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무종교인이 알아야 하는 것 1. 창조 과학의 역사적 맹점

착한왕 이상하 2010. 3. 23. 06:33

무종교인이 알아야 하는 것

 

 

(1) 창조 과학의 역사적 맹점

창조 과학의 역사적 맹점을 지적하기 위해 창조 과학이 과학일 수 없는 이유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 창조 과학 진영이 자신들의 지적 뿌리로 자연 신학 전통을 강조하는 것조차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에 대한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자연 신학 전통의 ‘지적 설계자’ 개념은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여러 신 개념 중 하나일 뿐이다.

• 오로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이라고 강조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다양한 신 개념을 부정하는 역사적 무지를 보여준다.

• 더욱이 창조 과학 진영의 주장과 달리, 자연 신학 전통은 창조 과학에 대한 옹호론에 사용될 수 없다.                                                                     

• 따라서 창조 과학 진영은 기독교 역사에 무지한 광신도 무리일 뿐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창조 과학의 핵심 논제들은 자연 신학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자연 신학 옹호자들이 과학의 상부에 신학을 위치시켰을지라도, 그들은 설명 방식과 영역에서 과학과 신학의 구분을 존중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이 그 구분을 존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를 참 거짓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신성(神聖)을 반영하고 있는 은유 체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의 기록을 기준으로 그 기록에 부합하는 발견만 인정하고, 그 기록에 반하는 발견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로 세상을 획일화하려는 ‘극단적 복음주의’에 물든 광신도 집단에 불과하다. 그러한 집단과 자연 신학 전통을 비교하는 것은 보일이나 페일리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다.

 

그나마 자연 신학과 창조 과학 모두에 공통된 것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이라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며, 또한 독단적이다. 과학적 설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한 세계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신 존재 가정을 끌어 들이는 것을 독단적이라 할 이유는 없다. 오로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정당하다는 입장은 독단적이다. 적어도 자연 신학 전통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 특정 과학적 발견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자연 신학 전통은 창조 과학 진영의 역사적 뿌리가 될 수 없다.

 

오로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으로 여기는 독단은 창조 과학 진영과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다. 이 작업에서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으로 지칭된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은 창조 과학 진영과 마찬가지로 ‘지적 설계자 가설’도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에도 창조 과학 진영은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보다 더욱 독단적이다.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은 적어도 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핑계삼아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반면에 창조 과학 진영은 진화를 지지해주는 증거들마저 성서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정하는 세력이다.

 

창조 과학 진영은 자연 선택 가설뿐만 아니라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 우주론에 함축된 우주의 나이가 창세기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반한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이유이다. 그러나 그 전통적 해석도 알고 보면 창세기를 은유 체계로 보는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자연의 역사는 불가능하거나 인류의 역사에 비해 사소한 것이라는 관점은 성서의 기록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관점은 단지 자연의 역사가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이미 살펴봤듯이,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은 ‘태초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창조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그 창조주가 반드시 기독교의 신 개념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초를 가정하는 우주론은 기독교의 창조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 기독교의 창조 개념과 양립 불가능한 우주론은 ‘빅뱅 가설에 근거한 우주론’이 아닌 ‘태초를 가정하지 않는 무한 우주론’이다. 두 우주론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현대 과학에 의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