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학습 자료를 만들기 위해 써진 것이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은 철학에 대한 나의 입장과는 무관한 것임을 밝혀둔다.
철학의 페르소나(Persona of Philosophy)
모든 사회에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 의무, 본분 등의 요구 사항이 있다. 이를 심리학자 융(G. Jung)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명명했다. ‘페르소나’는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가 역할에 따라 썼다 벗었다 하는 가면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가면은 배우의 본 모습이 아니다. 융은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형성된 인격을 ‘페르소나’로 불렀다. 이러한 ‘페르소나’는 ‘특정 직업군의 사회적 역할 및 성격’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철학의 페르소나(persona of philosophy)’는 철학을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하나의 연구 주제가 된다. 철학 또한 사회 속에 기능하는 직업으로 여겨질 수 있고, 이때 철학자는 그러한 직업의 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페로소나를 규정하는 것은 철학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나 사회적 의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지고 해결하는 방식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은 철학자의 본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의 페르소나를 규명하려면, 특정 시기 및 지역을 지배한 철학적 물음과 답변 방식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철학자 없는 철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철학이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알려면 ‘철학의 페르소나’가 형성된 과정을 추적해야 한다.
철학을 ‘페르소나’의 관점에서 파악할 때, 철학은 문화 및 역사와 무관한 학문으로 규정될 수 없다. 특정 시대를 풍미한 철학자들의 성격, 사회적 역할, 그들의 질문 및 대답 방식에 의존적인 ‘페르소나’를 규명하지 않고서는 그 시대의 철학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살펴보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철학을 다룰 때 빼먹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둘을 다룰 때, 두 인물의 사고방식에 공통된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가정된 것에 근거해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설명 방식은 그리스 철학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 때문에, 그러한 설명 방식은 ‘그리스 철학의 페르소나’를 규명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페르소나를 가진 이들 사이에도 입장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진리의 원천은 초월적인 형상계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그 원천은 자연의 질서를 가능하도록 해주는 원리 혹은 법칙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 학문 분류 방식을 살펴보면, 실천적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 질병 치료와 관련된 의학,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변화를 추적하는 자연사는 빠져 있다. 실천적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은 자연 현상과 무관한 것으로, 그리고 의학과 자연사는 자연의 질서에 담긴 원리 혹은 법칙성을 발견하는 것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 철학의 페로소나는 어떤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옹호되거나 비판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이에 대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의 철학은 중세에 권위를 누리면서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는 페로소나’를 대표하게 되었다. 자연 또한 인간이 개입하여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는 관점이 싹트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철학의 새로운 페르소나’가 요구되었다. 르네상스 말기에서 근대 초기를 장식한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등과 같은 인물은 그러한 새로운 페르소나를 형상한 인물들로 거론된다.
철학을 ‘페르소나’의 관점에서 파악할 때, 철학은 문화 및 역사와 무관한 학문으로 규정될 수 없다. 물론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끈 물음들이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 등에 관한 물음들을 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물음들 때문에, 철학이라는 학문을 문화 및 역사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물음들은 누구나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물음들은 자의식을 가지고 주변에 호기심을 나타내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인지 활동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특수성 없이는 철학이라는 것은 인류사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철학 때문에 그러한 물음들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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