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갈등 원인의 진단: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
일상적 문제 해결 과정에서 인간의 판단은 정보의 양뿐만 아니라 정보가 주어지는 순서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때 ‘합리적 능력’이란 성공적인 문제 해결 과정에서 발견되는 인지 능력들의 합성 방식을 뜻한다. 그러한 합성 방식은 문제의 맥락과 맞물린 상황에 의존적인 까닭에, ‘일상적 합리성’은 ‘상황에 합당함’을 의미한다(이상하, 2007). 하지만 논리학이나 경제학 혹은 철학 등에서 10여년 이상의 학습 과정을 거친 전문가들 중 상당수는 합리성을 ‘상황에 합당함’으로 규정하는 것에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들의 사고는 실제 문제 해결 과정보다는 문제 해결의 결과를 재구성하는 가운데 얻어진 ‘이상화된 형식 절차’와 같은 것에 반영된 ‘합리성 개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합리성 개념을 ‘이상화된 합리성’이라 할 때 ‘주어진 것에서의 추론(inference from the given)’ 방식을 형식화한 것, 곧 추론 형식과 확률 계산식은 이상화된 합리성을 대표해 왔다.
이상화된 합리성은 논증 과정이 아니라 논증 결과의 관점에서 얻어진 추론 형식 및 확률 계산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그러한 형식 및 계산식은 개연적 판단의 원인이 되는 모든 ‘상황적, 심리적 요인을 제거하고 특정 조건 아래 내용과 무관하게 적용 가능하게 해주는 이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얻어질 수 없다.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에서 이해될 때 판단의 내용을 규정하는 상황적 요인이나 심리적 요인은 합리적인 것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은 다음 세 가지 이분법을 산출할 수밖에 없었다(이상하, 2006).
•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점을 따를 때 판단 및 타당한 논증의 합리적 기준은 환경 구조와 같은 정보의 원천 및 정보가 주어지는 방식의 내용과 무관해야 한다.
•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이분법: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에 따라 추론의 형식 절차 마치 사고의 규칙처럼 여겨졌고, 심리적인 것을 합리성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발견과 정당화 맥락의 이분법: 추론 형식 및 확률 계산식이 합리성을 대표하게 되면서, 합리성은 정당화 맥락 속에서 이해되었다. 발견은 ‘발견의 논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맥락에 귀속되거나, 합리성의 영역에서 다뤄질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세 가지 이분법은 개연적 판단을 이단시하는 ‘근대 이후의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 속에서 굳어진 이념들, 즉 지식 체계의 위계질서, 맥락과 무관한 지식의 보편적 정당화, 예측 가능성의 보편성이라는 이념들과 공조해 왔다. 이 때문에, 이상화된 합리성은 ‘전통적 합리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상화된 합리성이 전통적 합리성으로 불리게 된 만큼, 그것에 대한 비판의 물결도 거셌다. 상황과 무관한 보편적 지식 체계의 가능성을 견고히 하기 위해 이성만으로 자연과 도덕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관점이 널리 퍼졌으며, 그러한 개인주의 관점의 이성 개념은 19세기 실험심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학자들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하였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이분하는 전통에서 심리적인 것은 ‘충동’의 일종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여기는 전통에는 심리적인 것을 판단에 내재적인 요인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깔려 있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을 이분하는 전통에 대한 비판은 여러 과학자와 수학자가 이끌었다. 푸앵카레의 제자인 하다마르(Hadamard, J., 1954), 그리고 발견법(heuristic)을 학문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를 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학자 폴리야(Polya, G, 2004) 등은 발견에서 심리적인 것의 역할을 강조했다.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발견과 정당화 맥락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발견의 논리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심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에 반하는 것으로 여기는 관점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설을 평가하는 논리적 기준에 대한 합의가 가능하더라도, 단일 가설 생성 과정과 관련된 추론 패턴에서 심리적 요인이 배제될 이유는 없다(Peirce, S.C., 1932). 그러한 추론 패턴의 결과인 가설은 그 생성 과정에 영향을 미친 심리적 요인의 배제 가능성이 아니라, 그 생성 과정을 자극한 사실의 설명력 정도에 의해 성공 유무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상화된 합리성에 대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내용을 이분하는 관점은 교과 과정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교수법의 주축인 베이비 로직이 대학의 교양 과목으로 정착하면서, 논증은 추론 형식에 진술을 대입한 결과라는, 혹은 타당한 논증 형식을 만족하지 않는 논증은 오류를 함축한 것이라는 착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한 착각은 단순히 착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를 근시안적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학생들은 논증 평가 방식을 배우면서도 실제 논증을 글 속에 녹여낼 수 없고, 내용적으로 글을 비판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글 속에서 어떤 형식을 찾아내어 특정 기법을 적용하려 든다. 또한 형식 논리가 갖는 유용성도 베이비 로직에 대한 얄팍한 지식으로 인해 빛을 발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교수법이 각종 적성 평가 시험의 토대가 되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러한 교수법의 부작용이 형식 논리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논리학자들은 형식 논리의 각 체계가 다른 체계와 구분되면서도 그 고유한 적용 범위를 갖도록 해주는 ‘경계 조건(boundary condition)’에 민감하다.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교수법의 주축인 베이비 로직은 그러한 경계 조건들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베이비 로직은 특정 형식 절차나 논증 평가 기준을 보편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처럼 과대 포장하고 있다. 그러한 과장 포장에 동의할 정통 논리학자는 없다.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일상적 합리성과 이상화된 합리성의 관계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을 둘러싼 갈등을 진단할 것이다. 첫 번째 사례 분석은 인간의 판단이 내용 의존적임을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형식적으로 동일한 구조가 상이한 판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재구성 및 조직화가 필요하다. 그러한 재구성 및 조직화는 추상화 능력에 바탕을 둔다. 효과적인 문제 해결은 문제의 재구성 단계를 필요로 하며, 문제의 재구성 단계는 추상화 과정을 수반한다. 형식 논리의 다양한 체계는 그러한 ‘추상화 과정의 극한’에 비유될 수 있다. 즉, 그러한 체계는 ‘특정 조건 아래 내용과 무관하게 적용 가능하도록 해주는 이론화 과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형식 논리의 다양한 체계는 무조건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 특정 경계 조건 아래 고유한 적용 범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적용 범위의 경계를 명확히 할 때 형식 논리의 유용성도 빛을 발하게 된다. 일상적 합리성은 이상화된 합리성을 생성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상화된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은 일상적 합리성의 한 측면을 모방할 수 있는 유용성을 갖는다. 그러한 모방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상화된 합리성이 일상적 합리성을 완전히 모방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사례 분석은 이 점을 분명히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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