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단칭 진술의 문제

착한왕 이상하 2010. 4. 14. 01:43

단칭 진술의 문제

 

 

1.

과거 전통의 논리학, 곧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르네상스 시절까지 서양 지성사를 지배했던 논리학은 ‘항논리’(term logic)로 대표되곤 한다. 항논리에서 의미의 논리적 단위는 ‘보편적인 개념’(universal concept)이다. ‘개’, ‘사람’, ‘물고기’와 같은 개념들은 몸무게 몇 킬로그램의 구체적인 개체가 아니라 개들, 사람들, 물고기들을 나타낸다. 범주 삼단논법은 그러한 개념들이 나타내는 류(class)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항논리의 일종이며, 정언명제라고 불리는 것은 그러한 관계를 함축한 내용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진술 및 술어논리로 대표되는 현대 논리학에서 의미의 논리적 단위는 진술이다. 전제에서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연역 논증의 논리적 형태(logical form), 곧 추론형식이라는 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논리학을 과거보다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특히 단칭 진술(singular statement)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과거 전통의 논리학과 현대 논리학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이를 알기 위해 일상적인 논증 하나를 분석해보자.

 

[착한왕 논증]

1. 착한왕은 대충 생각한다.

2. 착한왕은 현명하다.

3. 착한왕은 대충 생각하지만 현명하다.

3'. 착한왕은 대충 생각하고 현명하다.

4. 대충 생각하는 어떤 이는 현명하다.

 

논증에서 표현들은 일관성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1에 등장한 ‘착한왕’과 2에 등장한 ‘착한왕’은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에서 1과 2의 ‘착한왕’은 ‘....착한왕이다’라는 술어로 표현 가능하지만, 담론을 위해 주어진 개체(individual)로 가정해도 무방하다. 그 개체가 정말 몸무게 얼마의 착한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논증의 결론에 대한 전제와 관련된 정보를 만족하는 개체라는 암시만 있으면 된다.

 

[착한왕 논증]에서 3과 3'을 논리적 동치 관계를 맺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착한왕 논증]이 연역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쉽게 보일 수 있다. 1과 2를 단칭 진술로 취급할 때 해당 두 술어인 ‘...대충 생각한다’와 ‘...현명하다’를 각각 U(x), W(x)로 나타내자. 변수 ‘x’에 ‘착한왕’을 집어넣으면, 1과 2의 단칭 진술이 얻어진다. 이 경우, 착한왕은 둘 술어 U(x), W(x)를 만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술어에 함축된 것이 개념인지, 아니면 속성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인 문제이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를 다룰 필요는 없다. 이제 [착한왕 논증]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로 푼 방식]

1. U(착한왕)

2. W(착한왕)

3'. U(착한왕)∧W(착한왕) (1과 2의 연접)

4. ∃x(U(x)W(x)) (3에 존재상수 도입을 적용)

 

위 추론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칭 진술을 전제로 갖는 [착한왕 논증]은 연역적으로 타당한 것이며, 그 타당성은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쉽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과거 전통의 논리학에 대해서는 해당하지 않는다.

 

 

 

2.

범주 삼단논법에서 정언명제들의 항은 보편적 개념을 나타낸다. 이로 인해 과거 전통의 논리학이 갖는 실용적 한계는 중세 유명론자 오캄(William of Occam)에 의해 이미 지적된바 있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범주 삼단논법을 가지고 [착한왕 논증]을 표현하는 경우, 개체로서 가정된 착한왕은 ‘착한왕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만족하는 단일류(singleton), 즉 그 개념을 만족하는 유일한 대상으로 구성된 모임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때 [착한왕 논증]은 다음과 같이 표현 가능하다.

 

[범주 삼단논법 1]

1. 모든 ‘착한왕적인 것’은 ‘대충 생각하는 사람’이다.

2. 모든 ‘착한왕적인 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3. 대충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범주 삼단논법 1]은 연역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타당한 논증 형식은 다음과 같다,

 

[범주 삼단논법 2]

1. 모든 ‘착한왕적인 것’은 ‘대충 생각하는 사람’이다.

2. 어떤 ‘착한왕적인 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3. 대충 생각하는 어떤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위 두 논증을 범주 삼단논법의 논증 형식을 빌려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범주 삼단논법 1의 논증 형식]

모든 M은 S이다.

모든 M은 P이다.

어떤 S는 P이다.

 

[범주 삼단논법 2의 논증 형식]

모든 M은 S이다.

어떤 M은 P이다.

어떤 S는 P다.

 

위 두 논증 형식 중에서 단지 [범주 삼단논법 2]의 논증 형식만이 타당하다. 위 두 논증 형식은 벤 다이어그램을 사용하여 그 타당성을 따져볼 수 있는 것들이다. [착한왕 논증]을 [범주 삼단논법 2의 논증 형식]을 빌려 해석하고 싶어도, 범주 삼단논법은 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단칭 진술, 즉 주어를 차지하는 개념이 단일류를 갖는 진술을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범주 삼단논법 자체 내에서는 결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 문제가 범주 삼단논법에 국한하는 경우 ‘논리에 외적인 문제’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범주 삼단논법을 구성하는 이론은 단칭 진술이 개입된 논증에 적합한 형식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지 않는다.

