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닫힌 마음'의 보수

착한왕 이상하 2010. 5. 22. 02:00

'닫힌 마음'의 보수

 

서양 논리학은 '논증 형식을 다루는 것'으로 시작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타당한 논증 형식과 그렇지 않는 논증 형식을 정해놓고 논리학이 출발한 것은 아니다. 실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건긍정식의 타당성 유무는 스토아 시절 논쟁 거리 중 하나였다. 타당한 형식을 갖춘 논증이라도 내용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다음의 논증 형식은 '모순을 전제로 삼을 수 없다', '판단의 대상이 되는 진술은 참 또는 거짓이다'라는 조건 아래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P 또는 Q

Not-Q     

P

 

위 논증 형식은 '선언지 제거법'이라 불린다. 위 논증 형식의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1. 천안함 침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거나, 다른 원인에 기인한 것이다.

2.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 아닌 다른 원인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없다.

3. 따라서 천안함 침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다.

 

위 논증이 형식적으로 타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반박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전제 2]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론 3]을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제 2]에 대한 다수의 합의는 증거 조합에 근거한다. 그러한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북한 소행임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

북한 소행이 아닌 다른 원인에 기인했을 가능성을 배제해 주는 증거

 

정부는 천안함 침몰 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했고, 서방 국가들은 정부의 발표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런데 과연 정부가 제시한 증거들이 [전제 2]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낼 정도로 충분한가? 이 물음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정부가 천안함 침몰 사건 원인으로 북한을 지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부가 '선거를 위한 보수 세력 집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안함 침몰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보수 세력 집결을 위해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결정적 원인'을 단정짓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단정지었기 때문에, 정부가 보수 세력 집결을 위해 천안함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나름의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현 정부의 문제는 자신들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거나 반하는 것들은 은폐하거나 일종의 질병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 정부 세력이 '자신의 이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는 태도', 즉 '열린 마음'을 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현 정부의 문제는 단순히 보수 대 진보 혹은 우파적인 것과 좌파적인 것의 대립 구도에서만 빚어진 것으로 취급하기 힘든 성격을 갖는다.

 

이념으로 특정 세력을 평가하는 경우, 보수 대 진보는 결코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라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고, 진보라고 하여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반민주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열린 마음을 갖추지 못한, 즉 '닫힌 마음'의 정치 세력은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닫힌 마음의 정치 세력은 보수 세력일 수도, 진보 세력일 수도 있다. 닫힌 마음의 정치 세력은 민중에 대해 개방적이지 못한 까닭에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즉, 민주주의의 진화에 방해가 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론으로 다른 서방 국가들이 이번 정부의 발표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사실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입장도 무시할 수 없다. 현 상황에서 정부 발표가 갖는 한계와 비정합성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 이들은 미약한 증거만으로도 '사전에 원했던 선택 사항'에 매혹당하는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지 않은 현 경제 상황에서 한반도의 위기 상황을 자초하는 것이 과연 다수에 득이 될 것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증거의 타당성 여부'를 조심히 논해야 한다.

 

어떤 정치 세력이 열린 마음의 정치 세력일까? 현 정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치 세력을 열린 마음의 정치 세력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는 촛불 사태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다만, 진보 세력은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닫힌 마음의 소유자들로 몰아 붙여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의 공유에서 출발하며, 이를 위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 없이는 자기 성찰을 수반한 비판적 사고를 기대할 수 없다.

 

과연 진보 세력의 정치가들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인가? 트위터 등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들의 대중성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데 부수적인 것이다.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 정치 세력을 선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고민하지 않고서는 '형식적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진화'를 성취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물음에 대해 어느 인기 정치가가 도식과 도표를 그려가며 구체적 답변을 할 수 없다면, 나는 그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내 눈에 그는 단지 세 확장을 위해 대중을 수단으로 삼는 인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독일 좌파당(Die Linke)의 총수 그레고 기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질문에 구체적 플랜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위 물음에 대해 내가 대답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 다만, 이 땅의 민주주의 진화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위 물음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 관련글

 

좌파와 우파:  http://blog.daum.net/goodking/89

파퓰리즘: http://blog.daum.net/goodking/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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