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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축복받을 회장님은? (수정)

착한왕 이상하 2016. 1. 19. 00:46

구원

- 축복받을 회장님은 -

 

 

<논증 퀴즈>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어느 대기업 회장이 있다고 해보자.

 

• 그는 사회에서 합의된 절차에 따라 기업을 세우고 번창시켰다.

• 그는 스스로 도덕적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다.

• 그는 의무 이상의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 그는 자신이 버는 것만큼 사회에 기여를 한다고 믿는다. 즉, 자신의 기업이 번창하면 고용이 늘고, 이로 인해 덕을 보는 사람들도 많아진다고 믿는다.

• 그는 사후 구원과 같은 것을 믿지 않으며, 그 어떤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당신은 위 조건을 만족하는 회장을 찾아가 공익을 위한 연구소 하나를 설립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회장은 그런 연구소를 짓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회장은 구원과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연구소를 설립하면 신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로는 회장을 설득할 수 없다.

 

회장을 설득할 수 있는 논증을 만들어 본다면?

 

 

 

다음 글의 내용은 위 <논증 퀴즈>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구원’과 ‘의무 이상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

 

 

1.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의 일부를 차지하는 그 이야기를 원죄설과 연관시켜 해석한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영지주의의 한 분파인 마니교(manichaeism)의 교리에 심취했다. 마니교는 ‘선(善)을 대표하는 빛’과 ‘악(惡)을 대표하는 어둠’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설명하려는 교리 체계를 갖고 있다. 마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빛과 어둠 혹은 선과 악의 긴장 관계를 나타내는 표본과 같다. 인간의 영혼은 빛을 갈망하지만, 육체는 어둠을 갈망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여러 문명이 교차하던 고대에 다양한 세계 이해를 수용하면서 발전한 종교이다. 3~6세기 경의 성화들을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실례로 첨부한 아우구스티누수의 그림은 해탈을 바라는 인도의 승려 모습에 가깝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준 신플라톤주의자들 중 일부는 실제 인도에 갔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묘사한 다양한 그림들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아는 기독교도 문명 교류사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들의 도움으로 로마와 밀라노로 가 수사학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때는 멸망을 앞둔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384년 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86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스(Ambrose)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암브로스와의 만남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로마에서 천체 현상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접하고, 천체 현상에 대한 마니교의 설명 방식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심은 악의 기원에 대한 마니교의 설명 방식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악의 기원에 대에서는 알 수 없다’는 회의적 입장을 지지했다. 그랬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이었다.

 

신플라톤주의와 양립 가능하도록 교리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달한 결론은 ‘어둠은 단지 빛의 부재’라는 것이었다. 이때 ‘선의 신’과 ‘악의 신’을 가정하는 마니교의 이원론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진정한 악은 ‘악 자체’가 아니라 ‘선의 완전한 결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2.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사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간이 사는 지상계는 신성(神聖)이 구현된 것으로 여겨진 천상계에만 대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원래 살았던 에덴동산’에도 대비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악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선한 존재도 아니다. 원죄설에 따르면, 선 자체는 오로지 신만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상계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시절의 흔적’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양심’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구는 인간을 위한 일종의 ‘도덕 훈련장’과 같은 곳이다. 지구가 인간을 위한 도덕 훈련장이라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허용 불가능한 악을 제거하는 전사와 같은 존재이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 의지’는 인간이 그러한 전사일 수 있도록 해주는 필요조건이며,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

 

• 인간은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의 무지로 인해 양심에 따른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선택은 인간이 도덕적 존재이기 위한 필요조건과 같다.

• 양심에 따라 선택하던 선택하지 않던, 이것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다. 도덕적 악은 양심에 반하여 선택하는 것이다.

• 신은 자유 의지에 따른 인간의 선택 행위에 개입하지 않는다.

• 악에 없는 세계, 즉 선만이 충만한 세계에서는 인간이 불필요하며, 자유 의지는 신이 악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다.                                

• 따라서 ‘악이 존재하더라도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가 있는 세상’이 악과 ‘자유의지 모두 없는 세상’보다는 우월하다.

