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 건축학의 대부 서베인
1.
소위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된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학문 분과가 탄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분과를 개척한 인물을 ‘혁명적 인물’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 즉, 그러한 인물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설명하는 가운데 새로운 분과를 개척한 ‘혁명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척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새로운 분과가 탄생한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사례로서 현대 음향 건축학의 탄생 과정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분과를 탄생시킨 모든 개척자가 ‘혁명적 인물’은 아닌 것이다.
2.
하이파이를 취미로 가진 사람들 중에는 청취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음향판을 사용하는사람들이 있다. 음향판은 그 재질에 따라 소리를 잘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음향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좋은 소리를 찾는 사람은 가구나 소파의 배치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다. 그 어떤 경우에나 ‘청취 환경을 공간의 기하학적 구조로만 여기지 않는 관점’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그 관점은 현대 음향 건축학의 대부로 불리는 물리학자 서베인(Wallace Clement Sabine, 1868~1919)이 가졌던 것이기도 하다.
서베인은 ‘포그 예술 박물관(Fogg Art Museum)’ 강의실 덕분에 청음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건축가 헌트(R.M. Hunt)가 설계한 포그 예술 박물관의 강의실은 청음에서 약점을 갖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 최초의 박물관인 포그 예술 박물관이 완성될 1894년 무렵, 서베인은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강의실 건물은 반원의 돔 형태로 설계되었다. 예술에 관한 강연자의 발음이 청취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특히 연주 중 강연자의 음성은 청취자의 귀에 도달할 수 없었다. 악기에서 나온 음파의 잔향으로 인해 강연자의 음성파가 빨리 소멸했기 때문이다. 당시 하버드 대학 총장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고 해결할 인물로 서베인을 지목했다. 서베인은 뜻하지 않은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포그 예술 박물관 강의실 문제는 서베인 스스로 발견한 것도, 창조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그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준공 당시 포그 아트 박물관 강의실 구조>
서베인이 포그 예술 박물관 강의실 문제를 해결하라는 임무를 맡았을 당시, 음향 건축학은 ‘건축물의 이상화된 기하학적 구조’를 다루는 분과였다. 이 때문에, 당시 기술로는 악기의 특성을 살릴 수 없었다. 공기의 탄성을 이용해 전파되는 진동은 밀폐된 공간에서 정재파(standing wave)흫 형성하게 된다. 일정한 진폭과 파장을 갖는 정재파가 벽에 반사되면, 조화 진동(harmonic oscillation)이 발생한다. 많은 악기는 정재파를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정재파가 항상 음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음파는 빛처럼 진행하지 않는다. 진동이 발생하면, 주변 공기 입자들이 운동 에너지를 받아 분산되고, 관성에 의해 공기 입자들은 다시 응축된다. 그 결과, 음파는 지그재그로 전파된다. 공간의 이상화된 기하학적 구조, 실례로 넓이, 길이, 높이의 세 변수만을 갖는 구조를 고려해도, 정재파들의 중첩 및 간섭에 의한 효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지나치게 소리가 증폭되는 곳, 그리고 상실되는 곳은 특수한 재질로 처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악기의 특성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밀폐된 공간에서조차 모든 소리는 소멸되게 마련이지만, 악기마다 그 고유의 음 소멸 시간이 있다. 베이스의 음 소멸 시간은 리듬 기타의 음 소멸 시간보다 길며, 파이프 오르간의 음 소멸 시간은 첼로의 음 소멸 시간보다 길다.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 연주에 동원되는 악기의 음 소멸 시간은 록 음악에 동원되는 악기의 음 소멸 시간보다 길다.
서베인이 맡은 임무는 새로운 강의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의와 연주에 부적합한 공간을 적합한 공간으로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각 악기에 고유한 음 소멸 시간을 밝혀내려면,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파이프 오르간의 음 소멸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거대한 성당에 울려 퍼지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어보라. 두 번째 음을 듣는 동안에도 첫 번째 음이 살아 있다. 소리 측정 장치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서베인은 자신의 귀와 시계를 믿고 오르간 소리가 죽는 시간을 측정했다. 서베인은 이를 바탕으로 ‘소리 소멸 시간, 공간 용적과 표면적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소리의 잔향 시간은 공간의 부피에 비례하고 표면적에 반비례한다. 그러나 각 악기 음의 소멸 시간을 밝혀내더라도, 악기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벽과 가구 재질 등이 소리를 흡수하는 정도, 즉 ‘소리 흡수 계수’를 찾는 실험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서베인 계산법(Sabine calculation)’이다.
서베인 계산법에 따라 연주장이나 스튜디오가 설계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연주 공간에는 청취자가 없어야 한다. 청취자도 음 전파에 간섭을 일으키는 방해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청취자가 앉는 좌석의 배치 또한 중요하다. 음향적 효과를 향상시키는 데 고려해야 할 변수들의 수는 실로 엄청나다. 서베인 계산법은 단지 청취 환경의 초기 설계 단계에서 중요하다. 초기 설계에 따라 작은 모형을 만든다. 초기 모형을 이용한 실험을 거쳐 초기 설계는 수정된다.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모든 현대적 음악당이나 연주 공간은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3.
서베인 이전에는 공간의 이상화된 기하학적 구조를 다루는 것이 음향 건축학의 핵심이었다. ‘이미 완성된 청취 공간의 약점을 개선하라’는 임무를 완수하는 과정에서 서베인은 음향 건축학의 패러다임을 변화킬 수 있었다. 공간 구조물의 재질, 공간 내 대상들의 위치 등을 음향 건축학의 중요 변수로 만들었고, 그러한 변수들을 다룰 수 있는 이론적, 실험적 토대를 닦았다. 포그 예술 박물관 강의실의 청음 환경은 서베인의 연구로 개선되었다. 포그 예술 박물관 강의실은 이후 몇 번의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1973년 하버드 대학 당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서베인이 설계와 건설에 직접 개입한 보스톤 심포니 홀(Boston's Symphony Hall)은 지금도 음향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음향학이야말로 가장 오랜 학제 간 연구 전통을 지녔으며, 여러 분과를 파생시킨 분야이다. 서베인 이후 음향 건축학이라는 분과가 정착했다. ‘좋은 소리’라는 것에 대한 평가 기준은 인간의 인지 능력과 가치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음향학으로 넘어오는 인지심리학자, 인공지능 연구가, 심지어 문화인류학자들의 수는 증가 추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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