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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왕(燉王)과 병녀(病女)

착한왕 이상하 2013. 9. 18. 22:03

돈왕(燉王)과 병녀(病女)

   

돈왕(燉王)은 선대(先代) 왕의 기사단 마구간을 관리하던 자였다. 혼란스러운 나라가 통일되자, 기사들은 각지의 영주로 봉해졌다. 기사단의 원래 참뜻은 영주들의 횡포로 그 빛이 바랬다. 지금의 왕은 기사단을 해체시키고 나라의 평온을 되찾아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기사단 마구간을 관리하던 자는 매일같이 시장에 나와 ‘말세(末世)’라고 외치며 사람들에게 기사단의 참뜻을 설파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 섞인 비웃음밖에 없었다. 미쳐 버린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했다. 늙은 노새를 천리마로, 솥뚜껑을 황금 방패로, 그리고 쟁기를 창으로 여겼다. 솥뚜껑을 들고 쟁기를 앞세워 ‘이랴이랴’ 노새를 재촉하며 궁궐 성벽을 들이 받곤 하였다. 신하들은 지금의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늙은 돈왕을 죽이라고 간언했지만, 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은 오히려 ‘돈’에 ‘이글거리는 불빛’을 뜻하는 한자를 붙여 주었다.

 

술자리에서 돈왕이 거론되면 반드시 함께 거론되는 여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병녀’라 불렀다. 병녀는 온갖 희귀한 병을 갖고 태어났다. 한 쪽 눈은 멀었고, 그 눈의 반대 편 귀는 심히 눌려 그 형태를 구분하기 힘들며, 입은 심하게 돌아가, 밥 먹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는 항상 진물이 흘러 내렸고, 반쯤 빠진 머리카락 사이로 혹들이 튀어져 나와 보였다. 척추는 심하게 휘어 중심을 잡을 수 없어 걷는 모습이 불안했다. 게다가 한 쪽 팔이 없었다. 그럼에도 병녀는 다른 보통 여자들처럼 되려고 부단히 애썼다. 아침에 일어나 진물이 보이지 않도록 얼굴에 회칠을 하고 화장을 했다. 광목천으로 몸을 둘둘 감아 허리를 곧추 세워 남들처럼 걷는 시늉을 했다. 다만 목소리는 아름다워, 병녀가 노래를 부르면 바삐 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도 발을 멈추곤 했다. 왕은 이런 병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에게 은전 천 냥을 하사하고, 평생 책만 읽어줄 배필을 찾고 있는 가난뱅이 장님 선비를 소개시켜 주었다.

 

가난뱅이 장님 선비와 결혼한 병녀는 매일 저자거리에 나가 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얼굴은 기괴하고 몸은 망가졌으나 현실을 항상 낙관적으로 바라보니, 한 번도 삶을 비관한 적이 없다네. 내 스스로 동네 처자들을 모방하여 화장하고 몸단장을 하려 애쓰니, 왕도 나를 어여삐 여기셨네. 비록 장님이지만 대나무 같이 곧은 심성을 지닌 선비를 만나 남들처럼 백년가약을 맺으니, 이제 부러울 게 없어요. 내 낭군에게 책을 읽어주니, 낭군 입가에 미소가 사라질 기색이 없어요. 이 모든 게 우리 왕 덕분이라 ... .”

 

하루는 저자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병녀와 돈왕이 마주쳤다. 돈왕은 그녀를 보고 ‘미친년’이라고 소리를 지르며 쟁기를 세워 노새에게 달리라고 박차를 가했다. 돈왕은 노새가 천리마처럼 달린다고 생각하지만, 늙은 노새는 뒤뚱 뒤뚱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뿐이다. 돈왕은 쟁기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창이라고 생각하지만, 쟁기는 무딜 대로 무뎌져 무기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돈왕은 기력이 다한 늙은이라, 그가 휘두르는 쟁기는 그저 솜방망이에 불과했다. 저자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돈왕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엄명을 내렸다.

 

“앞으로 돈왕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남자면 한 달 동안 병녀의 시중을 들며 그녀를 업고 다녀야 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여자면 한 달 동안 병녀의 얼굴에 흐르는 진물로 목욕을 해야 할 것이다.”

 

신하들은 돈왕을 감싸는 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는 그 이유를 왕에게 물어 보았다.

 

“뜻이 제아무리 고귀해도 뜻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 아니요. 뜻이 고귀하지 않아도 뜻을 지키는 사람은 적어도 의리를 가진 사람이요. 돈왕은 고귀한 사람이오? 아니면 그냥 의리있는 사람이오?

 

신하들은 차마 ‘미친놈’이리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답할 수 없었다. 대신에 ‘그저 의리만 있는 돈왕’이라고 답했다. 왕은 말했다.

 

“돈왕은 뜻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버릴 만큼 현명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는 의리있으면서 고귀한 사람이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현실에만 안주하려 하고 시속(時俗)에 물들어 성공만 쫓는다면, 세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오. 의리는 세상을 변하게 하는 힘이요. 다만 자신의 뜻이 세상에 얼마나 득이 되는지 분별할 능력 없이 의리만 앞세우면, 의리가 세상을 망칠 수 있소. 돈왕의 의리가 지금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까?”

 

신하들은 왕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왕의 기사단을 내가 해체했던 이유는 기사들이 기사도 정신을 망각하고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요. 기사단의 뜻이 나빠서가 아니라오. 그 뜻이 기사들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실현 가능함을 보인다면, 돈왕도 제 정신으로 돌아올 것이요. 기사는 없지만 기사단의 뜻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니, 그 뜻을 위해 살고 있는 돈왕은 미친 것이오. 돈왕이 미친 것에는 아직 부덕한 내 탓도 큽니다. 이치가 이러한데, 내 어찌 병녀만 이뻐하고 돈왕을 미워할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