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민주주의 (봉인 해제)/세속화와 민주주의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2.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0. 8. 20. 07:46

(4) 종교 시장 논리가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에 기댈 수 없는 이유 2

세속화 과정은 종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로 기능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어 간 과정이다. 유럽에 국한하는 경우, 세속화 과정은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이 나타나고 사회에 정착한 과정이기도 하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은 이를 부정하는 관점이다.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을 대표하는 두 입장은 ‘기독교의 세속화’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이다. 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면, ‘세속화’는 단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개념들의 세속화’를 뜻한다. 이때 세속화 과정은 단지 기독교 전통이 세속화된 과정일 뿐이며,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더 이상 현재와 과거를 구분해주는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즉, 세속화 과정에 ‘근대성’과 ‘현대성’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의 세속화 입장은 세속화 과정을 부정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돌리는 ‘종교 시장 논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듯이 보인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기독교 전통의 세속화론을 대표하는 또 다른 입장인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정당화할 수 없음을 살펴보자.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 첫째,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공통된 사고방식이 있다.

 

• 둘째, 그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다.

 

• 셋째, 근대 및 현대에 나타난 주제들에 맞추어 과거 전통이 변형되는 과정은 그러한 기독교적 사고방식에 따른 재구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거 전통과 구분되는 특징들을 세속화 과정에 부여할 수 없다.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을 논할 때 어려운 점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성, 과학, 개인주의와 같은 개별 개념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될 수 없다. 이성 개념을 실례로 살펴보았듯이, 그러한 각 개념은 기독교에만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그러한 개념들이 뒤얽힌 시대별 맥락들에 공통된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논의된 것이 있다면 바로 ‘기독교적 종말론’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말론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대표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지금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동경 혹은 염원을 뜻한다면 기독교에 고유한 사고방식이라 할 수 없다. 그러한 동경 혹은 염원은 어느 문화에서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종말론’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 첫째, 마지막 심판, 우주의 종말, 구원, 천벌 등 인류 혹은 개인이 도달하게 될 마지막 단계가 설정되어 있다.

 

• 둘째, 그러한 마지막 단계를 가정하는 경우, 역사의 발달 과정을 서술하는 방식은 목적론적일 수밖에 없다. 즉, 역사는 운명적으로 그러한 마지막 단계로 다가가는 경로로 파악된다.

 

• 셋째, 인류의 역사는 마지막 단계로 다가가는 경로로 파악되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 개념은 순환적일 수 없다. 즉, 그 시간 개념은 직선적이다.

 

정말 종말론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 그렇다고 가정하고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알아보자.

 

위 특징들을 갖는 기독교적 종말론은 목적론적 역사관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 개념과 비교 가능한 개념이 다른 종교, 실례로 불교에서 발견되더라도, 그러한 개념이 목적론적 역사관에서 이해될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다른 방식의 여러 세계 이해와 끊임없는 거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종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대 유대교의 선민사상에 종말론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서, 그 종말론이 정말 ‘기독교적 종말론’으로 규정 가능한지도 논란에 여지가 있다. 유대인에 국한된 구원론을 가지고 유대교의 역사적 시간 개념이 직선적이라고 단정짓기 힘들기 때문이다. 흥망성쇠의 공간적 순환 개념과 관련된 고대 그리스의 시간 개념이 이단으로 규정된 시기는 신약의 형성기인 3~4세기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사후 구원론이 기독교의 교리로 정착한 이후에도, 종말론이 득세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관점이 종말론과 결합하고, 종말론이 교황 세력을 위협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작동했던 시기는 종교 개혁기였다.

