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자연 신학 1. 페일리의 논증 방식

착한왕 이상하 2010. 3. 5. 00:28

자연 신학

 

(1) 페일리의 논증 방식

페일리(W. Paley)는 19세기 자연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연 신학은 자연 속에서 신의 섭리를 찾아보려는 기독교의 전통에 서있다. 자연 신학 전통에서 신 존재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법’으로 여겨질 수 없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법’에 따르면, 신 존재에 대한 의심은 논리적 모순이나 터무니없는 결과로 귀결된다. 따라서 신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연 신학의 대부로 불리는 17세기의 보일은 과학적 발견들 자체가 신 존재를 반영해준다고 여겼다. 자연 신학의 논증은 과학을 통해 신의 섭리가 자연에 깃들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자연에 깃든 신의 섭리를 옹호하는 방식은 시기별 과학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페일리의 자연 신학을 이해하려면, 신 존재에 대한 그의 논증 방식을 알아야 한다.

 

페일리는 독창적 사상가가 아니었다. 또 그는 누구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것이 신 개념이라고 주장할 만큼 대범한 인물도 아니었다. 페일리를 19세기 자연 신학의 대부로 만든 것은 그의 논증적 글쓰기 능력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페일리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 무렵, 유럽 전역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들끓었다. 프랑스 혁명을 이끈 세력 중 상당수는 ‘철학적 무신론’으로 무장한 인물들이었다. 또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도 정교 분리의 원칙에 호감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영국의 집권 세력에게 정치적 위협이었다면, 페일리처럼 신 존재를 확신하는 이들에게는 사상적 도전이었다. 페일리가 ?자연 신학?을 저술하게 된 동기도 여기에 있다.

 

페일리에게 신 존재는 선험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공리에 근거해 정리를 이끌어내는 논증 방식의 결과도 아니었다. 보일이 유비적 문체를 미개한 민족의 상징으로 간주한 반면, 페일리의 논증 방식은 유비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식이었다. 보일에게 유비에 근거한 추론은 확실성을 결여한 조잡한 것이었다면, 페일리에게는 신 존재에 대한 의심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강무기였다. 무엇이 페일리로 하여금 유비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페일리는 신 존재가 연역적 증명에 근거한 합리적 정당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현실세계 속의 실제 인간의 판단은 근본적으로 개연적이다. 또한 논증을 하기 위한 대전제 혹은 첫 원리는 논증의 결과가 아니다. 그 누구도 확실한 결론을 보장해주는 첫 원리를 논증을 통해 발견할 수 없다. 설령 그러한 원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합의 가능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가와 윤리학자로서의 페일리의 면모는 그가 인생 전체에 걸쳐 법률 논증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페일리는 논증에서 설득을 배제시키지 않는 키케로의 논증 방식에 큰 감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판사는 하나의 증거가 아닌 여러 증거들을 조합하여 범인을 가려내고, 설득력을 갖춘 논변을 펼친다. 판사는 용의자에 대한 의심을 부자연스럽게 만들도록 증거들을 조합한다. 어떤 은유나 관점 아래 다양한 증거들을 통합하는 인지 활동은 유비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 어떤 은유나 관점 아래 하나로 묶인 증거들의 수가 많다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의 증거가 무효화되어도. 용의자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이것이 페일리가 ‘축적논증(cumulative argument)’라고 부른 것의 핵심이다. 페일리는 또한 18세기에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사회 통계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100% 확실한 하나의 통계치에 근거해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정책 결정은 여러 상이한 통계치에 근거해 그럴듯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증거를 ‘끊어지기 쉬운 실’에 유비시켜보자. 하나의 실은 끊어지기 쉽다. 어떤 주장을 하기에는 증거가 미약하다는 것은 그러한 실에 유비된다. 그런데 그러한 실들을 엮어 밧줄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일부 실들이 끊어지더라도, 밧줄은 그대로 유지된다. 밧줄에 유비된 페일리의 신 존재에 대한 논증은 매우 단순하다. 황무지를 걷다가 돌이 발에 채인 것은 우연적인 사건이다. 황무지를 걷다가 시계가 발에 채인 것도 우연적인 사건이다. 시계가 그렇게 발견된 것은 우연적일지라도, 시계 자체는 아니다. 시계의 복잡한 구성 방식 속에 드러나는 정교함은 시계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유기체의 형태에서 발견되는 정교함을 시계에 유비시킬 때, 유기체의 형태도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페일리의 ?자연 신학?을 독특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시계 논증’들이 해부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페일리의 논증들은 3층의 구조를 갖고 있다. 1층은 해부학을 중심으로 의학과 자연사를, 2층은 천문학 일반을, 그리고 3층은 1층과 2층의 논증들을 바탕으로 신의 자비와 섭리를 논하고 있다. 1층과 2층의 유비 논증들은 3층의 결론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과학적 증거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각 증거 하나하나는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존재를 주장하기에는 미약할 수 있다. 하지만 증거들의 조합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3층 건물 전체가 무너지지는 일은 없다.

 

현대 과학으로 무장한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과 달리, 페일리는 지적 설계자를 가정하는 것이 과학적 가설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시계 논증을 매개로 하여 지적 설계자 가설을 이끌어냈을 뿐이다. 페일리가 자연에 우연을 허락한 신 개념이나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과 관련된 신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맞다. 하지만 그의 시계 논증은 어디까지나 신학적 논증이다. 과학적 발견에 필연적인 것과 관련된 어떤 매개 개념을 개입시켜 신 존재 가정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신 존재에 대한 보일과 페일리의 논증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자연 신학 전통은 창조 과학 진영의 지적 뿌리가 될 수 없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페일리의 자연 신학이 다윈의 진화론과 양립 불가능한 이유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