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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퀴즈+미니논구술: 준거틀(frame of reference)

착한왕 이상하 2014. 8. 20.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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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거틀

 

다음 수능에 출제된 다음 제시문을 읽고 적절한 것에 대해서는 ‘O’, 적절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X’를 표기하시오.

 

1태양계에 존재하는 인간에게는 그 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 2사람들은 아폴로우주선이 달에서 보내온 최초의 사진을 보고, 지구는 끝없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하나의 작은 세계라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3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바뀌거나 어떤 새로운 사실이 특별히 발견되지는 않았다. 4단지 우리의 관점이 바뀐 것에 불과하였다. 5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준거의 틀(reference frame)’이라고 부른다.

6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준거의 틀을 합당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이를 객관적 현실로 오인(誤認)하고 있다. 7그동안 익숙해온 준거의 틀 때문에 우리는 지구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초속 몇 천 마일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면서 우주 밖으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8고대 천문학자들은 하늘에 떠 있는 행성의 운행 궤도를 기록했다. 9화성과 금성 등 여러 행성들은 하늘에 이상한 곡선을 그리며 운행한다고 믿었다. 10천문학자들이 주전원(epicycle)이라 부르는 이 곡선은 지구에서 바라보는 행성의 운동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다. 11고대인들에게 이 곡선은 일식이나 월식 같은 모든 천문학적 예측을 할 수 있도록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12고대인들은 행성의 궤도 곡선에 대한 그들의 준거의 틀을 남겨 놓았다. 13고대 천문학자들은 자신들은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처럼 움직이며 보는 것이 아니라 정지한 상태에서 행성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는 준거의 틀을 지니고 있었다. 14그러나 종전의 지구 중심 준거의 틀에서 태양 중심 준거의 틀로 전환된 결과 이상한 곡선이었던 주전원은 제대로 모양을 갖춘 타원 궤도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15중세 사람들은 왜 태양 중심 관점을 제안하였던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불순한 의도가 담긴 것으로 오해했을까? 16우리는 왜 지구 중심 관점을 과거의 것이라 부르고 태양 중심 관점을 진보한 것이라 부르는가? 17엄밀하게 말하면 태양 중심 관점과 지구 중심 관점은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 반대는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8왜냐하면 양자 모두 준거의 틀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19그러나 지구 중심 관점에서 보는 주전원은 너무 복잡해서 중력과 행성의 운행 관계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코페르니쿠스가 내세운 태양 중심 관점이 좀더 각광을 받을 수 있었다. 20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불분명했던 관계들을 명쾌하게 밝혀 놓았다.

21준거의 틀이 변화한다는 것은 자연에 서로 다른 관점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거나, 심지어 상충(相衝)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22오펜하이머가 늘 말했듯이 진리의 반대편은 이단(異端)이 아니다. 23그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24어쩌면 관찰자는 기존의 관점보다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25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보다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관찰자는 자신의 준거의 틀을 전환한다. 26새로운 관점은 관찰자에게 새로운 통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1~9. 생략

 

10. 새로운 준거틀은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천재들이 만드는 것이군. (   )

 

11. 오펜하이머가 처럼 판단한 이유는 새로운 관점으로 보다 명료하게 세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군. (   )

 

12. 고대인들은 지구 중심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군. (   )

 

13. 생략

 

 

* 논제: 준거틀에 관한 제시문을 ()라고 하자. 제시문 ()와 다음 제시문 ()의 정보를 활용하여 ()의 사건을 평가해 본다면?

 

()

중세 시절 사람들은 단순히 지구 중심설을 믿은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땅은 평평하다고 생각했고 반구 모양의 천구에는 천사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민중의 이러한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사회 유지의 기반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출현한 시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

갈릴레이 이단 심문을 허락한 당시 교황은 한때 갈릴레이의 후원자로 당시 과학의 발달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담은 자신의 생각을 출판하려 하자, 교황은 갈릴레이를 대상으로 한 종교 재판을 허락한 것이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 재판 과정에 고문은 자행되지 않았다. 갈릴레이가 가택 연금을 당했을 때, 그는 이미 눈을 멀었고 거동도 불편한 상태였다.

 

 

* 적합 대학: 고려대, 연대, 이대

* 배경 자료: 어네스트 카시러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