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K 비판적 사고/GCTC 청소년 교육

GK 교육 단상: 치밀한 사고, 8

착한왕 이상하 2012. 3. 29. 04:13

* 다음 글을 저자 이상하의 허락 없이 변형하여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 GK 교육 단상: 치밀한 사고, 8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란 어떤 사람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음 퀴즈를 풀어 보자.

 

[퀴즈 1] 다음 주장은 근거를 가진 확실한 주장일까? 즉, 결론에 대한 근거가 되는 전제들을 참으로 받아들일 때 결론에 대한 예외가 발생하지 않는 주장일까?

 

<바다의 어떤 동물>

• 바다의 어떤 동물은 포유류이다.

• 어떤 포유류는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다.

• 바다의 어떤 동물은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다.

 

일상생활에서 근거를 가진 확실한 주장은 ‘근거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결론에 대한 예외가 발생한다고 볼 수 없는 주장’에 해당한다. 결론에 대한 예외가 발생하기 어려운 경우, 근거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결론을 부정하기 힘들다. 만약 진술들의 진리치가 오로지 참 또는 거짓이고, 참이 아닌 경우는 거짓이라고 가정하면, 근거를 가진 확실한 주장은 ‘근거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결론도 반드시 참인 주장’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주장이 전제부와 결론으로 구성된 논증 형태를 지녔거나 논증 형태로 재구성 가능하다면 일명 ‘내용적으로 타당한 논증’이 된다. 따라서 위 퀴즈는 <바다의 어떤 동물>이라는 논증이 타당한지를 묻는 문제이다.

 

논증 <바다의 어떤 동물>을 살펴보면, 그 논증은 ‘바다 동물’, ‘포유류’,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라는 세 가지 범주 개념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범주 삼단 논법에 해당한다. 그러한 범주 삼단 논법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방법 중에는 ‘범주 개념에 해당하는 집합을 원으로 표상하는 방법’에 근거한 것이 있다. 그러한 표상 방법은 두 범주 개념들로 구성된 진술의 참 거짓 판단이 두 개념에 해당하는 집합의 외연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 국한된다.

 

논증 <바다의 어떤 동물>의 경우, 두 전제들로만 확실하게 결론의 참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독해만으로 알 수 있다. 주어진 전제들로만은 어떤 포유류와 바다의 어떤 동물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치밀한 사고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느껴 보게 하려면, [퀴즈 1]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는 것이 좋다.

 

[퀴즈 2] 다음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이를 보이기 위해 다음 주장의 두 전제들을 만족하는 모든 경우들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고, 그 중 결론이 참인 경우와 아닌 경우를 따져 보자.

 

<바다의 어떤 동물>

• 바다의 어떤 동물은 포유류이다.

• 어떤 포유류는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다.

• 바다의 어떤 동물은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이다.

 

논증 <바다의 어떤 동물>의 두 전제만으로는 어떤 포유류와 어떤 바다 동물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또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의 집합을 나타내는 원과 포유류의 집합을 나타내는 원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없다. 이를 고려하여 두 전제들을 만족하는 경우들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여덟 가지의 경우들이 나온다.

 

<여덟 개의 경우들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기>

* 스스로 여덟 개의 경우들을 그려 보자.

 

어떤 포유류가 바다의 어떤 동물일 때, 두 전제를 만족하는 경우는 세 개다. 어떤 포유류가 바다의 어떤 동물이 아닐 때, 두 전제를 만족하는 경우는 다섯 개다. 이때 결론이 참인 경우는 여섯 개이고, 거짓인 경우는 두 개다. 두 전제를 받아들인 상태에서 결론에 대한 예외가 발생하기 때문에, 논증 <바다의 어떤 동물>은 타당하지 않다.

 

한정된 시간 내에서 [퀴즈 2]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 있는 학생들은 얼마나 될까? 많지 않다. 또 학년이 높아질수록 학생들은 [퀴즈 2]에 대해 꼼꼼히 따져 보면서 생각하기 힘들어 한다. 상당 수 고등학생은 아예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성장하면서 오히려 시각적 표상 능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퀴즈 2]를 함께 풀어본 고등학생들은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일시적이나마 정확히 사고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퀴즈 2]는 ‘치밀하게 생각해 보기 훈련’을 위해 만든 것이다. 어떤 것에 몰입하거나 집중하는 것이 ‘치밀한 사고’에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몰입과 집중이 치밀한 사고를 위한 결정적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퀴즈 2]에 대해 난감해 하는 대부분 학생은 스타크래프 등 게임에 몰입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뽁뽁이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것만으로도 몰입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그런 몰입 상태는 의식을 평소와는 다른 상태로 변환시켜 주기도 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쾌감을 동반한다. 나 또한 소포를 받으면 그 안에 든 뽁뽁이를 꺼내 하나도 남김없이 다 터트리곤 한다.

 

치밀한 사고를 위해서는 다음 과정이 필요하다.