 

역사를 기차에 유비시킬 때 기독교적 종말론에 함축된 목적론적 역사관은 ‘기차의 엔진’에 유비된다. 그 엔진은 매우 특별하다. 그 엔진은 기차에 탄 사람들 개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기차를 특정 목적지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갖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따르면, 근대를 연 것으로 평가되는 17세기 논쟁들이 계몽주의로 이어지면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은 18세기와 19세기를 풍미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제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계몽주의는 종교 개혁기의 종말론과 화해하는 과정, 즉 이성과 신앙의 분리 관점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종말론과 계몽주의 모두 미래에 도달할 어떤 유토피아를 가정하고 과거의 특정 시기를 암흑기로 규정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이를 바탕으로 18, 19세기에 출현한 진보 개념을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된 형태’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목적론적 진보 개념에 따른 사고방식은 미래에 도달하게 될 어떤 유토피아를 가정하고 과거나 현재를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고방식이다.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18, 19세기 유럽 지성인 다수를 지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에 따르면, 그러한 진보 개념이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을 대표하는 특징들에 배어 있다. 특정 시기의 주제들에 맞추어 과거 전통이 재구성되는 과정의 핵심으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규정하는 경우,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을 대표하게 된다. 이때 목적론적 진보 개념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핵심인 종말론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세속화 과정과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을 연관시키는 시도 자체가 모순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이다.

 

• 근대 및 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특징들을 세속화 과정의 특징들이라고 하자.

• 그러한 특징들은 목적론적 진보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따를 때, 그러한 특징들은 단순히 근대 및 현대를 과거 전통과 구분시켜주는 특징들이 아니다. 즉, 그것들은 근대 및 현대를 과거 전통과 단절시키는, 즉 근대 및 현대에 ‘규범적 독자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갖는다. 목적론적 진보 개념에 의하면, 과거의 특정 시기는 미래에 도달하게 될 어떤 유토피아에 비추어 암흑기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목적론적 진보 개념은 기독교적 종말론이 세속화된 것에 불과하다. 어느 무신론자가 유토피아 세계를 가정하고, 그 세계에 비추어 과거 전통을 암흑기로 규정한다면, 그의 사고방식은 기독교적이다.

• 따라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바탕으로 세속화 과정에 규범적 독자성을 부여하는 경우, 세속화 과정은 실제로는 기독교적 종말론이 세속화된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독자성을 가질 수 없다.

 

위 논증 결론에 함축된 모순을 제거하려면, 근대 및 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특징들을 세속화 과정과 연관시킨 전제를 부정해야 한다. 이때 과거 전통과 구분되는 세속화 과정의 성격은 단지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 즉 세속화 과정이 기독교 전통과 무관하다는 인식에 기인한 착각으로 규정된다. 그러한 인식이 착각이라면, 근대 및 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특징들도 부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과거 전통과 구분 가능한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이 있다는 관점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종교 시장 논리는 과연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기대어 정당화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먼저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비판해 보자.

 

종교 시장 논리는 <고전적 이원론이 붕괴된 과정을 전통과의 단절로 보는 관점의 허구>와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관점의 허구>라는 두 논증에 기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 두 논증을 부정한다고 해서, 종교 시장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두 논증의 부정은 ‘전통과의 단절로 세속화를 규정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점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속화 과정을 ‘주제 생성’, ‘과거 전통의 재구성으로서의 문제 해결 과정’, ‘새로운 세계 이해 및 관점의 생성’, ‘새로운 주제 설정’이라는 역사적 템포들로 중첩된 과정, 즉 ‘재구성의 변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 ‘전통과의 단절로 세속화를 규정하는 방식’의 부정으로 인해 근대 및 현대가 과거와 구분되는 성격마저도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그러한 성격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 입장은 ‘전통과의 단절로 세속화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한 극단적 반발에 해당한다. 물론 누구나 전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신론자의 글에서조차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종교의 권위가 약화되는 세속화 과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사소한 것으로 규정해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이 갖는 약점을 지적하기 위해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당시는 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의 이념이 형성되고 실천되기 시작한 시대였다. 각 이념의 내용은 기독교적 종말론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기독교의 신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신 개념에 의존적인 기독교 교리 해석의 본질이 종말론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실례로 ‘강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뿐만 아니라, 지적 설계론과 관련된 ‘약한 자율적 우주 창조설’에서조차 인류 역사의 마지막 단계를 가정하기 힘들다. 그러한 우주 창조설은 최후의 심판자로서의 신 개념과 쉽게 양립하기 힘들다. 자율적 우주 창조설에 따르면, 신이 우주를 창조했더라도, 신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기독교적 종말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 기독교적 종말론에 기인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은 특정 구체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를 구성하는 관점, 혹은 어떤 주제에 맞추어 과거 전통을 재구성할 때 전제된 사고방식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정치적 이념의 텍스트 등에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기독교의 신 개념이 반드시 ‘최후의 심판자’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 민중에게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고방식이다.

