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서의 인문학
- 대답에서 질문으로의 이행 -
1.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은 ‘인문학적 관점에 근거한 일반 교육’을 뜻한다. ‘인문학과 글쓰기’, ‘인문학과 커뮤니케이션’ 등의 과목이나 대학의 기관은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대표한다.
•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위 질문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면서도 단순한 대답은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교육’일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가? 트위터(twitter)에 이 물음을 올린 결과, 다음과 같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
• ‘1을 보고 2를 생각하는 것과 2~10을 생각하는 것의 차이’
• ‘흔히 문사철을 말할 듯싶지만, 문제 상황의 맥락을 읽어내는 능력’
• ‘질문 없는 곳에서 질문을 찾아내는 능력, 물론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
• ‘인간의 내면과 인간 사회에 대한 호기심’
• ‘여기가 매트릭스라는 것을 아는 것’
• ‘인간에 달라붙은 껍데기’
•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인간을 아는 것’
• ‘고전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아는 것’
마지막 두 반응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모두는 인간 및 인간적인 삶에 대한 올바른 규정 방식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즉, 마지막 두 반응을 제외한 나머지 반응은 인문학적 소양을 ‘삶에 대한 태도’나 ‘자신의 삶에 필요한 어떤 능력’과 연관시키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경향이 된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은 그러한 나머지 반응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수법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
•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인문학과 글쓰기’, ‘인문학과 커뮤니케이션’ 등이 1970년대 이후에 세계적인 경향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위 물음들에 답하려면, 먼저 인문학(humanistic studies), 과학주의(scientism), 그리고 인본주의(humanism) 사이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 그것들과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구분성을 갖는 이유를 알 수 있다.
2.
인문학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등의 개념을 규정하고, 각각의 현상을 설명하는 분과들을 일컫는다. 인문학 전통이 자연과학에 대비된 것은 맞지만,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대립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대립 관계를 맺는 경우는 인문학을 ‘전통적인 인본주의 관점’에, 그리고 자연과학을 ‘과학주의 관점’에 가두어버리는 경우에 발생한다. 전통적인 인본주의 관점에 따르면, 인문학은 자연과학의 지식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지식 체계이어야 한다. 반면에 과학주의(scientism)는 인간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으로 환원 가능하거나,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근거해 설명 가능하거나, 혹은 과학적 설명 방식에 포섭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를 받아들이면, 인문학의 고유성은 허구가 되어버린다.
전통적인 인본주의와 과학주의의 대립 양상은 인간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 방식’과 ‘인간에 대한 과학주의적 이해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별함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한 특별함은 ‘인간적인 삶’,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적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적인 삶, 인간관계에 대한 규범을 자연에서 찾는 경우,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 방식’과 ‘인간에 대한 과학주의적 이해 방식’의 대립 양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서양 전통에서 그러한 자연의 규범은 ‘우주적 질서’, 곧 ‘코스모스(cosmos)’로, 그리고 동양 전통에서는 ‘우주적 흐름의 운행 방식’, 곧 ‘道(道)’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자연의 규범이 인간적 삶, 인간관계의 규범이 되는 경우, 인간적인 것의 독자성은 무의미해진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이 이를 명백히 인식했다면,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이를 명백히 인식했다.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 방식’과 ‘인간에 대한 과학주의적 이해 방식’의 대립 양상이 명백히 나타난 시기는 19세기였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역사와 문화적 지식 체계는 자연과학과 무관하게 성립할 수 있다는 독일의 ‘휴마니즈무스(Humanismus) 운동’에 기인한 용어이다. 그러한 인본주의 운동은 19세기 과학주의를 대표한 실증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상황은 과거에도 있었다. 소피스트의 입장과 플라톤의 입장 차이, 인본주의자 피코(Pico della Mirandola)와 케플러(J. Kepler)의 입장 차이, 피코(G. Vico)와 데카르트(R. Descartes)의 입장 차이를 그 실례로 들 수 있다. 19세기 인본주의는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비코의 영향을 받은 입장이다.
3.