 

• 문제를 구성하는 배경 지식에 대한 정확한 이해

• 문제가 묻는 질문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

• 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 구성

• 전략을 적용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 전략 수정을 위한 탄력성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과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끈기

 

[퀴즈 2]에서 요구하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논증 타당성 평가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한다. 또 범주 개념의 외연인 특정 집합을 그림으로 나타내라는 조건, 두 전제만을 그런 그림을 사용해 표상하라는 조건으로 구성된 문제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결론을 처음부터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두 전제에 또 다른 전제를 더한 것이므로 문제의 조건을 위반한 것이다. 논증 타당성 평가에 대한 기본 지식을 배운 학생도 이런 실수를 하곤 한다. [퀴즈 2]를 효과적으로 풀려면, 어떤 포유류가 어떤 바다 동물과 같은지 아닌지를 따져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포유류와 어떤 바다 동물과 사이의 관계는 주어진 두 전제를 통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포유류가 어떤 바다 동물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그림을 그리다보면, 잘 조직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동물의 집합과 포유류 집합 사이의 가능한 모든 포함 관계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눈에 들어온 단서를 어떤 포유류와 어떤 바다 동물이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에 적용해 보면, [퀴즈 2]에서 요구하는 여덟 개의 그림을 얻어낼 수 있다.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란 결국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꼼꼼히 따져 끈기 있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을 뜻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입시까지 그렇게 문제를 많이 풀어본 학생들이 왜 [퀴즈 2]와 같은 문제를 만나면 난감해 하는 것일까? 아마도 결과만을 중시하는 객관식 문제 풀이에 익숙해져 어떤 학습법에 의지해 답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습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습관화된 사고방식에 물든 학생을 ‘문제 풀이 기계’라고 하자.

 

‘문제 풀이 기계’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치밀한 사고력을 소유할 수 없다. 문제 풀이 기계가 된 과정 자체가 치밀한 사고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어느 정도 문제 풀이 기계가 되지 않고서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반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현행 입시만 살펴보아도, 그러한 반문은 근거를 결여한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 인문계 논술을 살펴보자.

 

인문계 논술 문제들을 보면, 소위 수리 추리 혹은 추론 문제라는 것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문제가 잘 안 풀리는 이유는 결코 수학적 지식이 약해서가 아니다. 그런 문제에서 요구하는 수학은 사실 기초적인 것에 불과하다. 문제가 안 풀리는 첫 번째 이유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배경 지식을 주어진 제시문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문제에 주어진 조건들로부터 모든 가능한 경우들을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치밀한 사고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밀한 사고력은 고등학생에게는 아직은 잠재되어 있다. 그 사고 능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다. 대부분 학생은 수업 콘텐츠의 질에 대한 판별력이 없다. 그저 기출 문제와의 유사성이 콘텐츠 판단의 기준이다. [퀴즈 2]와 같은 문제를 풀어보는 것도 학습 능력 강화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는 학생은 드물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알아 챌 수 있는 센스는 학력 등급과는 무관하다. 그러한 센스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나로서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학부모들은 자식들보다 한술 더 떠서 그저 수능 관련 문제만 많이 풀면 입시에 성공할 것이라 믿고, 온갖 소문에 민첩한 팔랑귀를 펄럭 거리며 이 학원 저 학원을 기웃거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식을 원하는 대학을 보내 보았자 상당수 학생은 이미 ‘마마보이’, ‘마마걸’이 된 상태이다. 굳이 ‘마마보이’, ‘마마걸’이 무엇을 뜻하는 지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8

 

‘팔’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팔자소간’이라는 말이 있다. 어찌 보면 입시 위주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 팔자로 태어난 아이들이 이 땅의 자식들이다. 성장하면서 치밀하게 사고하는 능력은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저하된다. 상당수 학생들은 단답형 문제 풀이 기계가 된다. 그리고 문제를 많이 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세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문제 풀이 기계가 되어서는 자신이 원하는 곳을 들어가기 힘들어지고 있으며,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일단 문제 풀이 기계가 되면 자신에게 잠재된 치밀한 사고력을 일깨우기 힘들다.

 

‘팔’자를 써보면 처음 출발한 곳에서 만난다. 문제 풀이 기계를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로 바꾸려면, 역시 ‘문제를 통해 바꾸어 주는 것’이 상책이다. 물론 그렇게 바꾸어 주는 문제의 성격은 입시와 직접적으로 맞물린 문제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만 한다. 사실 여기서부터 나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문제 풀이 기계를 치밀한 사고의 소유자로 바꾸어 주기 위한 문제들은 수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들은 학생들 눈치를 보아가며 슬쩍 슬쩍 가끔씩 사용한다. 어쨌든 그런 문제에 해당하는 [퀴즈 2]의 답도 ‘여덟 개의 그림들’이다.

 

 

 

* 언어와 관련하여 도는 ‘싸구려틱’한 시중 선전 문구를 보면, ‘지문 분석의 대가’, ‘유형별 문제 풀이를 통한 언어 완성’ 등을 볼 수 있다. 문제 풀이 과정을 통해 지문 분석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 향상 수준은 명백히 정해져 있다. 왜 그런지는 다음 번 기회에 알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