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경험의 단상은 5개의 절로 구성된 '노화와 시간'의 2절로 들어간 글이다. 더 상세하고 구체적인 버전은 소위 'A-시간과 B-시간 구분'의 문제점을 신경계 망 되먹임 과정의 의식 발생 현상과 연관시켜 다룰 때 올릴 것이다.
‘개인적’이라는 표현 대신 ‘주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한 사용법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로서 이분하고 전자에만 실재성을 부여하는 사고방식이 배어 있다. 그 사고방식은 나에게는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에 의해 퍼진 일종의 전염병과 같다. 그 사고방식은 경험 이전의 상태를 객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마음을 그것에 대비시켜 경험의 발생 장소로 규정하는 것에 따른다. 서양 근대 시기에 굳어진 그 사고방식은 마음을 능력으로 여기는 관점을 후퇴시켰고, 책과 교육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었다.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등 일상 경험이 정말 객관적인 것에 대비된 주관적인 것이라고 해 보자. 그렇다면 어떻게 일상 경험 및 경험의 정도 차이를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과학적 탐구가 어떻게 경험에 기댈 수 있을까? 서로 분리되지 않은 방식의 색, 형태, 소리뿐만 아니라 몸과 생각도 ‘나’의 앞에 드러나는 경험의 외재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종류의 차이로 이분하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물음들을 파고들수록 답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사고방식은 실재하는 것을 객관적인 것과 일치시켜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을 위협한다. 경험의 시공간적 실재성을 의심해야 한다면, 과학적 탐구의 가능성도 의심해야 한다. 그 어떤 탐구든 경험은 인간에게 탐구의 원천이며, 동시에 탐구의 분석 및 설명 대상이기도 하다. 시공간적 크기를 갖는 것에 실재성을 부여할 때, 경험도 실재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화내고, 상상하는 것 모두 ‘나’ 앞에 있다는 점에서 ‘나’를 기준으로 한 외재성은 경험의 속성이다. 생각한 내용은 허구일지라도 생각이라는 활동은 분명히 ‘나’의 주변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만질 수 없고 그 경계 및 시작과 끝점이 불분명하며 사과나 나무와 달리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더라도, 그것은 철학자들이 떠드는 ‘연장성(extension) 없는 것’ 혹은 ‘크기를 결여한 어떤 것’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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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경험의 단상
* '시간 경험의 단상은 5개의 절로 구성된 '노화와 시간'의 2절로 들어간 글이다. 더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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