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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가져온 불운

착한왕 이상하 2010. 6. 2. 05:21

행운을 가져운 불운

 

 

K는 최근 지하철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다. 수술 후 재활을 위해 수영 강습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수영 강사는 K의 이상형이었다. K는 수영 강사와 짧은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발목 인대가 파열된 것은 K에게는 불운(不運)이었다. 그 사건은 K의 의지, 의도, 기대와는 무관하게 발생한 것이었다. K가 수영 강습에서 배필을 만나게 된 것도 K의 의지, 의도, 기대와는 무관한 ‘운(運)’이었다. 하지만 그 운은 K에게는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었다.

 

<행운을 가져온 불운 논증>

• 인대가 파열된 것은 K에게는 불운이었다.

• 인대 파열로 인해 K는 배필을 만났다.

• 배필을 만난 것은 K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 따라서 인대 파열은 K에게 불운이자 행운이다.

 

<행운을 가져온 논증>은 역설 형태를 띠고 있다. 전제들을 받아들일 때 그 결론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철학자는 <행운을 가져온 논증>을 역설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인대 파열로 배필을 만났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대 파열이 배필을 만난 것에 대한 필연적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K가 만약 다른 수영장에 갔더라면, 배필을 만나지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단지 인대가 파열된 사건과 배필을 만난 사건 사이의 관계를 우연적으로 볼 뿐, 전자의 사건이 불운인 이유, 그리고 후자의 사건이 행운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따라서 철학자는 불운과 행운을 단지 인간의 문제로 돌릴 것이다. 아니면 <행운을 가져온 논증>을 ‘우연성이 개입된 삶의 복잡성’에 대한 풍자로 볼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나, <행운을 가져온 논증>은 실제로는 역설이 아니다.

 

<행운을 가져온 논증>이 진짜 역설로 간주되려면, 불운이 행운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필연적 인과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이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운명(運命)’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불운이 행운으로 이어지거나, 행운이 불운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우연적으로 비추어지는 것은 단지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과정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인대가 파열된 불은은 배필을 만난 행운에 대한 필연적 원인이 된다. 따라서 인대가 파열된 사건은 불운이지만, 동시에 행운이기도 하다.

 

위에서 묘사된 운명론을 ‘동양적’이라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착각하고 있다. 동양에서 ‘불운’이란 ‘운이 없음’ 혹은 ‘운이 따르지 않음’을 뜻한다. ‘행운’은 ‘운이 있음’ 혹은 ‘운이 따르지 않음’을 뜻한다. 즉, ‘운’ 이라는 개념 자체는 가치판단에 중립적이다. 이러한 까닭에, ‘운’은 삶의 존재론적 해석을 위한 개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삶은 ‘운이 있고 없음의 순환 과정’이다. 그 순환 과정은 개인에게는 인생의 고저(高低) 혹은 좋은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인대가 파열된 사건은 K에게 운이 따르지 않는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그러한 불운의 시기에 K가 인대 파열이 아닌 교통사고를 당할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운이 따르는 시기에 K는 수영 강사가 아닌 다른 배필을 만날 수도 있다. 또한 인대가 파열된 경우에도 K가 다른 배필을 만날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운에 관한 위 해석에 따를 때 사건들은 불운과 행운의 순환 과정 속에서 연결고리를 맺게 된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는 우연적인 것인 까닭에, 불운이면서 행운인 사건은 없다. 따라서 동양의 운 개념을 받아들여도, <행운을 가져온 논증>을 역설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번째 전제를 참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이란 무엇인가? ‘운명’은 ‘우연성이 개입된 인생사의 복잡성’을 그대로 수긍하는 태도를 정당화해주는 개념이다. 특히 행운이 불운이 되는 경우에 ‘운명적’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강한 ‘수긍’을 함축한다. 자족(自足)이 그러한 ‘수긍’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운과 행운을 넘어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음악을 들으면서 지하철에서 생각한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무렵, 시각장애자 할아버지가 구걸을 하면서 지나갔다. 그 순간 나 스스로에게 이런 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What the fuck!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