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의미론적 결혼(Semantic Marriage)

착한왕 이상하 2010. 9. 3. 06:05

의미론적 결혼

- 비대칭성 -

 

 

1.

의미론(semantics)은 단어와 대상, 단어의 조합과 대상들의 조합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의미가 상징 기호의 사용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언어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인 의미론의 건설은 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 단지, 그러한 사용 맥락을 특정 조건 아래 규정지을 때 부분적으로 통용 가능한 의미론을 건설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는 단어의 의미를 개념의 범주에 직접 대응시키는 것이다. 개의 범주를 살펴보자.

 

• 개=<개들의 모임|개의 특징들>

 

개들의 모임을 단어 ‘개’의 외연(extension)이라 하며, 개들의 특징들을 함축한 믿음들을 ‘개’의 내연(intension)이라 한다. 의미를 구성하는 내연과 외연에 범주를 구성하는 두 요인을 대응시키는 관점을 ‘의미론적 결혼(semantic marriage)’라 한다.

 

 

 

2.

가장 이상적인 의미론적 결혼은 어떤 경우일까? 개와 고양이 모두 애완용 동물에 속한다. 개와 고양이 모두 애완용 동물이 갖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와 고양이 모두 애완용 동물이 갖는 특징들로만은 구분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의 내연은 애완용 동물보다 더 많은 특징을 가져야 하며, 또 고양이와 구분되는 특징도 가져야 한다. 반면에 개의 외연은 고양이의 외연과 중첩되지 않는 동시에 애완용 동물에 속하게 된다. 내연의 폭과 외연의 크기 사이에 성립하는 이러한 비대칭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위 도식에서 ‘애완용 동물’의 외연은 애완용 동물의 모임, ‘개’의 외연은 개들의 모임, ‘고양이’의 외연은 고양이들의 모임, 그리고 ‘푸들’의 외연은 푸들들의 모임으로 규정된다. ‘애완용 동물’의 내연은 애완용 동물의 특징들을 함축하는 믿음들, ‘개’의 내연은 개의 특징들을 함축하는 믿음들, ‘고양이’의 내연은 고양이의 특징들을 함축하는 믿음들, 그리고 ‘푸들’의 내연은 푸들의 특징을 함축하는 믿음들로 규정된다. 이때 푸들에서 애완용 동물로 거슬러 올라갈 때 외연의 크기는 증가하고, 내연의 폭은 감소한다. <보기> 중 이러한 내연과 외연의 비대칭적 관계에 대한 평가로 올바른 것을 한 번 골라보자.

 

<보기> 

 

(가) <푸들, 개, 애완용 동물>에서 내연의 폭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는 현상을 <뿔 달린 도깨비, 도깨비, 괴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괴물 및 도깨비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는 경우, 즉 그것들의 외연이 공집합 에 비교되는 경우, <뿔 달린 도깨비, 도깨비, 괴물>에서 외연의 크기가 오른쪽으로 갈수록 증가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 타조를 처음 본 사람은 조류와 포유류 양쪽에 속하는 동물로 잘못 분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타조’의 외연은 조류와 포유류 양자에 해당하는 특징들로 구성된다.

 

(다) 임의의 세 개념 A, B, C를 가정해 보자. C의 외연이 A와 B보다 크다면, C의 외연을 포함하는 D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어야만 한다.

 

 

괴물 및 도깨비들의 존재가 가정되지 않는다면, 도깨비와 괴물의 외연은 공집합에 비교될 수 있다. 따라서 (가)는 적절한 평가이다. 타조를 처음 본 사람이 조류와 포유류 양자에 속하는 동물로 분류하는 경우, 양자에 공통된 특징들은 ‘타조’의 외연이 아니라 내연과 관련되어야 한다. (나)는 부적절한 평가이다. (다)에서 A와 B의 외연은 C를 기준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는데, 이로부터 C의 외연을 포함하는 D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실례로 <푸들, 개, 애완용 동물>에서 ‘애완용 동물’의 외연이 동물에 속함은 <푸들, 개, 애완용 동물>에 국한된 맥락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가)만이 내연과 외연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다.

