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당신은 확률 계산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러한 계산식에 함축된 합리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자. 그 원리에 따르면, 합리적인 문제 해결이나 판단은 발병률, 치사율, 위험률 등의 비교에 근거해야 한다. 즉, 환경 구조를 형성하는 대상 및 관계에 대한 정보는 통계나 확률이 개입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불필요하거나 사소하다는 것이다. 다음의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보자(Nisbett, R.E. & Ross, L., 1980).
• K는 새로운 차를 사려고 한다. 그가 고려하는 차종은 볼보와 벤츠 중 하나로 좁혀졌다. K는 오로지 고장률에 근거하여 차를 선택하기로 했다. 지난 10년 간 통계치를 보면, 볼보의 고장률이 벤츠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다. 그런데 어제 그의 친구가 산 볼보가 고장이 났다. K는 볼보와 벤츠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K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앞서 언급된 원리에 따라 볼보를 선택해야 한다. 친구의 고장 난 볼보도 고장률을 계산하기 위한 데이터에 더해져야 하기 때문에, 통계치 계산에 바탕이 되는 기저 비율(base rate)도 바뀌게 된다. 이렇게 수정된 기저 비율에 근거한 고장률은 기존의 고장률보다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높아진 고장률은 여전히 벤츠보다 훨씬 낮다. 확률 계산식을 몰라도 비율 비교의 원리에 근거하여 판단한 K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사고 실험은 확률 계산식과 같은 형식 절차에 함축된 판단 방식이 본질적으로 상황과 무관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환경 구조의 정보들로 구성된 내용은 단지 그러한 절차가 적용되는 입력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위의 사고 실험에서 자동차의 고장률이 제약품의 부작용 비율로 대체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형식 절차에 함축된 원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지는 논란거리가 된다. 다음의 사고 실험은 형식 절차에 함축된 비율 비교 원리에 근거한 판단이 오히려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Gigerenzer, G., 1990).
• 부족장 K는 아이들을 바다와 산 중 한 곳에서만 놀게 하려고 한다. K는 바다나 산에서 놀다가 사망한 아이들의 빈도수에 근거하여 판단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10년 간 통계치를 보면, 산에서 놀다가 사망한 아이들의 수가 바다에서 놀다가 사망한 아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 어제 바다에 길에 8미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백상어가 나타나 아이 한 명을 잡아먹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진 부족장 K는 아이들을 바다와 산 중 어느 곳에서 놀게 하여야 하는가?
만약 K가 확률 계산식의 형식 절차에 함축된 비율 비교의 원리에 따라 판단한다면, 아이들을 바다에서 놀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K의 결정을 합리적이라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정은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 져야 한다는 목적에 비추어 현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상어가 바다에 나타난 순간, 기계의 고장률과 달리 과거 사망률은 무의미해진다. 일상생활에서 기능하는 실제 판단은 특정 목적 달성과 연관된 상황에 합당한 경우에만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상황 인식이라는 것이 특정 문제의 목적에 따른 환경 정보의 추출 과정인 까닭에, 상황에 합당한 판단은 그러한 정보의 유기적 결합에 근거한 내용에 의존적이다. 두 사고 실험의 비교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 첫째,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전제하는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에 근거하여 ‘합리적 판단’을 선별해낼 수 없다. 살펴본 두 번째 사고 실험은 확률 계산식에 함축된 비교 원리에 따른 판단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둘째, 일상적 합리성은 문제 해결 과정과 맞물린 ‘상황에 합당함’ 혹은 ‘현명함’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상황에 합당한 판단 능력이 문제 해결 과정 속에 드러나는 다양한 방식을 ‘일상적 합리성’이라는 표현을 빌려 사용하는 까닭에, 인간의 실제 판단은 정보가 주어지는 순서 및 정보의 유기적 결합에 근거한 내용에 의존적이다.
일상적 합리성의 관점이 실제적이라는 이유로, 또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에 전제된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이상화된 합리성 관점 자체를 포기해야 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 긍정하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다. 첫 번째 사고 실험에 동원된 판단 절차는 기계의 고장률과 관련된 유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을 기준으로 하여 실제 판단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에 전제된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도 실제 판단 방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진술을 내용을 무시하고 진리치의 참 거짓 계산 절차에 따른 형식 추론 및 확률 계산식은 이상화된 합리성을 대표한다. 그러한 형식 절차가 무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특정 형식 절차는 일상적 문제 해결에서는 거의 불필요해 보이는 고도의 추상화 과정의 산물이며, 또 그러한 절차가 동원되어야 풀리는 전문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상적 문제 해결 과정에서도 추상화 능력은 혼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목적 달성에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할 수 없다면, 정보 추출과 정보의 유기적 결합이라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또 효과적인 문제 해결은 반드시 문제의 재구성 혹은 표상 전환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 문제 해결에 사소한 정보를 제거하고 문제의 맥락을 형식적으로 구조화하는 추상화 능력은 필수적이다(Lesgold, A.M., 1988). 심지어 살펴본 두 사고 실험을 교차 비교하여 그 차이를 따지기 위해서도 두 가지 문제가 형식상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낼 수 있어야 한다. 즉, 확률 계산식에 함축된 비교 원리에 근거한 다음 도식의 전략이 생명이 없는 기계 등에 대해서는 무리 없이 작동하지만, 이를 그와 유사한 구조적 형식을 띠는 다른 문제 영역에도 확대할 수는 없다.
<위 도식은 볼보와 벤츠의 고장률을 비교하여 볼보를 선택하게 된 과정을 나타낸다. X와 Y에 생명체가 아닌 앰프나 헤드폰 등을 집어넣어도 된다. X에 ‘아이를 바다에서 놀게 하는 것’, Y에 “아이를 숲에서 놀게 하는 것‘을 대입시키고, 고장률을 사망률로 대체한다면, 살펴본 두 사고 실험은 구조적으로 동형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위 도식의 전략은 아이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경우에는 효과적일 수 없다.>
추상화 능력의 발휘 유무에 따라 이상화된 합리성과 일상적 합리성의 대립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상화된 합리성을 대표하는 여러 형식 절차는 일상적 문제 해결 과정에 내재된 추상화 능력이 극대화된 결과물이며, 그러한 추상화 과정은 해당 절차의 적용 범위를 규정해주는 경계 조건을 설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도의 추상화 과정’은 일상적 합리성의 영역에 내재한 능력들을 사용하여 특정 경계 조건 아래에서만 내용과 무관하게 사용 가능한 이론을 산출하는 과정, 즉 ‘이론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일 때 이상화된 합리성의 영역은 일상적 합리성의 영역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상화된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은 일상적 합리성의 한 측면을 모방할 수 있는 유용성을 갖는다. 그러한 모방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상화된 합리성이 일상적 합리성을 완전히 모방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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