점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흑인 아이들을 백인 아이들과 동등하게 대하고 흑인 아이들의 교육질을 높여야 한다는 관점이다. 배려의 관점은 아동기 개념에서 흑인과 백인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 관점에서 흑인 문화 아동기와 백인 문화 아동기의 차이는 생물학적 요인이나 인종 고유의 요인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차별의 관점은 아동기 개념에서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고 흑인 아동기를 비정상적인 것 혹은 열등한 것으로 규정한다.


문화적 갈등을 통해 흑인 아동에 대해서는 현재 차별의 관점과 배려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적어도 교육학에서는 배려의 관점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 국가들의 경우 아예 무관심의 범주에 속하는 아동 계층이 있다. 바로 GR&T(Gypsy, Roma and Traveller) 계층이다. ‘집시혹은 롬인로 불리는 유량 민족은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는데, 정확한 그 수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대충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집시는 유량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종종 낭만화되곤 했다. 실례로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의 곡 집시(Gypsy)’에는 기타 하나를 들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자유로운 집시가 등장한다. 지금도 카페나 음식점들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하고 구걸하는 집시들은 유럽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주류 문화에 동화하지 못한 유량민들은 노래와 영화 등에서 낭만화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배려의 관점은 너무나 약하다. 2차 대전 중 나치의 탄압을 받은 유대인들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집시 혹은 롬인들에 대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하다. 강제 노역과 가스실에서 죽은 유량민이 최소 80만 명이 넘는데도 말이다.


GR&T 계층 아이들은 아예 사회적 관심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흑인 아동에 대해서는 차별과 배려의 관점이 공존한다면, GR&T 아동에 대해서는 차별의 관점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별의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현재 교육학의 흐름이지만, GR&T 아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다. 최근 몇몇 교육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GR&T 아동에 대한 차별은 약화되지 않았다. GR&T 아동은 사회적 관심 범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아동 교육에서 유량 민족 가정이 겪는 고충은 다른 계층 가정보다 훨씬 심하다. 백인 흑인 구분 없이 어른들은 GR&T 아동기를 비정상적인 것 혹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아이들이 유량민 아이들과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 심지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GR&T 계층 아이들을 차별하는 선생들도 많다. 이러한 실정은 여전히 약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 연구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는 유럽의 다민족 국가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말들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내 자식을 과부 자식에게 줄 수는 없어.” “고아 출신은 채용하기 힘들어.” 이런 말들이 공공연하게 돌던 시대의 아동 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아동 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아동 교육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역할을 무조건 결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는 벗어나 있다. 적어도 앞서 언급한 말들이 각계각층에 공공연하게 돌던 시대는 과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아동에 대한 부모들의 역할보다는 아동에 대한 어른들의 역할이 강조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물론 수준 낮은 출판문화와 교육 정책으로 인해, “깨인 부모 밑에서 깨인 아이가 나온다는 선동문구가 여전히 부모들의 의식을 파고들고 있다. 이 문제를 일단 논외로 할 때, 우리나라도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가정이 늘어나면서 다민족 국가가 겪은 문제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문화 가정은 당연히 여러 문화로 구성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문화 가정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가정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다문화 가정은 주로 한국 남성과 이민 여성의 결혼을 통해 구성된다. 다문화 가정의 이민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버지나 친척들의 태도에 따라 상대화된다. 그러한 태도에 배려의 관점이 깔려 있다면, 그들은 적어도 가족 내에서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 외 공동체 관계 속에서 그들 모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훨씬 더 클 것이다. 다음 가상의 사례를 살펴보자.

 

어느 날, 엄마는 아이가 이상한 몸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물어 보니, 아이는 실랏이라는 무술 동작이라고 말했다. 엄마는 화색을 하며, “, 원빈이 영화 아저씨를 찍으려고 배웠다는 그 무술이구나.” 원빈의 극렬 팬인 엄마는 젓가락을 양 손에 들고 아들의 동작을 따라하며 신나했다. 그러다가 아이에게 물어 보았다. “누구에게 그걸 배웠니?” 최근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 온 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가 있었다. 그 노동자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는 그 인도네시아 아이에게 배웠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인도네시아 아이와 놀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는 엄마도 원빈 좋아하잖아?”라고 반문했다.

 

위 가상의 사례에는 인도네시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아동기를 비정상적 혹은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아마도 아이의 친구가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가정의 아이이었다면, 엄마의 반응은 정반대였을 것이다. 다문화 가정의 경우, 부모의 국적에 따라 아이들이 또래 문화에서 소외되는 정도는 큰 차이를 보인다.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이들이 또래 문화 공동체에 흡수되는 정도는 매우 약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정도를 연구한 결과물이 없기 때문에 주변 경험 및 방송매체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할 때, 현재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이들의 아동기를 우리나라 어른들 상당수가 비정상적인 것 혹은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 대한 차별의 관점이 우리나라 사회문화적 맥락에 깔려 있다. 과연 그들에 대한 배려의 관점은 그 차별의 관점과 경쟁 관계를 맺고 있는가? 방송과 신문기사들을 분석해 보면,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동에 대한 차별의 관점만이 현재 사회문화적 맥락에 깔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이들은 이 땅의 GR&T 계층의 아이들인 것이다.


여기서 일부 어른들은 반문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제대로 교육시키기 힘든 판인데 다른 문화 아이들의 교육마저 신경쓸 겨를이 있는가? 그 아이들로부터 우리 아이들이 나쁜 영향을 받는다면, 책임질래? 이러한 반문들에는 아동 교육에서 우리 것우리 것이 아닌 것을 이분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래서 이러한 반문들을 무지한 사람의 반문들로 규정지어 답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러한 반문들이 나오게 되는 현실조차 제대로 진단되지 않은 여기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반문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발상이다. 이러한 반문들을 던지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논의가 진전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아동기에 대한 어른들의 관점은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점은 GR&T, 다문화 가정, 외국인 노동자 가정 아이들의 경험담을 듣는 것만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분명한 또 다른 것은 어른들 다수가 아동기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 역시 논의가 진행될수록 분명해질 것이다.

 

* 간략한 분석과 함께 보는 GR&T 계층 가정 아이들은 생략

* 참고문헌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