 

범주 삼단논법과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 중 무엇이 일상적 논증을 더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과거 전통의 논리학을 사랑하는 모임’과 ‘현대 논리학을 사랑하는 모임’ 사이에 논쟁이 생길 때 자주 던져지는 것 중 하나이다. 다양한 종류의 진술들을 다루기에는 과거 전통의 논리학이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3.

형식 구문론(formal syntax)의 관점에 국한할 때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는 과거 전통의 논리학보다 훨씬 풍부하다. 또한 논리학을 공부한 사람은 범주 삼단논법의 ‘타당한 형식(valid forms)’ 중 일부는 ‘실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는 범주 삼단논법만 가지고는 가상의 존재를 도입하여 특정 맥락을 구성할 수 없음을 뜻한다. 존재 도입과 관련된 범주 삼단논법의 한계는 현대 술어논리에서는 극복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대 논리학이 과거 전통의 논리학보다 다루는 진술의 종류가 많고 존재 도입의 문제를 극복하였다고 하여, 현대 논리학이 과거 전통의 논리학보다 우월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긍정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

 

A1. 어떤 내용을 가진 실제 논증이 타당하다면, 그것에서 하나의 ‘타당한 논증 형식’이 발견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역도 성립한다. 즉, 타당한 논증에는 항상 어떤 올바른 논증 형식이 담겨 있다.

 

A1을 받아들이면, 다음도 받아들여야 한다.

 

A2. 연역적으로 타당한 형식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 논증이 내용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타당하다고 여겨진 그 논증 형식은 실제로는 잘못된 것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A1과 A2의 관점을 옹호하는 이는 가급적 논증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형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체계가 그렇지 못한 체계보다 우월하다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하나의 보기를 보자.

 

[유니콘 논증]

모든 유니콘은 말이다.

어떤 유니콘은 날 수 있는 동물이다.

어떤 말은 날 수 있는 동물이다.

 

유니콘의 존재가 가정되지 않는다면, 이 논증의 결론은 거짓이며 타당하지 않다. 다음 벤 다이어그램을 분석해보자.

 

 

 

 

위 벤 다이어그램에 따른다면, [유니콘 논증]은 연역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X’로 표시된 어떤 것, 곧 말에 속하는 유니콘이 존재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유니콘의 존재가 도입되지 않는다면, [유니콘 논증]은 타당한 범주 삼단논법이 지켜야 할 조건들을 위반하지 않았음에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물론 유니콘의 존재를 가정할 수 있으나,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범주 삼단논법 자체 내에서는 보장되지 않는다. 즉,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범주 삼단논법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이는 항논리를 대표하는 범주삼단논법에서 ‘존재 도입의 문제’는 ‘논리에 외적인 문제’였음을 함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칭 진술의 문제도 범주 삼단논법에서는 ‘논리에 외적인 문제’이다.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 관점에서 접근할 때[유니콘 논증]은 서로 다른 두 개의 형식을 갖는다.

 

[유니콘 논증의 형식]

1. ∀x(Unicon(x)→Horse(x))

2. ∃x(Unicon(x)∧Fly(x))

3. ∃x(Horse(x)∧Fly(x))

 

위의 [유니콘 논증의 형식]은 타당한 연역 논증 형식이 아니다. 반면에 과거 전통의 논리학에서 [유니콘 논증]은 타당한 연역 논증 형식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차이는 단칭 진술뿐만 아니라 존재 도입의 문제도 현대 진술 및 술어논리에서는 ‘논리에 내적인 문제’가 되었음을 뜻한다.

 

 

 

4.

현대 논리학이 과거 전통의 논리학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이, 즉 A1과 A2의 관점을 갖고 있는 이는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논리학의 이상’을 갖고 있다.

 

• 내용적으로 구성되는 실제 논증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급적이면 ‘논리에 내적인 문제’로 만들라.

 

이에 대해 고대 논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 모른다.

 

“현대 논리학이 더 많은 종류의 진술과 맥락을 형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겠네. 그러나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유니콘 논증]을 만든 것이라네. 또한 우리는 단칭 진술에 대해서는 범주 삼단논법을 적용하지 않거나, 적용하더라도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항상 고려한다네.”

 

내용적으로 구성된 실제 논증에서 찾아낼 수 있는 형식은 하나가 아니다. 어떤 형식을 택하는가는 각 논리 체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는 ‘논리에 내적인 것’과 ‘논리에 외적인 것’의 구분은 논리학이 다루는 형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논리학의 이상’에 대한 집착이 논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측면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상에 대한 집착은 역으로 논리학의 발달을 저해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사례 분석을 바탕으로 이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이어질 이야기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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