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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진스키, 보수의 의미

착한왕 이상하 2010. 4. 11. 16:46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스탈린의 비밀 경찰 조직은 카틴 지역에서 2만 명 이상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다. 그들 다수는 과학자, 의사, 역사학자, 정치가들이었다. 즉, 카틴 학살은 폴란드 엘리트 계층을 말살함으로써 러시아가 장기적으로 폴란드를 지배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최근 폴란드 대통령 카진스키가 카틴을 방문하기 위해 탄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사망했다. 국외 보도, 특히 미국 보도에 주로 의존하는 국내 신문 방송은 카진스키는 '우파 보수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크게 부각시켰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 방식에 의존하는 측면이 크다. 하지만 '보수적', '진보적', '개혁적'이라는 수식어를 어느 정치가 앞에 붙이는 경우는 그 정치가가 속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좌우된다. 이번 사건을 통해 폴란드 보수 진영과 개한민국 보수 진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명확히 하려면, 약간의 역사적 지식을 알아야 한다.

 

첫째, 유럽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헌법에 명시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특정 종파를 도덕적 이념으로 무장한 정당들이 많다. 카진스키가 개입한 정당인 '법과 정의당'도 폴란드인 다수가 믿는 '가톨릭'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고 종교가 폴란드 사회를 지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유럽 각국의 경우, 종교 세력에게도 공식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대신 종교도 사회적 제어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둘째, 종교를 표방한 유럽 각국의 정당들이 출현하게 된 이유는 좌우 대립 상황에서 찾아야 한다. 그 대립 양상은 유럽 각국이 처한 시대적 맥락에 의존적이다. 폴란드의 경우,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민주주의의가 기득권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면,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로 귀결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체제 유지 및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정치 이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약점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시각을 민주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들에게서 얻기 힘들며, 역으로 공산주의의 약점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시각을 공산주의의 열렬한  옹호자들에게서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위 두 가지를 근거로 카진스키의 정치적 성향을 분석해 보자.

 

폴란드 공산 체제는 소련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비웬사 등의 자유노조 진영이 민중의 호응을 얻음으로써 붕괴되었다. 굳이 좌우 개념을 자유노조 진영에 적용한다면, 자유노조 진영은 우파에 가깝다. 카진스키는 바웬사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바웬사가 정권을 잡은 후 카진스키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한다. 바웬사가 권력으 잃은 후, 바웬사는 카진스키가 실제로는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의 스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 체제가 붕괴했다고 하여,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이 사장되는 것은 아니다. 바웬사는 정권을 잡은 후 폴란드를 서방 자본주의 모델에 따라 개혁시키길 원했다. 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정치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으며, 바웬사를 권좌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폴란드의 이러한 상황은 동부권의 주변 국가들에서도 발견된다. 여가수의 노출 정도를 놓고도 좌우의 이념 대립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종교를 표방한 정당은 이러한 대립을 전통에 호소해 극복할 목적으로 탄생했다. 카진스키가 깊숙히 개입한 정당인 '법과 정의당'이 그렇다. 법과 정의당 외에도 종교를 표방한 여러 정당들이 폴란드에 있다.

 

카진스키의 법과 정의당은 다수의 가톨릭 신자를 끌어들여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2005년 이후 다시 시민 연단의 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유연대 노선 세력 집권 -> 사회주의 옹호 세력 집권 -> 카진스키의 보수 세력인 법과 정의당 집권 -> 신자유주의 옹호 세력인 시민 연단 집권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런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카진스키의 보수 진영은 폴란드의 전통적 가치 체계를 토대로 하여 자유 민주주의의 장점을 흡수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카진스키는 법학자로서 사형제를 부활시키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논변을 펼쳤다. 이는 미국인들의 눈에는 전형적인 '우파 보수'로 비춰지게 된다.

 

그러나 폴란드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카진스키의 보수 진영은 대중 정당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노선이기도 하다. 여기서 개한민국의 보수 진영과는 큰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개한민국의 문제는 보수 진영이 사실은 기득권의 논리에 따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전체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보수 세력의 행동 방식은 기득권 유지라는 목적을 갖고 있다. 보수가 민주주의의 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가 기득권의 논리에 따라 구성되고 움직일 때 민주주의의 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 그렇다고 현 개한민국의 진보 세력이 민주주의의 진화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이 '잡글'의 주제에 부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