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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과 역사학자

착한왕 이상하 2010. 5. 27. 23:34

이념의 시대적 기능과 내용

- 조폭과 역사학자 -

 

 

최근 들어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 측면을 조금이나마 약화시켜 보려는 집단들이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들의 학계에 관심이 없는 지라, 그 학술대회 발표 내용도 알 수 없다. 일부는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 측면을 약화시켜보려는 집단에 맞서 반론을 펼쳤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그러한 집단의 논문들을 뒤져보면, 아마도 '유럽이라는 이념(The Idea of Europe, ed. by A. Pagden, Woodrow Wilson Center & Cambridge University)'과 같은 책이 참고문헌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책의 내용은 무엇인가?

 

● '문화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이념은 F. 베이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아시아 공동체, 아프리카 공동체는 '문화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이념'에 대항하면서도 모방하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유럽 공동체의 탄생 과정에만 국한하는 경우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입장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함축한 논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논증 1>

● 현재 사용되는 개념 혹은 이념 A가 있다. 과거에 사용되었던 개념 혹은 이념 B가 있다.

● A와 B 사이에 내용적 유사성이 발견된다.                                      

● 따라서 A는 B에서 유래한 것이다.

 

<논증 1>은 치명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A와 B의 내용적 유사성만 강조하는 경우, A와 B의 시대적 기능을 규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실례로 베이컨이 강조한 '우리 유럽'은 종교 개혁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유럽 지성인들의 대동 단결'을 강조할 목적을 갖고 있엇다. 베이컨의 '우리 유럽'을 지금의 '유럽 공동체'와 연관시킬 역사적 증거는 미약하다.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이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 이후, '우리 유럽'이라는 이념에는 '유럽 중심 사관'이 배어 있었다. 식민지주의,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문화'라는 개념은 우열 비교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 차이'를 인정하는 개념으로 정착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달 단계를 거쳐 '문화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이념이 탄생한 것이다. 그 발달 단계는 단순히 과거 개념 혹은 이념의 수용이거나 확장 과정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에 따른 재구성(recomposition) 과정이었다.

 

지금의 유럽 공동체 이념이 과거와 단절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유럽'이라는 이념이 베이컨에게서 발견된다고 해서, 이를 가지고 유럽 공동체의 이념이 베이컨에게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 측면을 약화시켜 보려는 자들의 논증을 살펴보자.

 

<논증 2>

● 지금의 현대적 특징들은 유럽의 근대적인 것이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 잔파된 것이다.

● 일제 강점기는 그러한 전파 과정이기도 하다.                                          

● 따라서 긍정적으로 평가 가능한 현대적 특징들은 일제 강점기에서 유래했다.

 

위 <논증 2>는 <논증 1>의 사례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논증 2>도 '이념의 내용적 유사성에 근거해 그 기능의 차이를 무시한 오류'를 범한 논증이다. 첫째, 현대적인 것과 연관시켜 일제 강점기를 '필요 악'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현대적인 것은 불가능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논증 2>의 옹호자들은 시대적 요청에 따른 '이념의 기능'을 무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선각자들이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동기를 지금의 상황에 적용할 수 없다. 이념의 변형 과정에서 이념의 시대적 기능을 무시하고 내용적 유사성만 강조하는 경우, 왜 그러한 변형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셋째, 일제 강점기의 유산을 시대적 변화에 맞춰 사용한 것을 가지고,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 평가를 약화시킬 수 없다. 이 세 번째 논거는 일상적인 사례 하나를 구성해 보는 것만으로도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 어느 지역에 조폭들이 들어와 그 지역 경제권을 장악했다. 지역 사람들의 저항이 뒤따랐다. 조폭들이 물러간 후, 사람들은 조폭들이 남긴 것들을 사용했다. 그렇다고 하여, 조폭들의 행위를 미화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그렇다면 <논증 2>를 옹호하는 자들이 왜 계속 나타나는가? 이에 대한 답도 일상적 사례 하나를 구성해 보는 것으로 족하다.

 

● 조폭들은 물러났지만, 조폭들에 기생했던 자들이 지역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기생충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조폭들의 행위를 부정적으로만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의 부정적 측면을 약화시켜 보려는 역사학자들은 조폭에 기생했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의 진정한 목적은 '역사 읽기 혹은 평가'에서 '이념의 시대적 기능을 무시하고 내용적 유사성만 강조하는 경우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