인문학을 전통적 인본주의적 관점에, 그리고 자연과학을 과학주의 관점에 종속시킬 때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대립 관계를 맺는다. 전통적 인본주의를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 방식’으로, 그리고 과학주의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 방식’으로 약화시키는 경우,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립 양상이 발생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게 된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방식과 과학적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칸트는(I. Kant)는 인간에 대한 설명 방식의 경계와 자연에 대한 설명 방식의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칸트의 접근 방식을 현대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인문학의 각 분과에서 자연과학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고, 역으로 과학적 발견 역사에서 인문학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칸트의 접근 방식으로는 현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거래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 방식과 과학적 이해 방식의 대립 양상을 허구로 만드는 현명한 방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근거한다. 인간이 특별한 까닭은 인간적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특별한 까닭은 끊임없이 삶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전제하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전재하는 것은 ‘다른 분야에 의존적이지 않는 확실한 지식 체계를 확보한 분야’만을 학문으로 간주한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인문학이 그런 지식 체계가 아니라고 해서 인문학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시 자연 과학이 그런 지식 체계가 아니리고 해서 자연과학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 혹은 자연과학의 고유성은 각 분야에 해당하는 독자적인 설명 체계나 이해 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독립적인 두 측면, 즉 인문학적 측면과 자연과학적 측면이 인간에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각 분야의 고유성은 ‘다루는 문제의 성격’,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적 방법’에 기인한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각 분야에 고유한 인지 체계나 설명 체계를 가정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러한 가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없다.
자연과학의 지식 없이는 인간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이로부터 인간의 문화와 역사가 자연과학에 종속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점은 현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에 배어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사회학의 경우, 많은 방법이 자연과학에 기대고 있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역동성에 기인한 모든 현상이 그러한 방법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연과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현대 자연과학의 실제 양상이 파악되는 경우, 인간관계의 역동성에 기인한 현상들은 자연적 제한 속에서 가능한 현상들로 여겨진다.
4.
전통적인 인본주의와 과학주의의 대립 양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도 생겨났다.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은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보다 폭넓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적극적일 수 있도록 해주는 태도 및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 체계로 여겨져야 한다. 이때 인문하적 소양을 길러준다는 것은 다음을 뜻한다.
•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특별함을 갖고 있다. 그 특별함은 인문학 분과의 특정 이론이나 입장에 따른 ‘인간에 대한 어떤 규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특별함은 인간이 자신의 삶 혹은 삶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파악할 때 드러난다. 개인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태도 및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한 태도 및 능력으로 ‘실현 가능한 문제 설정하기’, ‘지적 호기심’, ‘지적 풍부성’, ‘창의력’, ‘증거가 부족한 경우 자신의 입장을 유보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 등이 거론된다.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준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글쓰기, 커뮤니케이션 등 영역별로 구체화된다. 그러한 수단을 마련하는 것은 효과적인 교수법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글쓰기 교육에 국한해 간략히 살펴보자.
• 개인이 자신의 삶 혹은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은 그가 처한 현실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 교육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가급적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혹은 현실적 고민을 담은 문제들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한 문제들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특정 이론 혹은 입장을 적용하여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교육 자료는 문제의 성격에 맞도록 자체적으로 개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글쓰기 수업을 위한 자료들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지식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논제나 추론형 문제들은 주어진 자료를 재구성하거나, 그러한 지식들을 사용해야 해결되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창의력, 비판적 사고 능력과 같은 것이 수업을 통해 활성화되지 않는다. 글쓰기 수업을 위한 자료는 새로운 주제와 연결될 가능성을 갖고 있을수록 좋은 것으로 평가된다.
‘인문학과 글쓰기 교육 과정’에만 국한해도,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수법을 구성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인문학의 특정 이론이나 입장을 적용해 답을 찾게 하는 방식의 교수법이 ‘인문학과 글쓰기 교육 과정’에 채택되는 경우, 이것은 학생들을 ‘맹목적인 사고의 소유자’로 만들기 쉽다. 그들은 문제를 찾고 스스로 해결하는 적극적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이론이나 입장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5.
왜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은 1970년대 이후에야 각 대학의 학제로 채택되었을까? 1960년대 이후 정보화, 세계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지식을 배경으로 집에서 일하거나, 1인 기업을 운영하거나, 혹은 여러 직업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학이 이러한 세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딜레마를 만나게 된다.
•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은 좋다. 그 목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 생겨나게 된 사회적 배경, 특히 세계화 과정에 대해서는 아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경쟁 속에서 ‘적극적 삶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현 사회 상태를 수긍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욱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은 상업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위 딜레마를 대학 스스로가 풀 수는 없다. 그것은 총체적인 사회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학이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의 목적에 적합한 콘텐츠 개발을 게을리 한 채, ‘창의성’, ‘리더십’, ‘비판적 사고’와 같은 문구만 내세운다면,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다.
*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답해주신 다음 트위터 동지들께 감사드립니다.
@takithebest @knauer0x, @kwonds, @minoci, @anidia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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