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추론에 관한 밀의 입장 1. 표면적 명제와 실질적 명제

착한왕 이상하 2019. 1. 17. 22:58

 

 

추론에 관한 밀의 입장

 

<논리 체계(A System of Logic)>는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을 대표하는 연구서 중 하나이다. <논리 체계>를 저술한 밀의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밀은 아버지 제임스 밀(J. Mill), 밀 부자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공리주의의 기초를 마련한 벤담(J. Bentham), 사회 개혁가 플레이스(F. Place), 파크스(J. Parkes), 역사학자 그로트(G. Grote), 정치가 로벅(J.A. Roebuck), 불러(C. Buller), 몰즈워스(W. Molesworth), 극작가 트렐로니(E.J. Trelawny) 등과 함께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의 급진적 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이들 모두는 당시 휘그(Whig)와 토리(Tory) 당에 맞서 투쟁했으며, 공리주의의 원리를 도덕과 사회 개혁의 원리로 간주했다. 여기에 깔려 있는 관점은 사회 개혁을 가로막는 전통이 기존 규범들을 선험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마음에 관한 탐구만을 통해 경험과 무관하게 그러한 규범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모든 사회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만약 전통에 깊게 스며들어 있다면, 사회 개선이라는 것은 실천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더욱이 어떤 규범이 보편적 원리인지를 놓고서는 선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뉜다. 선험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특정 개인의 의견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세뇌시켜 사회 개선을 가로막는 악과 같은 것이다. 밀은 급진적 사회 개혁 운동에 함축된 이러한 관점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밀은 선험성을 도덕과 청치론에서뿐만 아니라 수학과 논리학에서도 추방하려고 했다. 밀의 <논리 체계>에는 이러한 동기가 깔려 있다.

 

마음에 관한 탐구만 가지고 확실한 지식 체계 건설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으로 선험적 사고방식을 규정할 때, 밀의 경험론적 시도란 선험적 사고방식을 논리학에서 추방하려는 시도이다. 밀에게 언어 없는 생각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밀의 경험론적 시도가 성공하려면, 언어의 논리적, 의미적 구성 방식에 대한 탐구만으로는 논리학은 성립 불가능함을 보여야 한다. 이때 밀에게 도전 대상이 되는 논리학의 분야는 연역 체계이다. 밀에게 귀납 추리는 관찰 경험에 근거해 그럴듯한 것을 이끌어 내는 추리이기 때문이다. 연역 체계가 선험적 체계가 아님을 보이려면, 연역 추론 규칙들 중에는 경험적 내용을 가진 것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밀에게 명제들은 항(terms)들로 구성된다. 밀에게 명제란 번역 가능성과 관련하여 진술들 이 전에 주어진 참 거짓 판단 가능한 내용을 뜻하지 않는다. 진술들의 그러한 내용으로서 명제를 규정하는 방식은 명제들을 관념 혹은 개념들의 관계로 취급하는 것이다. 밀 이전 영국 경험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이해 방식에 따르면, 진술들은 단지 관념들의 관계로서의 명제들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언어 이 전에 존재하는 심층적 의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 없는 생각이란 불가능하다고 본 밀에게 이러한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밀에게 명제란 단지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진술들 혹은 참 거짓 진리치를 적용할 수 있는 진술들을 뜻하며, 사고 체계란 진술들의 체계와 다르지 않다. 두 진술은 추상적인 공통 내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관련된 경험에 의해 번역 가능한 것이다. 밀에게 명제란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진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명제진술을 맥락에 따라 혼용하여 사용할 것이다.

 

항들은 일반 이름, 개별 이름, 고유 이름으로 분류된다. 밀은 지시(denotation)와 내포(connotation)를 사용하여 이름을 구분하는데, 여기서 지시와 내포는 각각 외연(extension)과 내연(intension)에 대응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일반 이름을 대표하는 사과’, ‘사람’, ‘’, ‘돼지’, ‘나무’, ‘검다는 것등은 범주 개념에 대응되는 것들로서 각 범주의 대상들, 실례로 개별적 사과나 사람을 지시하며, 동시에 그런 대상들이 갖는 속성들, 실례로 특정 나무의 과일이나 합리적 동물이라는 속성을 내포한다. 대부분 개별 이름들은 지시 없이 내포만 갖는 것들이다. 실례로 사람다움’, ‘검음은 각각 사람다움과 검음의 속성만 내포한다는 것이다. 개별 이름 중에서 고유 이름은 내포 없이 지시만 갖는 것들이다. 실례로 이율곡’. ‘서울’, ‘금성등을 들 수 있다. 고유 이름에 대한 밀의 입장에는 명명된 대상의 서술과 명명(naming)을 구분하려는 동기가 깔려 있다. 일반 이름, 개별 이름, 고유 이름들로 구성된 진술들은 표면적 명제(verbal proposition)’실질적 명제(real proposition)’로 나뉜다.

