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자연 신학 2. 다윈 진화론과의 양립 불가능성

착한왕 이상하 2010. 3. 10. 06:25

(2) 다윈 진화론과의 양립 불가능성

페일리의 자연 신학과 다윈의 진화론의 양립 불가능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한 측면은 과학과 신학의 관계이며, 그 다른 측면은 자연의 역사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이다.

 

페일리는 진화론이 출현하기 이전 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전통적 지적 설계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에, 보일처럼 과학을 신학의 하부에 위치시켰다. 즉, 과학적 발견은 자연에 깃든 신의 섭리를 밝혀주는 수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페일리는 지적 설계자 가설 자체가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검증 혹은 반증 불가능한 신 존재 가정과 과학적 가설을 구분하는 한, 과학과 신학의 관계가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을 만족하는 과학적 가설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과학적 가설도 설명 영역에서 한계를 갖게 마련이다. 세계의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목적으로 그러한 한계를 신 존재 가정으로 채워 보려는 시도 자체가 과학에 대한 공격 행위는 아니다. 다만, 신 존재 가정도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과학을 파괴하려는 짓이다. 과학자가 세계의 완벽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신학자의 길로 들어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과학자가 반드시 존중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생활양식’이다.

 

과학적 생활양식이 다양한 신 개념에 열려 있는 까닭에, 즉 다양한 신 개념에 의해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는 까닭에, 과학과 신학의 조화로운 공조 관계는 ‘신 개념의 다양성’을 전제한다. 자연 신학 전통은 오로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과학과 공조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점에서 페일리의 자연 신학은 독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과학과 공조할 수 있다면, 우연을 과학적 설명에 허락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페일리의 이해 방식이 다윈의 진화론과 양립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첫 원리에서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 방식은 기계론의 형성기(形成機)에 유행했다. ‘확실성 추구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그 논증 방식은 신 존재에 대한 페일리의 논증 방식, 즉 ‘유비에 근거한 축적 논증 방식’이 아니다. 이는 페일리가 ‘왜’라는 물음을 과학적 설명 영역에서 잘라낸 ‘전통적 기계론’ 옹호자는 아님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기계론에 함축된 ‘전통적 지적 설계론’ 관점에서 일탈한 인물은 아니었다.

 

• 우연적으로 발생한 사건, 즉 기회적인 것은 생존에 적합한 유기체의 형태가 갖는 기능을 설명하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페일리의 논증에 깔려 있는 위의 관점을 따를 때 유기체의 형태가 갖는 기능을 설명하는 데 우연적인 것은 개입할 수 없게 된다. 페일리에게 기능이 보여주는 목적은 신의 섭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인공물의 기능에 유기체의 기능을 유비하는 경우, 유기체의 형태는 특정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 변형 및 분화 과정이 페일리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때 자연의 역사는 신에 의해 설계된 ‘자연의 사닥다리’를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 첫째, 신이 오차 없이 움직이는 기계처럼 자연을 설계했다는 관점은 신학 전통에서 단지 한 두 세기 정도만 지배했을 뿐이다. 전통적인 기계론은 생물 현상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 18세기 중엽 이후 약화된다. 페일리의 자연 신학은 다양한 종들이 공통 조상에서 분화되었을 가능성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종 변형 및 분화 과정은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형태 및 기능이 복잡할수록 더욱 진화한 동물이다. 진화는 복잡성 증가의 경향을 보여준다. 복잡성 증가의 경향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며, 인간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신의 섭리를 찾을 수 있다.

 

• 둘째, 페일리의 지적 설계 개념에 따르면, 물리계를 바탕으로 한 생물계의 진화 과정은 완벽함에 다가가도록 사전에 계획된 것이다. 복잡한 형태일수록 더욱 완벽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적 설계’를 은유하는 페일리의 ‘자연의 사닥다리’가 전개되는 과정이 곧 진화인 것이다. 자연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상승적 진화’가 ‘도약적 과정’인지 ‘점진적 과정’인지에 대해서는 자연 신학 전통에서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페일리는 생물계의 진화를 위해 우주가 안정화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페일리는 다윈처럼 진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진화가 자연의 사닥다리의 전개 과정이라는 위 해석에 따를 때 다윈의 진화론과 페일리의 자연 신학은 양립 불가능하다. 다윈의 진화론에 신의 목적과 같은 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 아리나, 우연에 의한 기회적인 사건이 진화의 설명에서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페일리의 자연 신학과 다윈의 진화론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하여, 그 둘이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은 아니다. 페일리가 살았던 시대와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탐사했던 시대는 다르다. 다윈의 시대에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도 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페일리의 입장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인물들이 늘어났고, 다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페일리의 자연 신학과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에 맞서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페일리는 이러한 독단적 주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적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과학자가 페일리와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페일리는 적어도 지적 설계자 가설이 검증 혹은 반증 가능한 과학적 가설의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적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과학자는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 즉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과 대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적 설계자 가설도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과학자, 특히 분자 생물학자는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의 대화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 세력의 입장에 따르면, 자연 선택 가설은 생물학의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수긍할 수 있는 생물학자들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