 

자유 의지 개념과 관련된 위 논증과 같은 것을 놓고 벌어진 논쟁 역사를 제쳐 둔다면, 지구가 인간에게 ‘도덕 훈련장’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이 인간의 선택 행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도덕 훈련’은 ‘보상’과 관련된 개념이다. 이때 지구는 ‘도덕 훈련장’에, 도덕 훈련 과정은 ‘현세’에, 그리고 구원은 ‘현세의 도덕 훈련에 대한 보상’에 비유된다. 즉 도덕 훈련은 사후 구원의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는 인간을 걸러내는 것이다.

 

 

 

3.

어떠한 인물이 사후 구원의 고려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신이 어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해서, 신에게 돌아갈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또 신이 그로 인해 손해를 볼 일도 없다. 간단히 말해, 신은 인간을 구원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사후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가정된 영혼 불멸설은 원죄설과 함께 중세 기독교 교리 해석에서 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영혼 불멸설은 육체나 의식을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간주하는 개신교에서는 부정되게 된다. 사후에도 남게 되는 영혼으로 '사후 구원의 매개물'로 간주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 국한 된것이다. 이러한 가톨릭과 개신교 교리 차이와 무관하게, 사후 구원론과 원죄설 모두를 인정할 것인지, 둘 중 하나만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둘 모두를 부정할 것인지에 따라 기독교의 교파는 나뉠 수밖에 없었다.

 

원죄설과 함께 사후 구원론을 옹호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필요한 것은 선과 ‘조건 없는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을 연관시키는 것이었다.

 

• 사후 구원으로 신에게 돌아갈 이득도, 손해도 없다.

• 단지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신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축복을 내릴 의무는 없다.

• 신이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는 이유는 신이 ‘조건 없는 사랑’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신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현세에서 도덕 훈련을 잘 수행한 사람만이 구원의 고려 대상이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린다.                                                                             

• 따라서 신의 조건 없는 사랑을 축복과 연관시킬 때, 신의 조건 없는 사랑과 구원 개념은 서로 모순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위 논증과 같은 것을 놓고 수세기 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한 논쟁을 논외로 하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 개념을 인간 행위에 적용해 보자. 신이 도덕 훈련을 마친 어떤 인간을 구원해준다고 해서, 신에게 돌아갈 득도, 손해도 없다. 이러한 구원에 해당하는 행위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 남을 도와줄 때, 그로 인한 보상과는 무관하게 시간적, 금전적 혹은 육체적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나마 신의 구원에 대응하는 인간의 행위는 ‘오로지 타인에게만 득이 될 뿐, 자신에게 돌아올 득을 기대할 수 없는 행위’이다. 즉 ‘의무 이상의 행위’ 혹은 ‘반드시 할 필요는 없지만 선하다고 불릴 수 있는 행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은 인간의 선택 행위에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은 예수를 통해 ‘조건 없는 사랑’ 혹은 ‘아가페적 사랑’이 무엇인지를 인류에게 보여 주었다. 서로 합의한 도덕적 의무를 다한 사람보다는 양심에 따라 의무를 다한 사람이 구원의 우선적인 고려 대상이 된다. 서로 합의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동기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라 의무를 다한 사람보다는 ‘의무 이상의 행위’를 한 사람이 구원의 최우선 고려 대상이 된다. ‘의무 이상의 행위’는 ‘조건 없는 사랑’에 기인한 것이며, 인간에게는 심지어 자기희생을 감수한 행위일 수 있다. 조건 없는 사랑에서 기인한 행위야말로 인간이 예수를 통해 보여준 신의 뜻에 따른 행위이다.

 

공자(孔子)가 이 글을 본다면, ‘조건 없는 사랑’ 혹은 ‘아가페적 사랑’을 ‘인(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와 공자가 ‘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기원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 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득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그 동의 가능성은 심원한 종교성 혹은 세계에 대한 종교적 이해보다는 ‘자기 손해나 희생을 감수한 행위를 높이 사는 인간사의 일반 성향’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