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행복: 로크 1. 시작부

 

로크

 

홉스의 신학적 입장을 배제한 채 자기 보존과 공포심에만 근거하여 그의 정치 철학을 해석하는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로크의 철학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로크하면 타고나면서 비어 있는 마음 상태, 경험론 등을 떠올리게 된다. 버클리(G. Berkeley), 흄(D. Hume)의 비판을 통해 정설로 회자되는 로크 철학의 그러한 해석 역시 무조건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홉스와 로크의 사고방식에서 본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중세 부정 신학, 유명론 및 르네상스 종교적 인본주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근대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정착에 일조했다.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에 따르면, 상황에 종속적이지 않은 보편적 원리들에 근거한 예증적 지식 체계만이 학문적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적 인간 중심 사상의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이러한 시대정신을 ‘합리적 능력의 무차별적 확대’로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합리적 판단 능력 혹은 이성의 한계 설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확실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홉스와 로크의 사고방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홉스와 로크의 사고방식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정치론에서는 그 둘의 차이점이 많이 강조되었다. 자연 상태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은 판이하게 다르다. 가족 공동체 단위로 구성된 로크의 자연 상태는 조화로운 정치적 공동체와 대립된 것이 아니다. 홉스에게 소유물은 소유욕의 대상이기 때문에, 소유는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욕구들의 집단적 조율 속에서 그 범위가 정해지는 것인 반면, 로크에게 소유는 천부인권에 근거한 개인의 권리이다. 또한 로크에게 사후 구원의 매개물은 육체적인 것도 불멸의 영혼과 같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억 중심의 의식’이다. 그런데 행복론을 논할 때, 이러한 차이점들을 과장할 수 없다. 그 차이점들은 홉스의 행복론에 함축된 문제점들을 놓고 로크가 고민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로크의 입장은 홉스 행복론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들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 행복이 욕구들의 지속적 충족이라고 하자. 어느 누가 법제 틀 내에서 욕구들을 지속적으로 충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면, 그러한 충족 과정은 그에게 좌절감의 연속일 수 있지 않은가?

 

• 다수로부터 통치 권력을 양도받은 집단은 다수의 제약 없이 욕구들을 선택하고 충족할 수 있다. 통치 집단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제한할 구체적 방법이 없다면, 다수의 행복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은가?

 

위 두 문제점을 둘러싼 로크의 고민은 각각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과 <통치 이론(Two Treatise of Government)>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고민이 로크의 저술 속에 반영되어 있는 방식을 분석할 때, 그의 행복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 가능하다.

 

• 욕구 충족 과정에서 행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쾌락이 아니라 지속적 즐거움을 주는 쾌락이다.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는 쾌락인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능력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며, 지식은 그러한 인식에 필수적이다. 행복을 얻는 데 필요한 지식은 일시적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고통의 원인이 되는 쾌락과 그렇지 않은 쾌락을 구분하는 법, 과학적 지식,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 및 한계에 대한 지식, 실용적 지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식 등을 망라한다. 행복에 대한 욕구는 신에 의해 부과된 자연권이기 때문에, 행복 추구는 정치적 자유의 토대이다. 따라서 정부는 타인의 행복 추구를 방해하지 않도록 해 주는 범위 내에서만 개인의 선택과 행위에 개입할 수 있다.

 

왜 로크의 행복론에는 행복의 전통적 지성적 관점의 잔영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리고 로크의 행복론이 발생시키는 논쟁거리는 무엇인지를 알려면, 앞서 언급한 두 문제점에 대한 로크의 고민을 조금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크 행복론의 핵심은 지식의 형성, 구분 및 사용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먼저 ‘마음’, ‘관념(idea)’, ‘지식’에 관한 그의 입장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