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동굴
- 현실에 민감한 철학자 -
플라톤의 저서 <국가> 6권에 등장하는 ‘동굴 우화’만큼 서양 철학사에서 많이 회자된 것도 드물 것이다. 이에 걸맞게 그 해석도 다양한데, 하나의 우세한 해석은 플라톤이 전체주의적 정치 이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Popper, K.(1962),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Harper & Row) 또 다른 해석은 플라톤이 정치에 대한 회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Wolin, S.(1960), Politics and Vision, Little Brown & Company.) 이렇게 상반된 두 해석 중 어느 것을 따르든 간에, 플라톤이 훌륭한 철학자 대열에 들어가기는 힘들어진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공동체주의와 같은 여러 정치 이념들은 하나 같이 어떤 ‘이상화된 인간형’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자유주의는 매우 추상적인 ‘자율성’ 개념에 근거한 합리적 행위자라는 것을 전제한다. 정치의 목적은 그러한 행위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는 것이고, 그 폭이 확대될수록 다수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을 따를 때 ‘철학자 왕’이 지배자로 등장하고, 각자가 자기 임무를 다하는 가운데 돌아가는 플라톤의 국가는 그야말로 엘리트적 발상에서 기인한 전체주의적인 것이다. 그 철학자의 모형은 바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이다.
그러나 플라톤 당시의 관점에서 동굴의 우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이상 국가의 지배자가 아닌 ‘현실에 민감한 사람’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단, 그냥 현실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 선 그 자체를 열망하는 철학자로서 재탄생하게 된다. 동굴의 우화는 그러한 철학자가 겪게 되는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
1. 플라톤의 기독교화
동굴 안에 죄수들이 앉아 있다. 움직이는 벽 뒤의 통로를 따라 다른 사람들이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지나가고 있다. 그들과 죄수들은 서로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죄수들에게 그저 잡음으로만 들릴 뿐이다. 벽 뒤의 통로 끝에는 불이 타고 있으며, 그 불빛에 의해 항아리들의 그림자가 벽에 투영된다. 불을 지나 동굴 입구에는 환한 태양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
동굴 우화에서 나타나는 ‘실재의 구조’는 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원소들이라는 물질(matter)로 구성된 항아리와 같은 사물들이다. 불은 우주적 영혼(cosmic soul)을 상징한다. 여기서 영혼은 물질이 형상(form)에 관여하여 사물로 탄생하게끔 해주는 힘과 같은 것이다. 물론 형상을 그대로 본 딴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적 세계관에서 기인한다. 우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조직화 과정을 거듭할 뿐이기 때문에, 완전히 형상을 본 딴 사물의 존재는 우주의 종말을 뜻한다. 태양빛은 형상을 상징한다.
플라톤에게 물질, 영혼, 형상은 우주라는 유기체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세 측면과 같은 것이다. 단, 형상에 관한 지식만이 진정한 지식이기 때문에, 형상은 물질이나 영혼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과 영혼 없이 형상만 존재하는 우주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존재론적 서열 구조에서 형상이 상위를 차지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떤 초월적 세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을 소우주로 파악하는 것은 동양 특유의 생각이 아니다. 플라톤도 실재의 세 측면이 인간에게 구현되어 있다고 믿었다. 몸(body)은 물질에, 영혼(soul)은 우주적 영혼에, 그리고 마음(mind)은 형상에 대응된다. 우주가 통일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유기체이듯, 몸과 마음의 이분법과 같은 것은 플라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경험이 발생하는 장소가 아니라 도덕적 원리와 같은 것이다. 우주적 영혼에 의해 물질이 형상에 관여하듯, 영혼이라는 힘이 없다면 몸과 마음은 통일된 유기체를 형성할 수 없다.
