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잡세상 잡글

21세기를 위한 묵시록

착한왕 이상하 2010. 6. 10. 02:22

21세기를 위한 묵시록

 

* 다음 글은 정리된 글이 아니다. 또한 나 자신의 입장을 반영한 글도 아니다. 단지 짧은 묵시록 하나를 쓰고 싶었다. 이에 대한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른다. '세상의 터무니 없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러한 무책임한 대답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1. 왜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에 열광하는 것일까? 20세기 사람들은 ‘기술 체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은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기 혁명, 통신 혁명, 정보 혁명을 경험했다. 우리 모두는 새로운 인공물이 삶의 방식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력을 갖고 있음을 경험했다.

 

2. 기술 체계에 대한 믿음은 19세기 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없었다. 그대신 당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즉, 그들은 정치야말로 삶의 방식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공산주의, 민주주의, 아나키즘 등의 정치적 이념이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3. 정치에 대한 믿음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기술은 단지 목적 달성 수단으로 여겨졌다. 인공물이 삶의 방식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에는 주류가 될 수 없었다.

 

4. 기술 체계에 대한 믿음의 시대에 정치에 대한 믿음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로만은 삶의 방식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5. 인간은 기술 체계의 발달로 인한 변화에 반응만 하는 존재는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사회적 분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또한 과다한 경쟁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6.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의 증가 추세는 기술 체계에 대한 믿음이 불러온 결과인가? 그래서 우리는 19세기 말의 정치에 대한 믿음을 부활시켜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긍정하는 사람은 허탈감에 빠질 것이다. 그는 어떻게 정치에 대한 믿음을 부활시켜야 하는가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7. 어떤 이유에서든 기술 체계에 대한 증오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과연 정치에 대한 믿음이 부활할까? 즉, 정치적 변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부활할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기술에 반대된 개념은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생태주의와 결합한 신흥 종교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8. 지금의 위기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정치에 대한 증오심의 확대일 수도 있다. 즉, 기존 질서에 대한 반감으로 새로운 민중 운동과 같은 것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너무나 나이브하다. 민중 운동은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실제 ‘위기 상황’에서만 발생했기 때문이다.

 

9. 정치에 대한 믿음의 시대인 19세기 말 상황을 회상해 보자. 당시 유럽은 위기의 상황이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정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대중의 의식 속으로 파고 들 수 있었다. 정치에 대한 믿음의 시대에는 여러 정치적 입장들이 경쟁했다. 그러한 경쟁 양상이 평화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정치에 대한 믿음의 시대는 위기상황에서 나타났고, 새로운 정치 체제의 정착은 전쟁의 결과였다.

 

10. 생태계의 파괴, 과다 경쟁, 심해지는 부의 격차, 이러한 일련의 현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위기의 상황은 도래할 수밖에 없다. 그때 정치에 대한 믿음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다. 그때 19세기 말과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입장들이 경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도래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가 잡히면, 위기의 상황에 대한 인식은 기억의 흔적만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최근 영국 에섹스 대학 철학과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을 결합 혹은 연계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을 위기의 시대로 보고, 과거 위기의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주제들, 실례로 공포, 증오, 희망과 같은 주제들을 대륙철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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