 

 

 

3.

이상화된 의미론적 결혼은 다음 조건이 성립할 때 가능하다.

 

• 각 개념에 대응되는 모임들, 곧 외연들은 서로 중첩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대상들의 엄격한 분류가 가능해야 함을 함축한다.

 

• 대상들의 그러한 엄격한 분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개념의 외연을 일률적으로 규정해 주는 특징, 곧 본질적 속성(essential property)이 있어야 한다. 개는 다른 것과 구분될 수 있는 개만의 속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합리적 동물’로 규정하는 관점에는 사람만이 합리적 동물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조건은 너무나 이상적이다. 개념의 범주화에서 발견되는 구조화된 지식 체계는 다양한 해석과 맞물린 만큼 탄력적이며, 또 정합적인 하나의 체계로 기능하는 것도 아니다. 성장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보이는 대상들의 경험 속에서 생명체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것은 맞지만, 이로부터 그 개념의 사용이 그러한 대상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또 언어 습득 과정에서 개념의 범주화에 결정적인 것은 특정 대상을 표본으로 하여 유사한 것들을 묶어 내는 과정이며, 여기에 본질적 속성과 같은 것이 가정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대상들에서 발견된 유사한 특징들이 믿음으로 고정되면 개념의 영역을 상징하는 기능을 갖게 되고, 대상들이 각 영역에 분포되는 방식은 상황 의존적이다. 개념의 사용에서 발견되는 범주화가 세상에 대한 구조화된 지식 체계를 반영한다고 할 때 그 지식 체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세상에 대한 구조화된 지식 체계가 일명 ‘연역’, ‘귀납’, ‘유추’, ‘가설 생성 추리’라는 추론 및 추리의 패턴과 맞물려 기능하는 방식을 알 때 분명해진다.

 

 

퀴즈: 다음 글을 읽고 반박해 본다면?

 

 

물의 화학적 구조는 H2O이다. 그 구조는 물만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물은 다른 액체와 구분된다. 만약 단어 ‘물’의 의미를 H2O로 고정시킨다면, ‘물’은 애매모호함 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많은 논쟁은 단어의 의미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한 애매모호함을 없앨 수 있다면, 불필요한 논쟁은 사라질 것이고, 그로 인한 시간도 절약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사회적으로 간접비용만 발생시키는 불필요한 논쟁을 없애기 위해 단어들의 의미를 화학적 구조식이나 유전자 구조식 등으로 고정시킨 사전을 만들고 이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학습시켜야 한다.

 

   

위 제시문의 논의 구조 패턴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물’의 의미를 H2O로 고정시킨다면, ‘물’은 애매모호함 없이 사용될 수 있다.

2. 단어의 애매모호함을 없앨 수만 있다면, 불필요한 논쟁은 사라지고, 그로 인한 시간도 절약된다.                                                                                    

3. 정부는 단어들의 의미를 화학적 구조식이나 유전자 구조식 등으로 고정시킨 사전을 만들어 사회에 퍼뜨려야 한다.

 

하나의 논증 형태로 귀결된 제시문의 결론은 3이다. 3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3이 근거하고 있는 전제들인 1과 2를 공략하거나, 1과 2를 받아들이더라도 3을 주장할 수 없다는 논거를 펼쳐야 한다. 전자의 반박 방법을 택하는 경우,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하여 답하면 된다.

 

• 대상의 과학적 분류 방식에 의해 애매모호함 없이 단어의 의미를 고정시킬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단어의 일상적 의미가 그런 방식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개의 유전적 구조가 여러 상황 속에서 발견되는 개의 경험적 특징들을 함축할 수 없다면, 개의 의미와 맞물린 그러한 특징들을 함축한 믿음들은 여전히 개의 의미를 따질 때 필요하다.

 

• 컴퓨터 마우스를 보기로 들어보자. 컴퓨터 마우스의 재질은 플라스틱과 같은 인공 합성물의 화학적 구조식을 갖고 있다. ‘컴퓨터 마우스’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러한 화학적 구조식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이러한 사항을 고려하여 제시문의 논의에 대한 반박 논거를 스스로 구성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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