‘초월적’이라는 개념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파악하는 그리스 사상에는 이질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들이 초월적인 세계에 위치하게 된 것은 플라톤의 기독교화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옳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도시(City of God)>에서 ‘인간의 도시’와 ‘신의 도시’를 이분시켰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추방당한 인간이 거주하는 땅의 세계는 불완전하다. 신의 섭리가 깃든 천상만이 완벽한 신성이 구현된 곳이다. 우주는 더 이상 스스로 자기 조직화의 과정을 밟을 수 없게 되었고, 우주적 영혼이라는 개념은 사장된다. 우주적 영혼이라는 힘이 결여된 상태에서 물질은 형상에 관여할 수 없다. 그 대신 형상들이 우주를 비춰줄 뿐이다. 형상은 인간의 도시가 아닌 신의 도시에 속하는 초월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도시와 신의 도시가 이분되면서, 인간의 영혼은 단지 구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자연은 신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말기에 이르러 이 관점은 서서히 역전된다. 자연은 신의 자식인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음은 물질적 자극에 의해 경험이 발생하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경험은 마음속에 갇혀버리게 되었지만, 인간은 이성이라는 독특한 능력 덕에 물질이 운동하는 방식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방식은 신에 의해 설계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조직화와의 능력인 우주적 영혼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물질적 자극에 의한 충동이 영혼을 대체하게 되고, ‘자유의지’(free will)라는 특별한 신의 선물 덕에 인간은 도덕적일 수 있다. ‘우주시장’(cosmic market)에서 인간의 값어치가 극상승함으로써 인간의 도시는 자율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일원론은 단지 물질만 인정하거나 신을 물질계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철학자들이 중세와 결별하기 위해 중세를 암흑기로 그리든 말든, 그들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초월적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이분하거나, 그 초월적 세계를 가지고 플라톤을 비아냥거리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중세 신학자들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소크라테스와 예수
컵 속에 담긴 젓가락이 휘어져 보이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스넬의 법칙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단지 외양이나 환영에 불과하다면, 실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무의미하다. 동굴 안 죄수들 중 입구 쪽에 가 본 누군가가 그림자에 비친 것이 실제로는 항아리였다고 말했을 때, 항아리와 항아리의 그림자가 동일한 것은 절대 아니다.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를 가정하고 항아리 자체가 갖는 실제 모습과 성질을 묻는 것은 항아리 존재를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림자를 단순한 환영으로, 형상만을 실재로 간주하는 것은 플라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의 구조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형상들을 초월적인 것으로 만든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컵 속에 담긴 젓가락이 휘어져 보인다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컵 속에서 젓가락을 꺼내보고 만져보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관관계의 복잡성은 다르다. 벽에 비친 그림자는 단순히 어떤 사물의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사가 투영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는 그 투영된 방식의 원인을 찾아 떠나는 방랑자와 같은 존재다. 그 목적지는 선 그 자체이다.
선을 추구하는 철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을 모든 면에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 플라톤에게 영혼 역시 세 측면을 갖고 있다. ‘분별력 있게 사고하는 기질’, ‘용기 있는 기질’, ‘육욕적인 기질’이 그것이다. 분별력 있게 사고하는 기질을 근대의 이성에 대응시켜 다른 것보다 우위에 놓고 이상적인 철학자를 논하는 것은 플라톤의 생각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그리스 사회에서 도덕이라는 것은 올바른 행위의 기준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논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은 사회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선택의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의 ‘자유의지’나, 그 대응물로서 ‘개인의 자율성’과 같은 개념을 가정하는 것은 그리스의 도덕 담론 전반에 걸쳐 나타나지 않는다. 집단의 가치와 같은 것이 개인의 속성으로 환원되어 설명 가능하다는 관점 역시 그리스의 도덕 담론에서는 이질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분별력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 맞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용기 있는 인물이다. 영혼의 세 측면의 조합에 따라 여러 인간형이 가능하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는 미덕도 하나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미덕에 민감한 인물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일부는 항상 존재한다. 그 중에 한 명이 소크라테스이며, 플라톤 자신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동굴 바깥에 나가 태양빛을 보고 자기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동굴 안으로 귀환했다고 해보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박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죄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눈 밖에 난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 태양빛이 신의 계시에, 죄수들을 원죄에 빠진 구원의 대상에 유비시키는 경우, 소크라테스는 예수인 셈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예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약 동굴 밖에서 동굴 안으로 귀환한 철학자가 박해 속에 죽어가면서 죄수들에게 자유를 찾으라고 선언했다면, 플라톤은 지금의 자유주의 옹호자 계열에서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지 않았던 만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가 지배자로 군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인과 경제 활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기질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국가의 상(象)을 역설했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전체주의적 정치 이념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철학자가 왕이 될 수 없다면, 고립된 아카데미아를 세워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자기를 보존하면서 사회적 임무를 다하는 최선의 길이다. 동굴의 우화에서 풍기는 이러한 냄새는 플라톤을 정치에 대한 회의론자로 보게끔 만들기도 한다.
3. 수사적 장치
태양빛이 가정된 동굴과 그렇지 않은 동굴의 차이는 무엇일까? ‘태양빛이 가정되지 않은 동굴’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던 소피스트들을 풍자한다. 사회가 인간들의 구성물에 불과하다면, 결국 권력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본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우주, 사회, 인간 모두가 진선미를 지향한다고 철저히 믿었던 인물들이다. 그 믿음에 근거해 사회는 소우주인 인간에게 유비된다. 덕을 갖춘 인간을 모방한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이다.
덕을 갖춘 인간은 어떤 인물인가? 모든 미덕은 선 그 자체를 지향하기 때문에, 덕을 갖춘 인물도 그래야 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는 전제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덕을 갖춘 인물은 합리적 계산에 근거한 행위자가 아니다. 상황에 합당한 행위를 할 수 있게끔 기질들이 발휘되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이 동질적이라면, 사회가 불가능하다. 기질들의 조합 방식에 따른 개인차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사람만이 덕을 갖춘 인물이다. 덕을 갖춘 사람은 오로지 공정한 사회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다. 그가 동굴 밖에서 깨달음을 얻었더라도, 그는 그곳에 머무를 수 없다. 그는 동굴 안으로 귀환해야만 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공정한 사회란 개인의 사익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사회가 아니다. 태양빛이 필요 없는 동굴은 사익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사회를 정당화해주는 상징성을 갖는다. 권력이 곧 진리가 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선 그 자체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들이 던진 ‘무엇’이라는 물음은 실제로는 선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관련된다. 그러한 정당성의 확보는 논리적이고 논증적 서술 방식이 아닌 대화체 속에 반영된다. 어느 누구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한다면, 그 입장을 반박하는 식이다.
