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과학적 논쟁의 구성

착한왕 이상하 2010. 5. 27. 03:52

학풍을 위한 연구 주제

- 과학적 논쟁의 구성 -

 

 

신문과 방송을 보면 과학을 둘러싼 논쟁을 자주 본다. 그러한 논쟁들 대부분은 과학에 기인한 사회적 문제나 과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것들이다. 그러한 논쟁들은 과학과 기술의 사회학이란 넓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논쟁들로 인해 원래 의미의 ‘과학적 논쟁(scientific controversies)’은 가려지는 경향도 있다.

 

• 과학적 논쟁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논쟁’은 고전 역학, 전자기학, 유기 화학, 생화학, 분자 생물학 등 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형성되고, 그 설명 영역이 분명해지는 과정 중에 발생한 논쟁들을 뜻한다. 따라서 그러한 논쟁들에 대한 지식은 과학의 각 분과가 갖는 고유한 성격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적 논쟁들을 분과별로 분류하고 조직적으로 구성한 대학 학제’가 마련된 곳은 없다. 우리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다. 과학사, 기술사, 과학 철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라는 자들은 그러한 학제를 구성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한 ‘학제의 필요성’을 ‘불필요한 것’들로 만드는 자들이다.

 

대학에 기대를 걸지 말자. 다른 곳, 실례로 인터넷 등에 과학적 논쟁들을 분과별로 분류하고 조직적으로 구성해 본다고 가정하자. 그러한 구성은 어떤 방법을 따라야 할까? 과학적 논쟁을 각 분과 형성 및 발달 과정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 세 가지 구성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 토대 논쟁

• 체계화 논쟁

• 파생 논쟁

 

토대 논쟁부터 살펴보자.

 

• ‘토대 논쟁’은 한 분과의 탄생에 밑거름이 된 ‘개념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일컫는다.

 

고전 역학의 사례를 살펴보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설로 정착하면서, 새로운 역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처음부터 운동 방정식과 같은 것이 나올 리 만무하다. 이미 축적된 자료들, 설명을 요구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통합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이 선별되어야 한다. ‘물질’, ‘질량’, ‘시공간’ 등의 개념들은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논쟁사 속에 탄생했다. 그러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운동의 변화만으로 현상을 설명해 보겠다’는 ‘연구 준칙’도 오랜 논쟁사의 결과로 탄생했다. 물질, 질량, 시공간 등의 개념들과 그러한 연구 준칙은 하나의 개념틀을 형성한다. 그러한 개념틀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 물리적 도구들, 실례로 측정 및 관측 도구들의 제한 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체계화 논쟁’이란 ‘가설 및 법칙들이 선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일컫는다.

 

고전 역학의 개념틀이 고전 역학은 아니다. 그 개념틀로는 구체적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예측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설명 및 예측을 위한 분석적 도구, 즉 가설 혹은 법칙이 필요하다. 뉴턴은 운동 중 보존되는 것을 ‘물질’로 생각했다. 그는 물질의 운동을 위한 ‘절대적 공간’을 전제했다.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절대 공간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좁히는 과정에서 고전 역학이 탄생한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뉴턴 역학은 뉴턴 자신의 것이 아니다. 뉴턴의 원래 역학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다른 운동 법칙들과 모순 관계를 맺는다. 라이프니츠, 달랑베르, 모퍼티, 라플라스 등에 의해 그러한 모순 관계가 정합적인 관계로 바뀌게 되며, 약 100년이 걸린 이 과정에서 ‘고전 역학 체계’가 탄생한 것이다.

 

• ‘파생 논쟁’은 체계성을 갖춘 분과가 여러 영역에 적용되도록 구체적 이론들을 파생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논쟁들을 일컫는다. 이를 통해 해당 분과의 설명 영역이 분명해진다.

 

고전 역학의 체계성이 갖춰지면, 그것을 탄성체 혹은 비탄성체 충돌 현상에 잘 적용되도록 해주는 이론들이 생겨난다. 또 공학과의 결합, 실례로 구조 공학과의 결합을 통해 건물과 다리를 건설하는 데 용융한 이론들이 생겨난다. 고전 역학 체계의 파생 과정 중에 고전 역학의 설명 한계가 드러난다. 그 한계는 ‘고전 역학의 종말’이 아니라, ‘그 설명 영역의 경계가 명백해짐’을 뜻한다.

 

유기체의 구성단위들과 그 단위들의 관계를 연구하는 생화학의 경우도 ‘구성 단위’, ‘반응’, ‘유기체의 특정 기능과 관련된 물리 화학적 특이성’ 등으로 구성된 개념틀에서 출발했다. 여러 가설들의 경쟁 속에서 생화학의 체계가 갖추어 졌다 그 체계를 여러 영역 적용해 보는 가운데 새로운 이론들이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생화학의 설명 영역이 명확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생화학과 유전학의 결합 과정은 초기 분자 생물학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토대 논쟁’, ‘체계화 논쟁’, ‘파생 논쟁’이라는 ‘과학적 논쟁의 구성 방식’이 다른 모든 과학 분과에 잘 적용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러한 구성 방식을 작업가설로 삼아 학제 간 연구를 할 필요는 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질학 등의 각 분과가 탄생하고, 그 설명 영역이 분명해지는 과정에 기여한 논쟁들을 분석할 때 과학적 논쟁의 구성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진화할 것이다. 즉, 그 구성 방식은 각 분과 특성에 맞도록 구체화될 것이다. 그러한 구체화를 통해서만이 단순 과학사가 아니라 ‘과학적 지식의 계보학’이라는 히스토리오그래피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우리가 해낸다면, 서쪽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대주의로 물든 이 땅에는 20세기 이후 자기 학풍이라는 것이 없다. 아니 학풍이 생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천박한 곳’이다.

 

‘과학적 논쟁의 구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의 계보학’을 탄생시키려면, 이 땅의 대학이나 정치권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 천민자본주의의 화신인 기업가들에 대한 기대도 접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세력이 과연 ‘과학적 논쟁의 구성’이라는 연구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각종 세력도 그러한 연구 주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차피 ‘과학적 논쟁의 구성’이라는 연구 주제는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없다. 출판계는 썩은 냄새로 진동한다. 또 어느 개인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 학풍을 탄생시킬 수 있는 연구 주제들을 가끔씩 올릴 예정이다. 어차피 전부 ‘공상 속의 학풍’으로 끝날 것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