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추리(Reasoning)

착한왕 이상하 2010. 8. 26. 00:41

추리

 

 

1.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하거나 문제에 대한 해결안을 제시할 때 그 주장이나 해결안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이나 해결안은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힘들다. 즉, 상대방의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주장이나 해결안은 근거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근거로 통계치 및 실험 결과와 같은 증거, 주장에 대한 이유, 현상에 대한 설명 등을 들 수 있다.

 

추리(reasoning)는 어떤 주장을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거들을 찾거나, 주장이나 문제 해결안에 대해 근거들을 제시하는 사고 과정 혹은 사고 활동을 뜻한다. 즉, 추리는 ‘근거 찾기’와 ‘근거 제시’라는 사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근거 찾기의 추리 과정은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사고 활동과 연관되며, 근거 제시의 추리 활동은 그러한 답에 대한 근거들을 명확히 하는 사고 활동과 연관된다. 근거에서 그럴듯한 혹은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리 과정은 근거 제시의 또 다른 측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답에 대한 근거들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역으로 그 근거들에서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추리 과정을 ‘근거 찾기’와 ‘근거 제시’로 규정하는 경우, 이것은 화자나 문제 해결자에 중심을 둔 것이다. 하지만 청자의 관점에서 추리를 접근하는 경우에도, 추리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 방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청자의 관점에서 추리는 누군가의 근거들을 이해하는 사고 활동을 뜻하기 때문이다. 추리의 두 과정인 ‘근거 찾기’와 ‘근거 제시’는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둘을 구분하여 논하는 것이 좋다. 먼저 근거 찾기의 추리 과정을 살펴보자.

 

 

 

2.

누구에게나 삶은 문제 해결 과정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해결 가능한 문제가 있고, 성장 과정에서 습득한 일반 지식만으로도 해결 가능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추리 과정을 논할 때 이러한 문제 분류 방식보다는 다음과 같은 분류 방식이 좋다.

 

• 첫째, 특정 행위에 의해 해결 가능한 문제가 있다. 이때 해당 문제는 ‘이러이러한 사안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문제들을 ‘실천적 문제(practical problem)’라고 하자.

 

• 둘째, 특정 진술의 참 혹은 거짓에 대한 판단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있다. 이때 해당 문제는 ‘이러이러한 사안에 대해 무엇이 참인가?’와 같은 질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문제들을 ‘이론적 문제(theoretical knowledge)’라고 하자.

 

• 셋째, 특정 반응과 같은 것이 해결안으로 끝나는 문제가 있다. 이때 해당 문제는 ‘이러이러한 사안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한 문제들을 ‘반응 문제(response problem)'라고 하자.

 

문제의 종류에 따라 추리 과정의 성격을 따져 볼 수 있다. 이를 논외로 한다면, 근거 찾기의 추리 과정은 문제 해결의 일반 절차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문제의 재구성 과정>

• 문제 해결자는 자신의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선변한다. 이때 문제는 그러한 정보들에 의해 재구성된다. 문제 해결자는 해결하려는 문제를 이미 해결한 적이 있거나 고민한 적이 있는 다른 문제들과 비교함으로써 문제를 구체화하거나, 하부 문제들로 쪼개기도 한다. 해결하려는 문제가 하부 문제들로 쪼개진 경우, 해당 문제는 단계적 절차를 밟아 풀리게 된다. 이때 그러한 단계적 절차는 선형적 관계뿐만 아니라 유기적 연결망을 형성하기도 한다.

 

  P를 해결해야 할 문제, P1, P2, P3를 P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하부 문제들이라 하자. 이때 P1, P2, P3를 P의 뿌리들이라 부르자. 위 그림의 경우, P는 P1, P2, P3의 단순한 선형적 관계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다. P는 P1과 P2의 공조 관계에 의해 해결 가능한 문제, 그리고 P3와 선형적 관계를 맺는 문제에 의해 해결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심사숙고 과정>

심사숙고(cogitation) 과정이란 문제와 합당한 답, 즉 해결안을 연결하는 사고 과정이다. 이때 근거들은 문제와 해결안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갖는다. 문제가 근거들을 매개로하여 해결될 때, 문제 해결 과정에 추리가 개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해결안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른 근거들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원래 문제는 잘못 설정된 것으로,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혹은 새롭게 재정의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위 문제 해결 과정의 절차를 고려할 때 근거 찾기의 추리는 심사숙고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아니 추리를 심사숙고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심사숙고 과정은 문제 해결의 전체 과정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 해결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문제의 재구성 과정>에서도 심사숙고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문제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와 다른 문제 사이의 연관성을 찾는 경우, 그 연관성에 대한 근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3.