 

밀에게 표면적 명제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언어적 협약에 따라 참 거짓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진술들이다. AB를 서로 다른 두 진술이라고 할 때, ‘A 그리고 B라면, A이다’, ‘A가 참이라면, A 또는 B이다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진술들은 그리고’, ‘또는으로 표현된 논리적 연결사들의 정의 방식만으로 항상 참이기 때문에 경험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현대 논리학의 기호를 빌려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해 보자.

 

접속사와 논리적 연결사 구분 생략

이접, 연접, 함의 논리적 연결사에 대한 밀의 정의 방식

 

위에서 보듯이, 밀에게 표면적 명제들이란 논리적 연결사의 정의 방식만 가지고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조건문 형식의 진술들이다. 현대적 1차 진술 논리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 그러한 진술들 중 참인 것들은 추론 형식들, 동어 반복(tautology) 진술 형식들 중 타당한 논증 형식들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밀은 타당한 추론 형식들을 나타내는 표면적 명제들을 언어적 협약에 의한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협약에 근거한 판단들을 선험적이라 부를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한 표면적 명제들의 규정 방식에서 경험을 가능하도록 해 주는 마음의 조건들과 같은 선험적인 것을 가정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표면적 명제들을 굳이 선험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것들은 밀의 경험론에 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언어 사용의 협약에 근거한 추론 형식들을 나타내는 표면적 명제들 모두는 논리적 동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세상에 대한 아무런 경험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언어 사용에 국한된 마음만으로 그런 명제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할 때, 그렇게 국한된 마음은 아무런 경험적 내용을 생성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의 탐구만으로 논리 체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선험적 주장을 붕괴시키는 데 밀에게 필요한 것은 연역 체계의 추론 규칙 및 법칙들 중에는 경험과 연류된 것들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밀은 표면적 명제들 중 논리적 연결사들의 정의 방식과 무관한 특이한 것들도 허용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다음 진술을 살펴보자.

 

이이는 율곡이다.”

 

율곡에 대해 아는 사람들에게 이이율곡은 동일 인물을 지시한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과 무관하게 위 진술은 참으로 가정될 수 있다. ‘이이율곡모두 고유 이름에 속한다는 사실만 알면, 고유 이름의 언어적 규정 방식만으로도 두 이름이 동일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진술을 참으로 가정한다고 특정 대상에 대한 경험적 정보를 얻는 것은 아니고, 위 진술에 대응하는 경험적 사실도 없다. 물론 직접 대상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찰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명명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위 진술을 참으로 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이이’, ‘율곡을 고유 이름으로 분류하려면, 그러한 명명 행위에 대한 기만 위 진술을 표면적 명제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분명한 것은 있는데, 위와 같은 진술을 표면적 명제로 분류한 밀의 입장은 많은 언어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내포가 지시를 함축한다는, 내연이 외연을 함축한다는 혹은 대상에 대한 특정 서술이 대상을 함축한다는 의미론이 한때 지배적이었다. 위와 같은 진술을 표면적 명제로 취급하는 경우, 그것은 내연을 따지지 않고 참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론의 타당성을 따질 때 간과될 수 없는 것으로 그들에게 비추어졌다. 그들의 기술적 (technical) 논쟁을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작업을 찾아 그 논쟁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다. 그 논쟁은 현재 나의 작업들에서는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칭의 측면에서 의미를 기호와 대상의 연결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내연이 외연을 함축한다는 주장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한 이유를 간략히 언급한다.