개인의 관심사가 극대화된 사회는 공정한 사회인가? 플라톤의 대답은 간단히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관심사는 실제로는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에서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의 구분은 유효하다. 개인의 관심사는 항상 권력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의 관심사가 극대화된 사회는 공익이 아니라 특정 계층의 사익에 의해 이끌려가는 사회로 끝날 수 있다.
자유주의자는 추상적인 자율성 개념에 근거해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극대화될 때 복지도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복지는 근본적으로 개인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을 배려하는 동기가 굳이 언급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관점이 관철되려면, 아이러니 하게도 개인들의 기질 차이와 같은 것은 정치적 현상에서 완전히 무시되어야 한다. 이 점은 플라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이질적인 만큼, 유기체의 통일성을 위해 필요한 영혼은 정치론을 논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인간의 기질을 무시한 정치론은 플라톤에게 허상에 가까운 것이다.
기질의 차이는 개인차로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철학자의 기질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항상 그렇다. 그들은 동료들을 관찰하는 가운데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는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관통하는 이상적인 철학자 혹은 현자는 결코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학자 왕이 지배하는 이상 국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덕을 갖춘 인간의 모습을 닮은 사회이다. 선을 지향해도 선 자체를 규정할 수는 없다. 동굴 밖에서 태양빛을 보는 것이지 태양을 정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동굴 안으로 되돌아온 철학자는 태양을 설명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죄수들에게 그림자만 보고 만족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러한 철학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는 선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현실의 여러 정치 형태가 갖고 있는 한계와 모순을 일깨워주려는 일종의 수사적 장치이다. 플라톤이 그 이상 국가가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단지 그것을 가지고 여러 정치 형태를 비교 검토했을 뿐이다. 플라톤이 염두에 둔 실현 가능한 국가의 형태는 ?국가?가 아닌 ?법?(Law)에 등장한다.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후기 플라톤 철학이 새롭게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 국가를 여러 정치 형태를 진단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로 이해할 때 그가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긴 사회 형태가 ?국가?의 그것과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4. 현실에 민감한 철학자
플라톤과 포퍼의 정치철학은 양립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개인의 역할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판이하게 다르다. 인간의 기질과 그에 따른 차이가 중요한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포퍼가 관심을 가질리 만무하다. 하지만 플라톤이 덕을 갖춘 인간에 사회를 유비시켰지 공정한 사회를 규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인간에게 선은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공정한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포퍼는 진리란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는 동전과 같은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산꼭대기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지향하는 것은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 회의하는 것은 그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극히 소크라테스적이다.
플라톤 당시의 관점에서 그의 생각을 읽어내려는 움직임은 고무적이다. (Huard, R.(2007), Plato's Political Philosophy: The Cave, Algora.) 그러나 그의 생각을 가지고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진단해보려거나, 그것에 기대어 잃어버린 고대의 자연관을 부활시켜보려는 시도는 못마땅하다. 지금은 플라톤이 살던 시대와 달리 사익과 공익, 경제활동과 정치활동의 경계를 명백히 하고 담론을 펼칠 수 없다. 또 고대의 자연관은 하나의 세계 이해일 뿐, 그것이 문명 대안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철학자의 사회적 역할이다. 동굴 속의 철학자는 결코 지금의 대학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 동굴 속의 철학자는 그림자에 만족하지 않는 기질을 갖고 있다. 그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쳐 다른 이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동굴 속의 철학자는 한 마디로 말해 ‘현실에 민감한 인물’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동굴에서 발견되는 ‘현실에 민감한 철학자’는 ‘선 그 자체를 지향하는 철학자’이어야 한다. 정말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소피스트들은 정말 태양 빛 없는 동굴에 만족해 권력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주장한 것일까? 소피스트들도 공익이 사익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에 철저히 동조하는 인물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동조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선 그 자체를 강조하는 소크라테스에게도 동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는 철저히 자신의 철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공된 것이다. 거기에는 선 그 자체를 지향하지 않으면, 악에 빠지게 되어 있다는 강박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도, 규정할 수도 없다. 오히려 누구나 현실적 악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 집단적 경험을 통해 그러한 현실적 악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현실에 민감한 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행위를 제한하는 실제 미덕들은 선 자체를 지향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러한 노력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선 그 자체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악에 빠진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역으로 명백한 악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것이 선 그 자체를 전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철학자가 현실에 민감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현실에 민감한 인물로 부활하지 않는 한, 지금의 자유민주주의의 실상이야말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특정 권력층의 선동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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