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2>
추리는 사고의 중요한 활동으로 여겨지지만, 그 둘의 관계는 최근에 와서야 경험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Rips, L.J. & Conrad, F.G., 1989). 사람들은 사고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문제 해결 과정 자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때 문제 해결을 위한 단서를 찾아내는 과정이 주로 추리 활동의 본질로 파악된다. 즉, 대상들의 분류와 관련된 개념화 과정은 추리를 하기 위한 전 단계, 추리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핵심적인 사고 활동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에 따르면, 사고는 모든 인지 활동을 종합한 것을 일컫는다. 반면에 사람들은 사고를 추리 활동을 하기 위한 능력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경우에나 추리는 사고의 중요한 활동이라는 상식이 경험적으로 뒷받침되는 셈이다.
추리와 추론의 관계는 더욱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추론은 주어진 맥락에서 결론을 이끌어 낸 과정에서 발견되는 ‘특정 사고 패턴’을 뜻한다. 연역 추론, 귀납 추론 등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 사고 활동에서 연역 따로 귀납 따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며, 연역 및 귀납과 구분되는 사고 패턴들도 있다. 추리는 이렇게 서로 구분되는 사고 패턴들이 합성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때 대부분의 결론은 추리라는 폭 넓은 사고 과정의 결과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추론과 추리라는 용어를 뒤바꿔 쓴 경우도 일관성만 지켜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추론보다는 추리를 더 폭 넓은 의미에서 사용한다는 약속 정도면 족할 것이다. 우리에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추론과 추리에서의 오류에 관한 해석 방식이다. 특히 추론 형식이나 확률 계산식에 따라 사람들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연역 추론 형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웨이슨(Wason, P.C., 1968) 등의 작업을 통하여, 그리고 조건 확률 추론(conditional probability inference)의 계산식, 곧 베이즈 규칙(Bayesian rule)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카네만과 트버스키(Kahneman, D. & Tversky, A., 1973) 등의 작업을 통하여 실험적으로 밝혀졌다. 이제 다음 질문을 던져보자.
• 사람들이 추론 형식이나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인간은 추론과 추리에서 오류를 범하게끔 타고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위 물음에 긍정하는 입장, 곧 인간이 추론과 추리에서 오류를 범하게끔 타고난다는 입장은 경험적 내용을 ‘합리적 판단을 위한 입력’ 정도로 여기는 관점에 대한 극단적 반발이다. 그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은 판단에서 경험적 내용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추론 형식이나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다. 여기서는 우선 확률 계산식에만 국한하여 인간은 추론과 추리에서 오류를 범하게끔 타고난다는 관점, 즉 인간은 본래 비합리적 동물이라는 관점을 분석할 것이다. 추론 형식과 관련하여 그 관점을 분석하는 것은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진영의 갈등을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에서 진단하는 곳에서 다룬다.
다음의 실험 사례를 살펴보자.
• 비만 남성의 성인병 발생률
우리나라 도시 A의 남성 중 성인병을 갖고 있는 확률은 0.2이다.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 중 0.7은 비만 남성이다. 성인병이 없는 남성 중 0.3은 비만 남성이다. A 도시의 비만 남성 가운데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의 확률은?
위 질문의 답은 베이즈 확률 계산식으로 구할 수 있다.
• Prob(성인병/비만)=[Prob(비만/성인병)Prob(성인병)]/[Prob(비만/성인병)Prob(성인병)+Prob(비만/정상)Prob(정상)]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르면, 사전 확률(prior probability)을 근거로 하여 사후 확률(posterior probability)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여기서 사전 확률은 ‘Prob(성인병)’, 그리고 사후 확률은 ‘Prob(성인병/비만)’에 해당한다. 베이즈 확률 계산식은 한때 믿음의 합리적 수정 과정이 따라야 할 법칙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어긋난 방식의 판단은 비합리적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위 질문에 대해 다수가, 심지어 전문가도 오답을 낸다는 실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은 선천적으로 오판을 범할 수밖에 없다는 인지 편향론이 득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만 남성의 성인병 발생률 문제에 대다수가 오답을 낸다는 사실을 가지고 인지 편향론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은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베이즈 확률 계산식이 믿음의 합리적 수정 과정을 나타낸다는 철학적 주장을 살펴보자. 이 주장에는 빈도수와 같은 것도 단일 사건 발생에 대한 주관적 확률, 곧 어떤 증거를 바탕으로 사건이 발생할지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확률로 해석 가능하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러한 관점은 현대 수학자 다수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수학자는 베이즈 확률 계산식을 문제 해결에 효과적인 도구로 여긴다. 그러한 도구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에게 각 확률값은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해당 확률값이 단일 사건 발생에 관한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는지, 이상화된 조건 아래 누구나 계산 가능한 등가 확률, 실례로 마찰 등을 무시하는 경우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 1/2과 같은 것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사건 발생 빈도수를 나타내는지가 피실험자에게 명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특정 확률값을 사용한 실험은 문제 해결 영역에 적합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Brunswick, E., 1955). 이러한 까닭에, 비만 남성의 성인병 문제에 함축된 확률값이 개체군의 미만 및 성인병 발생 빈도에 관한 정보를 피실험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유사한 사건의 발생 회수, 즉 빈도수를 단일 사건의 발생 정도에 대한 기대치인 0.2로 표현한 경우, 혹은 정규화(normalization) 방법, 즉 빈도수를 일률적으로 비교하기 위한 기준에 맞춰진 20%로 표한한 경우, 피실험자들 다수는 오판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A 도시에서 비만 남성이 발견되는 실제 회수인 ‘자연빈도수(natural frequency)’를 가지고 ‘비만 남성의 성인병 발생률 문제’를 설계해야 한다. 이때 해당 질문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비만 남성의 성인병 발생률
우리나라 도시 A의 남성 100명당 성인병을 갖고 있는 사람은 20명이다. 성인병을 갖고 있는 그 20명 중 14명은 비만 남성이다. 성인병이 없는 남성 80명 중 24명이 비만 남성이다. A 도시의 비만 남성 가운데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의 비율은?
