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1.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다. 많은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 것을 자살이라고 부르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더라면 독배를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나,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죽음을 ‘자살(suicide)’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자살로 분류될 여지가 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의도적 행위’라는 자살의 일반적인 의미를 그대로 따를 때 자살에 대한 원인과 평가 방식이 다양함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업가는 사업 실패로 인해 고통을 받다가 자살했다. 어떤 철학자는 삶 자체에 의미가 없음을 확신하고 자살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시고 자살했다. 치료하기 힘든 중병에 걸린 어떤 사람은 치료를 거부하고 자살했다.
만약 모든 종류의 자살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아퀴나스(T. Aquinas)는 자살을 스스로에 대한, 타인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행위로 규정했다. 또 유교(儒敎) 전통에서는 몸을 부모가 물려준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살을 엄격히 금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기독교와 유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두 종교에는 삶은 누구에게나 의무와 같은 것이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러한 관점에 따를 때 자살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이 될 수 없다. 즉, 자살은 금기를 깬 행위로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없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이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자살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대신 스스로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자살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그가 자살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은 자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 단지 신념을 지킴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
• 이때 신념을 지키는 것이 죽음에 선행한다.
•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자살의 의도를 가지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마시기 전에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물음을 놓고 고민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그러한 고민을 했더라면, 위 논증은 아퀴나스와 공자(孔子)의 입장, 즉 ‘자살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에 힘을 실어줄 수 없다. 더욱이 따라서 위 논증이 아퀴나스나 공자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려면, 그 결론은 ‘소크라테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수정되어야 한다. 이때 아퀴나스나 공자는 ‘자살 분류학’, 즉 ‘허용 가능한 자살과 그렇지 않는 자살을 구분하고 그 정도 차이를 논하는 분류학’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아퀴나스에게서 그러한 분류학을 엿볼 수 있다.
2.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지 않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예외적인 혹은 허용 가능한 자살에 대해 논하는 경우, 원죄설은 아퀴나스에게 논증 맥락의 틀처럼 작용했다. 원죄설에 따르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선을 결여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얼마나 덜 악한가’라는 물음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모든 자살은 선을 결여했다는 점에서 악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덜 악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 타인을 위한 자살 행위에 담긴 희생의 동기는 도덕적으로 찬양받을만한 것일지라도, 자살 행위 자체는 선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타인을 위한 자살이나,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신념을 지키기 위한 자살을 정말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려면,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우, 자살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자살에 대한 평가는 자살 자체가 아니라 자살의 동기 및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도덕적으로 칭찬할만한 자살이 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흄(D. Hume)과 같은 이는 ‘자살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선택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흄의 이러한 주장은 ‘자유로운 선택의 범위’, ‘선택과 의무의 관계’ 등에 관한 논쟁과 맞물려 있다. 그러한 논쟁을 고려하지 않을 때 자살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반대 입장, 즉 아퀴나스나 공자의 입장에서 제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3.
자살은 스스로에 대한, 타인에 대한, 그리고 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기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입장에 따르면,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삶을 스스로에 대한, 타인에 대한 의무로 간주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 관계를 포함한 사회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삶은 신이 주신 생명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의무가 된다. 이는 ‘자살’을 ‘자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이때 ‘자연적인 것’은 삶을 의무로 만드는 규범처럼 여겨진다.
자연을 창조한 것으로 가정된 신과 같은 것을 믿든 말든, 이것과 무관하게 삶을 ‘자연적인 것’으로, 자살을 ‘자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 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단지, ‘자연적인 것’이라는 규범이 자연 자체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을 창조한 어떤 존재에 기인한 것인지를 놓고 입장이 갈릴 뿐이다. 자살을 자연사(自然死)로 분류하기 싫어하는 사고방식에는 ‘자연스러운 것’을 삶을 의무로 만드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 또한 자연적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이로부터 ‘자연적인 것’이 ‘살아야만 하는 것’에 대한 규범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는 경우, 이러한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답하는 경우, 삶은 인간에게 의무이며, 자살은 의무를 저버린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했더라도, 신이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생명이 자연에서 기인한 것일지라도, 그래서 삶이 자연적인 것들에 의해 제한되어 있을지라도, 자연적인 것이 삶을 의무로 만드는 규범일 수는 없다. 따라서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삶을 의무로 볼 필요가 없으며, 삶을 의무로 규정하는 ‘신’과 같은 개념에 무관심해야 한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F. Nietzsche)의 주장은 이러한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4.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지 않는 입장과 자살을 그러한 선택 대상으로 보는 입장은 ‘누구의 자살을 막으려는 행위’를 놓고 명백한 차이를 보인다.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지 않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경우, ‘누구의 자살을 막으려고 하는 행위’는 의무이며, 도덕적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한 행위이다. 자살을 그러한 선택 대상으로 보는 입장에서 접근하는 경우, ‘자살을 막으려고 하는 행위’는 의무도 아니며, 도덕적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한 행위도 아니다. 그 행위는 오히려 필요 이상의 행위 혹은 개인의 선택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때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보는 사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난제가 발생한다.
• 어느 청소년이 중요한 시험에 실패하고 자살하려고 한다. 당신은 자살을 개인의 선택 대상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 청소년이 자살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청소년의 자살을 막아야 하는 당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청소년은 아직 삶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살아야 한다’는 식의 대답은 위 난제에 대한 합당한 대답이 될 수 없다. 그러한 대답에는 ‘누구에게나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그 관점은 삶을 의무로 보는 관점과 양립 가능한 반면, 위 물음에 답해야 하는 사람은 삶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가정되었다. ‘청소년은 삶의 의미나 가치에 대해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살아야 한다’는 식의 대답은 자살을 개인의 선택 대상으로 보는 입장에 의해 뒷받침되기 힘들다. 그러한 대답을 받아들이면, 삶의 의무를 가정할 여지가 생기며, 이때 자살은 삶의 의무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위 난제에 대해 자살의 동기나 목적을 고려할지도 모른다. 자살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따라 자살에도 가치 매김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살의 목적에 대한 평가는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차라리 프로이트(S. Freud)처럼 자살을 막으려는 행위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는 입장’과 더 잘 어울릴 수 있다.
5.
자살을 현실적 문제로 규정하는 경우, 자살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대상으로 보지 않는 입장과 그러한 선택 대상으로 보는 입장 모두 문제 해결을 위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 전자의 입장은 ‘허용 가능한 자살’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을, 그리고 후자의 입장은 ‘자살 행위를 막아야 하는 경우’라는 예외적인 상황을 인정해야 하며, 그러한 예외적인 상황은 두 입장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의해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결단을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선택을 ‘개인의 의지에 따른 선택’ 혹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거나, 자살 행위에 개입해야 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하는 것은 위 물음에 대해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위 물음은 근본적으로 ‘자유’와 ‘선택’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위 물음에서 ‘자유’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철학자들이 떠들었던 것처럼 자살을 삶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행위로, 혹은 개인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 행위로 규정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위 물음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야말로 자살에 관한 진정한 탐구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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