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추론에 관한 밀의 입장 2. 표면적, 실질적 추론 그리고 귀납

착한왕 이상하 2019. 1. 23. 22:35

표면적 추론은 표면적 명제와 마찬가지로 논리적 연결사의 정의 방식에만 기대어 가능한 추론이다. 반면에 실질적 추론은 논리적 연결사의 정의 방식만으로는 불가능한 추론이다. 밀은 실질적 추론에는 경험에서 직접 근거하는 경우 또는 관찰 가능한 사실들로부터의 일반화의 경우가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모순률과 배중률을 실질적 명제로 규정하는 데 밀은 열거적 귀납을 사용했다. 따라서 밀에게 무모순률과 배중률을 규정하는 방식은 실질적 추론이다. 표면적 추론과 실질적 추론의 구분은 이렇게 단순해 보여도 여러 논쟁거리를 발생시킨다. 먼저 다음 논증을 분석해 보자.

 

첫 번째 사탕은 달고, 두 번째 사탕도 달다.

따라서 첫 번째 사탕은 달다.

 

위 논증에는 다음과 같은 타당한 논증 형식, 즉 전제들을 참으로 가정할 때 결론도 항상 참인 형식이 함축되어 있다.

 

PQ

P

 

추론은 일반적으로 전제들과 결론의 관계에 근거하기 때문에, 위 타당한 논증 형식에서 추론 형식을 이끌어 내려면 전제부와 결론을 구분하는 ‘-’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장 단순한 방식은 그것을 논리적 함의 연결사 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때 ‘(PQ)P’라는 진술 형식을 얻게 되는데, 그 진술 형식은 2치 진리표에서 항상 참인 동어반복 형식이다. PQ의 내용과 무관하게 논리적 연결사의 정의 방식만으로 ‘(PQ)P’는 항상 참인 표면적 명제를 나타내며, 그 명제에는 표면적 추론이 함축되어 있다. 현대 논리학자들은 경험적 내용을 결여한 동시에 타당한 추론 형식을 나타내는 동어반복 진술 형식논리적 진술로 규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밀을 논리적 진술을 예견한 인물로 여길 수 있을까? 밀을 논리적 진술의 발명에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길 수는 있어도 예견자로 여길 수는 없다. 왜 그럴까?

 

논리적 연결사들의 대한 밀의 정의 방식을 보면, 특이한 것이 있다. 부정, 연접, 이접 연결사는 현대 2치 진술 논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참 거짓 진리치의 변환 및 조합 방식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함의 연결사 에 대한 밀의 정의는 그러한 변환 및 조합 방식이 아니다. 밀에 따르면, ‘AB’‘BA의 적법한 추론의 결과이다를 뜻한다. ‘적법한 추론은 밀에게 표면적 추론이거나 실질적 추론이다. ‘(PQ)P’에 표면적 추론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때, 밀은 둘 다 참이라면 그 중 하나는 참이다라는 판단이 경험적 내용과 무관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AB’의 추론이 표면적 추론이 아닌 경우, 즉 실질적 추론인 경우, 함의 연결사를 단순히 언어적 합의와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 결과, 함의 연결사를 포함한 진술들로 구성된 타당한 논증들에서 타당한 논증 형식들을 이끌어 내고 그러한 형식들을 동어반복의 추론 형식에 대응시키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밀은 적어도 표면적 추론과 관련해 함의 연결사에 대한 언어적 협약 방식, 실례로 전건은 거짓이고 후건이 참인 아닌 경우는 모두 참이다와 같은 것을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한 협약 방식은 밀의 <논리 체계>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반영만 되어 있을 뿐이다. 이제 다음 물음을 던져 보자.

 

밀에게 추론의 본질은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이행이다. 왜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위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음 두 논증을 분석해 보자.

 

비가 온다.        

땅이 축축해진다.

 

지금까지 관찰한 사람들은 누구나 죽었다.

 나는 사람이다.                                   