위 문제를 시각적으로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 도식을 보면, A 도시의 비만 남성의 수는 14명에 24명을 더한 38명이다. 이 38명 중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의 수는 14명이다. 따라서 a를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 중 비만 남성의 수’, b를 ‘성인병을 갖고 있지 않는 남성 중 비만 남성의 수’라 할 때 앞에서 살펴본 복잡한 베이즈 계산식은 다음과 같이 단순화된다.
• A 도시의 비만 남성 가운데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의 비율=a/(a+b)=14/(14+24)=14/38
비만 남성 가운데 성인병을 갖고 있는 남성의 비율을 확률값로 나타내면, 약 0.36을 얻을 수 있다. 비만 남성의 성인병 발생률 문제를 이렇게 자연빈도수로 바꿔 풀어주면, 베이즈 확률 계산식을 모르는 대다수 피실험자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정답을 맞힐 수 있다.
사람들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실험적 사실은 결코 인지 편향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인간의 인지가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특히 경험적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도록 재구성되는 경우, 사람들이 오판을 하는 빈도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보는 관점을 옹호할 수 없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오류 및 오판을 범하도록 타고난 동물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 유사한 오류 및 오판을 피하려는 시도 속에 활성화된다는 평범한 사실조차 의심해야 한다.
베이즈 확률 계산식과 같은 형식을 합리성의 본질로 여기는 관점은 더 이상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약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교수 설계법에 도사리고 있는 그러한 관점은 부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점의 대안으로 인간은 오류 및 오판을 범하도록 타고난 존재라는 관점을 이끌어낼 수 없다. 베이비 로직을 전면에 내세우는 약한 의미의 교수 설계법을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일부 실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의 비합리적 측면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가 갖는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 일부가 지나치게 오류 및 오판을 강조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 일반에 전제된 ‘인간의 합리적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비판적 사고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실험적 사실에 의거하여 주장해야 하는 것은 다음이다.
• 문제 해결 과정에서 활성화되는 인간의 사고 활동은 경험적 내용과 무관한 형식 절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추리와 판단은 문제의 맥락을 구성하는 내용에 의존적이다.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는 것을 문제 해결 능력으로 이해할 때 합리적 능력은 문제의 내용적 맥락과 무관한 어떤 형식 절차와 같은 것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러한 계산식에 담긴 ‘이상화된 합리성(idealized rationality)’ 관점에 사고가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사실을 빌미로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 옹호자들이 인간을 비합리적 동물로 몰아세우는 주장은 정작 열린 태도에 필요한 ‘자기 성찰’을 결여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강한 의미의 비판적 사고가 지향하는 목적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베이즈 확률 계산식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는 실험적 사실을 근거로 이상화된 합리성 관점을 포기할 때 이것이 문제 해결 과정에 내재적인 합리적 능력의 포기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여기서 정작 중요한 물음은 일상생활에서 기능하는 일상적 합리성과 이상화된 합리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일상적 문제 해결 과정에서 베이즈 확률 계산식과 같은 것이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베이즈 계산식의 무용지물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인간의 생존에 적합하도록 인공 환경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은 추상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분석적 도구(analytical tool)’를 필요로 한다. 그 누구도 제도를 포함한 인공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베이즈 공식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의 방식에 적합하도록 인공 환경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은 고차원의 문제 해결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진정한 비판적 사고 교육의 목적은 그러한 고차원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현대 문명의 부작용을 문제삼아 원시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다음이다.
• 경험적 내용에 의존적인 실제 추리 및 판단과 맞물린 능력을 ‘일상적 합리성’이라 하자. 베이즈 확률 계산식 등의 형식 절차에 담긴 ‘이상화된 합리성’은 ‘일상적 합리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가?
형식 절차 해석의 측면에서 약한 의미와 강한 의미의 두 비판적 사고 진영의 갈등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이 물음을 다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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