근거 찾기의 추리 과정은 의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선택된 근거는 의식되어도, 근거를 선택하는 과정은 명백히 의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거 찾기 추리의 결과인 ‘문제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결안’에 대한 근거들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까닭에, 만족할만한 해결안에 도달한 사람도 자신의 근거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근거 제시의 추리 과정은 해결안에 대한 근거들을 구체화하고 명확히 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근거 제시 과정에서 불필요한 근거들은 제거되고, 암묵적인 근거들은 명확해진다. 또한 자신의 해결안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근거들에서 그럴듯한 혹은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추리 과정은 근거 제시의 또 다른 측면으로 여겨질 수 있다. 자신의 답에 대한 근거들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역으로 그 근거들에서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근거 제시의 추리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다. 그 하나는 독백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대화의 측면이다. 독백의 측면에서 근거 제시 과정을 접근하는 경우, 추리는 자신의 주장이나 문제 해결안이 합당한지를, 즉 근거들을 바탕으로 그것을 그럴듯하거나 확실한 것으로 판단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과정이다. 즉, 자신의 주장이나 해결안과 근거들의 연결성이 정당한지를 검토하는 과정이다. 대화의 측면에서 근거 제시 과정을 접근하는 경우, 추리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상대방이 제시된 근거들을 받아들인다면, 그 근거들에 바탕을 둔 주장이나 문제 해결안도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화의 측면에서 근거 제시 과정을 접근하는 경우, 추리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공적 권위(public authority)를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근거 제시 과정을 독백 혹은 대화 중 어떤 측면에서 접근하든, 추리는 심사숙고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근거 찾기와 제시라는 추리 과정 모두에 공통된 점은 심사숙고이다. 이러한 까닭에, 심사숙고는 추리의 핵심이며, 추리는 사고의 핵심으로 여겨진다. 무엇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4.

좋은 추리란 무엇인가? 제시된 근거들이 어떤 주장이나 해결안을 옹호하는 데 결정적이거나 충분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근거들이 특정 행위, 믿음, 반응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경우, 그 근거들과 연관된 추리 과정도 좋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추리에 대한 평가는 추리 과정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추리 과정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이다. 따라서 추리에 대한 평가를 가지고 실제 추리 과정을 짐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때 타당한 논증 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의 평가 기준이 마치 추리의 평가 기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논증을 하기 위해 추리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추리에 대한 평가가 논증에 대한 논리학의 평가 기준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실제 논증에 대한 평가는 논증의 내용적 맥락에 의존적인 까닭에, 그 평가 또한 논리학의 평가 기준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논증 형식의 타당성 여부는 무조건적이 아니라, 특정 조건들 아래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실례로 추리의 기본 단위는 참 거짓 판단 가능한 진술들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들 수 있다. 그러한 조건에 따른 형식 절차나 기준은 실천적 문제나 반응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적용되기 힘들다. 따라서 추리는 논증 형식을 다루는 논리학의 하부 분과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특정 조건들 아래 성립하는 논리학의 각 규칙은 오히려 추리를 모방한 추상적 도구, 혹은 추리가 그러한 조건들을 만족하는지를 따지는 진단 도구로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추론이란 무엇인가? 추론은 추리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정 ‘사고 패턴’들을 일컫는다. 그러한 사고 패턴들은 데이터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정 패턴들이다. 그러한 패턴들로 연역, 귀납, 유추, 가추 등을 들 수 있으며, 추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추론 패턴들의 복잡한 연결망으로 구성된다. 그러한 연결망은 믿음 체계의 고정, 수정 및 변화 과정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추리 과정은 역동적인 사고 활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위 글은 철학에서는 하만(G. Harman(1986), Change in View, Cambridge University) 이후의 추리에 대한 논쟁, 그리고 인지 심리학의 여러 입장에 근거한 것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것임을 밝혀둔다. 추리, 추론, 비판적 사고 등은 사람들이 자주 거론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간의 관계는 여전히 애매모호하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추론과 합리성>에서 다룰 것이다. 물론 그 원고가 완성되어도 출판되는 일은 없겠지만 ...

 

 

 

덧글

 

최근 들어 추리, 추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라는 용어는 대중을 유혹하는 선동 문구에 자주 등장한다. 사교육 강사들은 ‘추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며, 모 대학 총장은 ‘비판적 사고’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또한 방학 때마다 영재 스쿨을 열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를 가르치는 대학들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그런데 추리, 추론,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라는 용어를 입에 달고 사는 자들 중 몇이나 주기적으로 최근 인지 심리학이나 인지 과학 논문들을 읽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또 추리나 비판적 사고에 대한 여러 이론이 갖는 유용성, 단점, 한계에 대해 고민을 한 자는 과연 그들 중 몇이나 될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이 땅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치장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느 대학 영재 코스를 마친 초등학생이 ‘논리적 타당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자식을 대견스러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아이가 어떤 사안을 놓고 벌이는 토론에서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다. 아이의 여러 능력이 유기적으로, 또 자연스럽게 결합하도록 해주는 체계적 훈련 과정 속에서만 아이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집중력과 끈기라는 덕목을 체득할 수 있다.

 

요새 개한민국 분위기를 볼 때 위 글을 짜깁기해 상업적 목적으로 도용할 인간도 있을 것이다. 2~3평 방 몇 개를 운영하는 속칭 영재 학원에서조차 입학시험을 보고, 그 결과를 가지고 부모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을 사용한다. 나로서는 이러한 세태를 방관하며 비웃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한 마디만 부모들에게 해주고 싶다.

 

“어린 아이의 머리가 한 번 망가지면 쉽게 되돌리기 힘들며,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가 져야 한다.”

 

위 주장은 상대방에게 공포를 자아내어 설득력을 높이려는 수사에 불과한가? 각자 따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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