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창조 과학의 맹점

무종교인이 알아야 하는 것 2. 무종교인의 딜레마

착한왕 이상하 2010. 3. 24. 20:59

(2) 무종교인의 딜레마

어느 세력이나 자신들이 믿는 관점이나 이념을 옹호하려 든다. 만약 그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다른 관점이나 이념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독단적이다. 자연 신학 전통,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 그리고 창조 과학 진영 모두는 독단적 측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독단적 측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무종교인은 알아야 한다. 그 정도의 차이를 대소 관계를 통해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 자연 신학 전통 <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 < 창조 과학 진영

 

자연 신학 전통보다는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이 독단적이며,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보다는 창조 과학 진영이 독단적이다. 가장 독단적인 창조 과학 진영이야말로 기독교의 건전한 사회적 기능을 가로막는 세력이다. 이를 알기 위해 무종교인이 종교를 과학의 적으로 몰아세우거나, 과학의 설명 한계를 빌미로 특정 세계 이해를 미화하는 선동에 유혹당할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이유는 독단적 측면에 관한 위의 대소 관계를 해석해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해진다.

 

• 자연 신학 전통,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 창조 과학 진영 모두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이며, 또한 기독교의 오랜 역사에서 나타난 신 개념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개념만이 기독교의 창조주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이 사회에 부각되면 될수록, 기독교의 실제 역사는 왜곡된다. 그 결과, 기독교는 신 개념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지 않은 독단적 종교로 사회에 비춰지기 쉽다. 존재 사슬의 도식에 대한 해석이 신 개념의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마저도 이 땅의 대다수 기독교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은 자연 선택 가설의 설명 한계를 빌미로 지적 설계자 가설도 생물학의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불거진 배경에는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의 책임도 크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자연 선택 가설을 생물학의 유일한 통합 원리로 과대 포장한다. 이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이 무신론을 증명한 것처럼 주장한다. 이때 ‘과학의 자연주의’는 반드시 무신론이나 유물론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은 자연 선택 가설의 한계를 역이용하여 과학이 그러한 자연주의에 근거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과학의 자연주의’는 어떤 철학적 존재론을 전제하지 않는 까닭에 ‘방법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이미 논했다. 과학의 자연주의는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 초자연적인 것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태도를 뜻할 뿐이다. 이는 그러한 연결성 추구에 의해 제한된 과학적 생활양식이 다양한 세계 이해에 대해 열려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만약 과학의 자연주의가 무신론이나 유물론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라면, 과학은 그러한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노예로 전락한다. 만약 과학이 유신론을 토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과학은 그러한 철학적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에 불과해진다.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은 과학에 고유한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왜곡함으로써 ‘과학의 이념화’ 혹은 ‘과학의 종교화’를 꾀한 세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지적 설계자 가설로 무장한 세력’, 즉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은 과학에 종교적 이념을 끌어들임으로써 ‘종교의 과학화’를 꾀한 세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과학적 발견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적 가설은 특정 조건 아래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의 연결성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 어떤 과학적 가설도 그 설명 영역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는 가설이 살아남기 위한 ‘적용 영역의 경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과학적 지식은 신뢰할만한 것이며, 반복 사용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한계에 어떤 형이상학적 입장을 보충시켜 완벽한 세계 이해에 도달해 보려는 시도는 과학 공동체의 의무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는 ‘개인의 선택 사항’일 뿐이다. 다만, 그러한 시도를 하는 이가 자신이 도달한 세계 이해를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과학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과학적 생활양식을 파괴시키는 짓이다.

 

• 창조 과학 진영은 다양한 신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큰 강에 비유 가능한 기독교의 역사를 단선적으로만 해석하도록 좁혀버린다. 그들은 더 나아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는 것만이 참다운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단적인 태도의 결과는 성서의 기록에 반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들거나, 공격하는 만행으로 나타난다.

 

창조 과학 진영과 이들을 뒷받침하는 개신교의 일부 세력은 성서의 기록으로 세상을 획일화하려는 ‘극단적 복음주의’에 물든 집단에 불과하다. 그러한 집단이 ‘갈등 중재’라는 종교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창조 과학 진영이야말로 기독교의 건전한 사회적 기능을 가로막는 세력이다. 창조 과학 진영과 이들을 뒷받침하는 세력이 ‘이기심의 완전한 결여’로 가정된 ‘신의 사랑’을 설파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종교 교리의 진위 여부에 무관심한 무종교인이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무종교인이 다수라는 점에서는 이 땅은 세속화된 사회이다. 하지만 이 땅은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세속화 여정을 거치지 않은 곳이다. 만약 이 땅에서 세속화 운동과 같은 것이 일어났더라면, 이 땅을 ‘백색 도덕 제국주의’가 토착화된 곳으로 규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 우월주의’, ‘기독교 중심사관’, ‘문화적 간섭주의’로 대표되는 백색 도덕 제국주의의 토착화에 대한 증거는 사방에서 발견된다. 그러한 증거로 재단의 입맛에 따른 의무적인 종교 교육, 순수한 봉사 활동으로 가장한 대외 선교 활동, 재단의 종파에 따른 교직원의 임용, 그리고 창조 과학관의 건립에 사활을 건 대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무종교인은 교회 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세속화의 참 뜻’을 망각하기 쉽다. ‘세속화’는 특정 종교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회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 말살론과 같은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역사적 지식은 이 땅의 개신교 세력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게 해준다. 이때 무종교인은 다음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 첫째, 자연 신학 전통의 많은 인물들은 신 개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독단적이었지만, 적어도 교회 세력이 사회에 군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이는 기독교도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속화 여정에 기독교인들의 기여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물론 이때 ‘세속화 여정’은 19세기 중엽 이후의 유럽 사회에 국한된 것이다.

 

• 둘째, 자연 선택 가설로 무장한 세력과 현대적 지적 설계론 옹호 세력의 갈등을 ‘과학 대 종교의 갈등’으로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 갈등은 과학을 빌미로 각자의 관점만이 옳다는 독단 대 독단의 충돌일 뿐이기 때문이다.

 

• 셋째, 창조 과학 진영은 성서의 기록으로 세상을 획일화하려는 집단이다. 그들은 가치 체계가 다원화되고 구조적으로 분화된 사회를 과거의 상태로 되돌려 보려는 집단이다. 가치 체계의 다원화와 계층의 구조적 분화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이다. 따라서 창조 과학 진영은 세속화된 사회의 적이다. 세속화된 사회의 실질적 다수가 무종교인들인 까닭에, 창조 과학 진영은 무종교인들의 적이기도 하다.

 

무종교인이 세속화된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 때 무종교인들은 다양한 계층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또 세속화된 사회의 무종교인들은 특정 종교 세력과 달리 하나의 가치 체계나 이념 아래 모여 강한 결속력도 과시할 수 없다. 사회에 군림했던 교회가 세속화 여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야만 했던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구한말 이후 기존의 질서 체제가 붕괴되고, 서구의 정치 체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 분화된 사회에 대한 적응 기간을 갖지 못한 이 땅의 교회 세력은 극단적 복음주의로 세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무종교인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딜레마가 있다.

 

• 이 땅은 다수가 무종교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구조적으로 분화된 사회라는 점에서 분명히 세속화된 사회이다. 하지만 무종교인의 의견이 반영될 통로가 가로막힌 사회이다.

 

위 딜레마를 ‘무종교인의 딜레마’로 규정하자.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무종교인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위한 이 땅의 시대적 과업으로 여겨져야 한다. ‘종교 시장(religious market)’을 다루는 곳에서 이에 대한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