나도 죽을 것이다

 

첫 번째 논증은 비가 오면, 땅이 축축해진다에 함축된 실질적 추론을 나타낸다. 비가 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 땅이 축축해지는 것을 알 것이다. 첫 번째 논증은 경험에 직접 호소한 추론을 나타낸다. 두 번째 논증은 관찰 사실들에서 특정 결론을 추측하는 방식의 실질적 추론을 나타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증이 보여주는 추론들은 모두 예외를 허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결론이다. 첫 번째가 예외를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이유는 추론 자체의 성질보다는 사건들의 인과 관계에 관한 지식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증의 또 다른 공통점은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이행하는 추리방식이다. 주어에 붙어 전칭 기능을하는 모든이라는 양화사가 두 논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두 번째 논증은 관찰 사실들을 일반화하는 열거적 귀납의 기반이 된다. 사람들에게 순번을 매기고 지금까지 관찰한 사람들이 n명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논쟁을 통해 ‘n+1명은 죽는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n‘n+1으로 일반화되었는데, ‘n+1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인 것으로서의 특수한 것이다. n+2번 사람에게 이러한 절차를 적용하면, ‘n+2명은 죽는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일련의 열거적 귀납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n명의 사람들은 죽었다.   

n+1명의 사람들도 죽는다.

 

n+1명의 사람들은 죽었다.

n+2명의 사람들도 죽는다.

                ......

 

위 일련의 열거적 귀납들은 죽는 사람들의 수적 증가와 관련된 일반화 정도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추론에 근거한다. 거기에는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의 이행이란 없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련의 귀납들을 사용하는 것은 대화와 추리에 비경제적이다. ‘모든 사람을 가정하면, 그 귀납들을 하나로 묶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n명의 사람들은 죽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전형적인 위 열거적 귀납 논증의 추론은 밀에게는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의 이행이 아니다. 위 귀납 논증은 단지 죽는 사람들의 수적 증가와 관련된 일반화, 즉 특수한 것을 좀 더 많은 양의 특수한 것으로 계속 진행시키는 과정을 줄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음의 논증은 어떻게 분석되어야 할까?

 

모든 사람은 죽는다.

a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죽는다.

 

위의 전형적인 연역 논증의 결론 추론 방식도 밀에게는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이행이다. 따라서 위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의 논증을 숨긴 것에 불과하다.

 

n명의 모든 사람은 죽는다.

a는 사람이다.                  

따라서 a는 죽는다.

 

위 논증의 첫 번째 전제 ‘n명의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번 사람은 죽는다)(2번 사람은 죽는다)...(n번 사람은 죽는다)

 

이로부터 다음 논증을 얻는다.

 

(1번 사람은 죽는다)(2번 사람은 죽는다)...(n번 사람은 죽는다)

a는 사람이다                                                                            .

따라서 a는 죽는다.

 

위 논증은 an명의 사람들에 속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두 경우로 나뉜다.

 

[경우 1]

an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하자. 이때 위 논증에 함축된 추론은 실질적 추론이 아니라 표면적 추론이다. 연접 연결사 의 언어적 협약 혹은 정의 방식에만 근거해 전제들을 참으로 가정할 때 결론도 반드시 참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우 2]

an명의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때 위 논증에 함축된 추론은 표면적 추론이 아니라 실질적 추론이다. an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므로, an+1번 사람이라고 하자. n+1번 사람도 죽는다는 것은 n명의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으로부터 추측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고 a는 사람이다라는 전제로부터 ‘a도 죽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은 위 두 경우에 따라 표면적 추론이거나 아니면 실질적 추론이다. 현대적 진술 및 술어 논리에 익숙한, 특히 술어 논리의 집합론적 해석에 익숙한 이들에게 밀의 이러한 결론은 혼란스러운 것이다. 추론을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이행에 국한시킨 밀의 동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는 아마도 인간의 경험은 유한한 대상을 다루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실질적 추론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면, 무한의 양을 가정하더라도 그러한 양과 관련된 보편적인 것은 실질적 추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표면적 추론은 논리적 연결사의 정의 방식에 근거하며 그러한 정의 방식에 따른 계산 절차는 유한하므로, 무한의 양과 관련된 보편적인 것은 표면적 추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실질적 추론과 표면적 추론 중 어느 경우에나 밀에게 추론은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이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문제는 만난다.

 

인간의 경험은 유한한 대상을 다루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고 하자. 이로부터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의 추론은 허구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그러한 추론으을 허구라고 단정짓지 않는 것은 밀의 경험주의를 위협하는 것일까?

  

 

부연 설명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