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의 고백
-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 -
저승사자: 저는 저승사자입니다. 제 얘기 한 번 들어볼래요?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면서 장부에도 없던 사자(死者)들이 염라국에 몰려왔습니다. 원자폭탄이라는 것이 일본에 떨어져 발생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염라대왕께서는 천리(天理)를 어긴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저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치밀한 조사 결과, 다음 도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발견 중에는 “E=mc2”이라는 공식이 있습니다. ‘E’는 에너지, ‘m’은 질량, 그리고 ‘c’는 빛의 속도를 뜻합니다. 입자를 충돌시킬 때 적은 양의 질량 결손이 발생했다고 합시다. 적은 양의 질량 결손에 해당하는 에너지는 실로 엄청납니다. 에너지는 질량 결손에 빛의 속도를 제곱한 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일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의 오토 한(O. Hahn)은 1938년 중성자와 우라늄 원자와 충돌시켜 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때에도 질량 결손이 발생합니다. 만약 우라늄을 쪼개는 과정을 반복할 수 있다면, 정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토 한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옛 동료인 마이트너(L. Meitner)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마이트너는 오토 프리쉬(O. Frish)와 함께 한의 실험 결과를 네이처(Nature)에 보고했죠. 오토 한의 실험 결과를 본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P. Wigner)와 레오 질라드(Leo Szilard)는 겁을 먹게 됩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오토 한의 실험을 개선하여 가공할만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들 계획을 추진할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죠.
질라드는 미국도 히틀러에 대항해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해야 한다고 정치권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인 루즈벨트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질라드는 아인슈타인에게 루즈벨트를 설득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질라드와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에게 원폭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여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한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이 시작된 것이죠.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저는 대량 학살의 주범으로 아인슈타인을 지목했습니다. 제가 당시 장부를 그대로 염라대왕께 제출했더라면, 아인슈타인은 그 날로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왜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지 않았을까? 저는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염라대왕께 장부를 제출할 수는 없었답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그만큼 신중해야 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집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아인슈타인은 미연방수사국 FBI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평화주의자들과도 서슴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저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문 및 잡지 기사와 인터뷰를 뒤진 결과,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이 나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이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E=mc2”라는 공식에는 원자폭탄의 실현 가능성만이 함축만 되어 있을 뿐이죠. 그 공식을 가지고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 하나 중요한 단서는 루즈벨트가 맨해튼 계획을 추진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맨해튼 계획을 추진하라는 루즈벨트의 승인이 바로 떨어졌습니다.
저의 도식이 사건 발생의 ‘인과 관계’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건 발생의 ‘순서’만 나타낸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장부에서 도식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지웠고, 그 대신에 히틀러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도식도 함께 지운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 저희 염라대왕은 도식을 이해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시를 회고해볼 때 제가 실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독일과 함께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주변 국가에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작태를 볼 때 히틀러와 함께 일본 천황 이름도 장부에 적었어야 마땅했습니다. 제 실수로 사람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믿지 않게 될 것 같아 걱정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정말 평화주자였던 모양입니다. 국가 간 무기 경쟁을 통해 힘의 균형이 유지될 수도 있는 까닭에, 무기 경쟁은 세계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정치가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대가 존재하는 한, 그 어떤 갈등도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국가의 군비 확장에 능동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평화주의는 무기력하며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능동적 평화주의(“Active Pacificism”)」)
능동적 평화주의자라면, 그가 자유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든 누구와도 협조할 수 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진 그가 공산주의를 경멸한 철학자 러셀(B. Russell)과 함께 평화주의 선언문을 작성하지는 않았겠죠. 그 선언문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Russell-Einstein Manifesto)’으로 불립니다. 막스 보른(M. Born), 브리지맨(Percy W. Bridgeman), 인펠트(L. Infeld), 졸리오-큐리(F. Joliot-Curie), 뮬러(H. Muller), 파울링(L. Pauling), 포웰(C.F. Powell), 로트블라트(J. Rotblat), 그리고 유가와 히데끼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러셀을 제외하고는 철학자나 인문학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능동적 평화주의를 믿느냐 구요? 제가 미쳤어요? 저는 사람이 아니라 저승사자입니다.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인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이념이 올바른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지만 긍정적 가치를 지닌 모든 이념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평화의 상태가 전쟁의 상태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다면, 평화는 공허한 이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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