 

의미에 대한 탐구는 여러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기 때문에, 번역 가능성, 표현의 대체 등과 관련된 의미의 측면, 즉 해석은 논의를 단순화하려고 언급하지 않는다. 지칭 측면의 의미는 언어 사용 맥락에서 기호와 대상을 연결하는 능력의 산물이며, 그러한 연결 과정에 대상이나 대상들의 고유 속성들의 서술과 관련된 내연이 개입하는 경우가 있고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어느 경우에나 그러한 연결 과정은 사용 맥락에 의존적이기 때문에, 단어 자체의 고립된 의미라는 것은 없다. ‘이것’, ‘저것또는 명명이 내연 없이도 가능하더라도, 그래서 특정 언어적 텍스트를 요구하지 않더라도, 언어 사용 맥락은 지시 의도와 관련하여 텍스트보다 광범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언어 사용 맥락은 항상 행위 환경과 중첩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기호와 대상의 연결 과정에 내연이 개입하는 경우는 지시 대상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며, 그러한 정보는 대상의 정의(definition)에 사용된다. 하나의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분류의 관점에서 여러 대상들에 대해 특정 기호를 사용하는 경우, 그 기호와 대상들을 연결하는 과정에는 내연이 개입하게 마련이다. 분류는 그러한 대상들을 하나로 묶도록 해 주는 정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상이나 직접 관찰 불가능한 이론적 대상을 도입하는 경우에도 내연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우, 해당 대상의 속성들을 규정해 주는 맥락 구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미를 사용 맥락에서 기호와 대상의 관계로 파악하는 입장에 의하면, 내연이 외연을 함축한다는 주장은 단지 특정 서술로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과 의미를 혼돈한 것에 불과하다. 실재하거나 가상의 대상과 기호 사이의 연결 능력의 산물로 의미의 측면을 국한시킬 때, 그 연결에 내연이 개입된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을 뿐이다.

 

밀에게 실질적 명제란 관찰 경험 및 그 기록에 근거해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거나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참 거짓 여부를 알 수 없는 것들이다. ‘키케로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에서 키케로는 고유 이름이며, 사람은 일반 이름이다. ‘사람에 내포된 속성은 우리말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은 ‘be’ 동사의 연결 기능에 의해 키케로에게 부여된다. 해당 진술은 키케로를 관찰한 경험 기록에 의해 참이란 점에서 실질적 명제이다. ‘까마귀는 검다라는 진술에서 주어부의 까마귀는 지시와 내포를 동시에 갖는 일반 이름이고, 술어부에 함축된 검음은 내포만을 갖는 개별 이름이다. 우리말에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be’ 동사의 연결 기능에 의해 검다는 속성은 까마귀에 부여된다. 까마귀에 대한 관찰 경험 없이는 해당 명제에 대한 참 거짓 판단 여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당 진술은 실질적 명제로 분류된다. 밀은 해당 명제를 관찰 사실들을 일반화한 열거적 귀납의 결론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동시 긍정과 부정을 허락하지 않는 무모순율, 추론 대상의 진술은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배중률 역시 일종의 열거적 귀납이다.

 

(i) P가 경험적으로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진술을 나타낸다고 하자.

(ii) 의미의 해석 측면에서 ‘P를 주장하는 것‘P는 참이다와 동치이다. ‘P를 부정하는 것‘P는 거짓이다와 동치이다.

(iii) P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인 경우를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경우를 경험한 과거나 현재의 사람들도 없다. 실례로 비가 오면서 동시에 오지 않는 경우를 경험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다.

(iv) 따라서 P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인 경우는 없다.

(v) P가 참도, 거짓도 아닌 또 다른 어떤 진리치를 갖는 경우를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 그러한 경우를 경험한 과거나 현재의 사람들도 없다. 실례로 이 사과가 빨갛지도, 빨갛지도 않은 어떤 것인 경우를 경험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다.

(vi) 따라서 P는 참 또는 거짓이다.

 

무모순율은 (i)-(iii)에 근거해 (iv)의 결론으로 얻어졌다. 배중률은 (i)-(ii)(v)에 근거해 (vi)의 결론으로 얻어졌다. 두 논증 모두 열거적 귀납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 점은 (iii)(v)에서 분명하다. 일상 경험에서 참인지 거짓인지 애매모호한 진술들이 있다. 더욱이 무무순율을 위배한 표현들도 등장한다. (i)은 그러한 경우들을 배제하는 기능을 갖는다밀에 따르면, 무모순율과 배중률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선험적인 것이 아니다

 

 

To be continued!

 

* 외연과 내연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개념이란>

http://blog.daum.net/goodking/778

 

<개의 내연, 공통적 특징의 두 가지 해석법과 플라톤적 유혹>

http://blog.daum.net/goodking/783

 

<의미론적 결혼: 비대칭성>

http://blog.daum.net/goodking/264

 

<외연과 내연의 비대칭성: 집합론적 해석>

http://blog.daum.net/goodking/795

 

 

<GCTC 퀴즈: 외연과 내연>

http://blog.daum.net/goodking/393

 

<내연과 외연의 비대칭성>

http://blog.daum.net/goodking/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