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1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8. 5. 09:41

(3)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1

앞서 살펴본 ‘신학과 자연 철학의 관계에 대한 논쟁사’를 바탕으로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보자. 그 이유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입장이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근거해 세속화 과정의 독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

•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을 받아들이는 경우, 도덕의 종교 기원론을 받아들이거나, 기독교의 가치 체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 도덕 담론에서 종교적 측면을 다룰 수 있지만, 이로부터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기독교의 가치 체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 따라서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은 ‘기독교의 세속화’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라는 두 입장으로 나뉨을 살펴보았다. 먼저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는지를 따져 보자.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에 따르면, 세속화된 사회 상태의 주요 특징들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이때 세속화 과정은 그러한 특징들이 교리 해석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뜻한다.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은 얼핏 보면 타당해 보인다.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들, 실례로 이성, 과학, 개인주의 등의 개념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각 개념은 논리적으로 종교적 해석을 허락할 수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각 개념이 정말 기독교에 기인한 것이라면, 각 개념의 논리적 이중성은 역사적으로는 선후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입장의 핵심이다. 이때 각 개념의 논리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성 개념을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에 따라 해석해 보자.

 

• 이성은 감정이나 충동과는 구분되는 추론 및 추상화 능력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마음의 속성으로 가정되었다. 이성은 인간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으로서 신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은 아퀴나스에 이르러 굳어졌으며, 근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의 인간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법칙을 발견하고, 자연 법칙에 근거해 자연을 이용하는 특별한 존재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성은 교리 해석과는 무관한 경험적 탐구 대상이 되었다.

 

가독교의 세속화 입장에 따른 이성 개념의 변천 과정에 대한 위의 서술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첫째, 이성 개념이 오로지 기독교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감정 및 충동, 추론 및 추상화라는 사고 활동을 구분하는 것은 종교와 무관한 일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 구분을 바탕으로 자연과 성경에 함축된 진리를 찾을 수 있는 능력으로 이성이 가정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이성을 개인의 영혼과 연관시킨 것도 기독교 자체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신학과 이교도의 자연 철학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이 옳다면, ‘종교 교리 해석의 유무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의 이성’ 개념은 시대와 무관하게, 즉 일정하게 그 의미를 유지해야 한다. 이 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근대 초기의 이성 개념은 과학과 신학을 중재할 수 있는 새로운 자연 철학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 새로운 자연 철학은 과거 전통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대, 중세의 지적 유산들을 바탕으로 ‘과학과 신학의 중재 가능성’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재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근대 초기의 이성 개념이 13세기의 이성 개념과 통시적으로 공약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시기를 대표하는 개념은 현 시점에서의 의미론적 탐구 대상이 아니다. 그 개념은 그 시기를 과거 전통과 구분해주는 주제와 맞물려 평가되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주제를 찾을 수 없다면, 그 시기는 단지 과거 전통의 연장선에 서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새로운 주제를 다루기 위한 과거 전통의 재구성 과정에서 살아남은 개념은 ‘재구성 과정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이 때문에, 그러한 개념은 그것의 기원이 되는 개념과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동일하지는 않다. 이성 개념도 이에 대한 예외가 될 수 없다.

 

근대 초기의 이성 개념은 지적 설계자로서의 신, 보편적 자연 법칙 개념 등과 함께 당시의 세계 이해, 즉 ‘인간은 자연 법칙을 발견하고, 그 법칙에 근거해 자연을 이용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이해 방식을 구성한다. 그러한 이해 방식이 이후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따져 보지 않더라도, 근대 초기의 이성 개념이 13세기 기독교 교리 해석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중세의 이성 개념은 우주의 객관적 구조를 밝히고, 그 구조의 바탕인 자연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으로 가정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천문학에 대한 평가 기준이 주로 항해술이나 일식 예측 등 실용적 측면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즉, 천체 구조에 관한 도식과 수식들은 관측 사실을 설명할 목적을 지녔지, 천체의 객관적 구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의 신 개념은 과학의 발달과 함께 다양하게 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이 옳다면, 이성 개념의 변천 과정은 점진적으로 종교적 교리 해석에서 자유로워지는 경로를 밟아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근대 초기의 이성 개념이 중세보다 교리 해석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장담할 수 없다. 신 개념이 다양한 만큼, 교리 해석도 탄력적이다. 이 때문에, 이성 개념을 종교적 교리 해석과 단절시키는 것은 서양 전통에서는 어려운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입장이다. 따라서 그 입장을 바탕으로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없다. 설령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을 받아들여도, 종교 시장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종교 시장 논리는 세속화 과정을 부정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입장이다. 이때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세속화 과정의 실재성에 대해 의심할 뿐만 아니라, 종교가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다. 그는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을 빌미로 세속화 과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규정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 시장이 형성된 현실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세속화 과정에 대한 잘못된 규정 방식’, 즉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규정 방식’이지 세속화 과정 자체는 아니다.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이 정말 옳다고 해보자. 이때 세속화 과정의 특징들은 개념적으로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를 알아보자.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은 사실적 판단이 아닌 가치 판단의 영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 첫째,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기독교의 교리 해석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사랑, 자유, 진리 등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 체계는 과학, 경제, 기술, 정치 등 사회 각 분야로 전이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자신의 분야에 정진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둘째,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이 기독교의 교리 해석에서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 체계는 사장되거나 약화되었다.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가 첫 번째 입장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가 첫 번째 입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그는 기독교가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을 수긍해야 한다. 기독교의 가치 체계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사회 각 분야에 흡수된 것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입장에 의하면, 과학과 민주주의의 공간적 확장도 기독교 정신의 공간적 확장이다. 이때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통계 조사 등의 결과를 가지고 ‘기독교인 수가 유럽에서는 줄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늘어났다’는 식의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가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세속화된 사회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가 두 번째 입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기독교가 사회 통합의 원리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종교 시장이 형성된 사실을 가지고 ‘잃어버린 가치 체계’가 복원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 가치 체계는 다름 아닌 기독교의 도덕적 가치 체계이다. 이때 기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된 사회는 비도덕적인 사회로 평가된다.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결국 ‘도덕의 기독교 기원론’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 담론에서 종교를 고려한다고 해서, ‘도덕의 종교 기원론’이 성립하는 것은 아님을 이미 살펴보았다. 따라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중 무엇을 받아들이든,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기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된 현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지만,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은 역사적 근거를 결여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설령 그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종교 시장 논리 옹호자는 자신의 동기에 반하는 결론도 수용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따라서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 덧글: 도덕의 종교 기원론에 대한 비판 부분은 블로그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부분은 이 글로만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많은 내용이 블로그에 올리지 않은 부분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