 

대다수 민중에게 종말론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고방식이라는 주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위 반론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근대의 시대정신으로 불리는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기독교적 종말론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거나 약화시켜야 한다.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의 시대에 탄생한 모든 이념이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노동자 계층의 혁명에 의해 공산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입장을 놓고서도, 그 혁명이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가능한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만약 그 혁명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마르크스의 진보 개념은 ‘목적론적 진보’가 아닌 ‘가능한 진보’ 개념이다. 그러나 개개의 정치적 이념에 함축된 진보 개념이 둘 중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이 작업의 관심사가 아니다. 일단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편들 들어주자. 즉,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의 시대에 탄생한 모든 이념들이 목적론적 진보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 어떤 정치적 이념도 그 내용이 현실세계에 있는 그대로 실현된 적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새로운 이념에 대한 필요성이나, 과거 이념을 수정하는 것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특정 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단순히 이념의 내용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특정 이념을 탄생시킨 동기는 문화, 정치, 경제, 과학과 기술 등이 뒤얽힌 역사적 맥락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때 우리에게 결정적 물음은 다음과 같다.

 

•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탄생시킨 역사적 동기는 무엇인가?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의하면,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 종말론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며, 그 결과 종말론의 세속화된 형태인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모든 정치적 이념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은 위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원인을 묻는 물음에 대해 결과를 답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은 위 물음에 대해 그 역사적 동기조차 종말론이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기독교적 종말론이라는 사고방식 이외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요인들은 인류 역사에서 사소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탄생하려면, 종교가 사회의 통합 원리라는 신념이 약해진 과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과정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직업군의 다양화, 계층 분화, 이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 등과 같은 것이 없었더라면 실현되기 힘들었다. 정치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탄생시킨 역사적 동기는 세속화 그 자체이다. 이때 세속화는 종교 사장론을 함축한 세속화의 규정 방식이나 이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권위가 약화된 사회 상태를 뜻할 뿐이다. 근대 및 현대적인 것의 특징들은 그러한 사회 상태에 관한 것이지, 결코 종교 사장론을 함축하거나 기독교적 종말론에 개념적 뿌리를 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특징들이 형성되는 과정에 과거의 사고방식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 점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킬 수 없다. 이 사실은 세속화 과정을 ‘주제 생성’, ‘과거 전통의 재구성으로서의 문제 해결 과정’, ‘새로운 세계 이해 및 관점의 생성’, ‘새로운 주제 설정’이라는 역사적 템포들로 중첩된 과정, 즉 ‘재구성의 변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우 분명해진다.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없다. 설령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받아들여도, 그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하려면, 단순히 세속화 과정을 부정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가치 체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기독교의 가치 체계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일 수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6.25 사변, 베트남 전쟁, 환경 위기, 극심한 빈부 격차와 같은 사실들은 인류 역사가 진보의 경로를 밟고 있다고 낙관할 수 없게 만든다. 이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진보의 수단으로 규정하고 현재의 위기를 발생시킨 원흉으로 잘못 판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잘못된 것이지, 현재의 부정적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좀 더 나은 가능한 미래’를 지향하는 상식적 진보 개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과 기술은 필수적이다.

 

목적론적 진보 개념이 기독교적 종말론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진보 개념에 대한 모든 비판은 기독교의 가치 체계로 전이될 수박에 없다. 이러한 까닭에,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세속화 과정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가치 체계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없다.

• 설령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그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없다.

• 따라서 기독교적 종말론의 세속화 입장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대표할 뿐이다. 종말론과는 다른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종말론과는 다른 기독교적 사고방식에 기대어 종교 시장 논리를 옹호할 수 있을 가능성은 남는다. 하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세속화 및 종교 시장 논리와 관련하여 논의된 적이 없다. 논의된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기독교적 사고방식의 세속화 입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며, 또한 그 입장을 받아들이더라도, 이로부터 종교 시장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