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철학 에세이/인지와 경험

Active Perception(스포일러)

착한왕 이상하 2014. 11. 7. 00:29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삼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것도 의도적인 판단이나 추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을까? 마치 어둠 속에서 영화의 장면을 볼 때 혹은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처럼 지각자(perciever)의 육체가 일종의 소실점(消失點)’과 같다면, 거리감은 마음 혹은 영혼이라는 것을 별도로 가정하고 그것의 계산 결과이거나, 감각작용에 마음이 개입한 결과이거나 아니면 감각 작용을 바탕으로 한 학습 과정의 결과일 것이다. 이때 외부와의 접촉과 관련된 감각은 인과적으로 설명 가능한 수동적 과정이고, 지각은 마음의 능동적 측면을 반영해주는 결과라는 일반적 입장이 성립한다. 감각과 지각을 구분하고, 전자를 수동적으로 후자를 능동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서양 지각 이론을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능동적 지각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플라톤의 경우에도 감각을 수동적 과정으로 규정한 측면이 있고, 수동적 지각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지각을 능동적 과정으로 규정한 측면이 있다.

 

지각자를 일종의 소실점처럼 취급하는 것은 서양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지각에 관한 철학이나 인지과학의 정보 등을 가급적 무시하고 일상적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경우, 지각 경험은 항상 지각자를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지각한다고 할 때, 지각되는 것과 지각자는 현재성을 띈 하나의 공간에 위치한다. 그러한 지각 공간에서 지각되는 것과 지각자 사이의 관계는 거리로서 경험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지각자를 소실점처럼 취급하지 않을 때, 거리감을 무조건 마음 혹은 영혼이 감각 작용한 결과로서, 아니면 학습의 결과와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어떤 사전 지식과 선입관과는 거리를 두고 다음과 같은 물음을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다루자는 계획을 세웠었다.

 

왜 붉은 사과는 내 앞에 있는 것일까?

 

일명 붉은 사과의 계획은 학위 논문을 쓸 당시 내 마음 속에 자리잡았지만 그것에 대해 쓰거나 구체화한 적은 없다. 다만 일상 경험을 바탕으로 할 때 받아들여야 하는 지각 경험의 일반적 특징들과 시공간성에 대해서 언급한 두 개의 논문에서 암시했을 뿐이다. ‘붉은 사과 계획을 세웠을 때, 때마침 지각 경험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며, 이로부터 철학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관점을 담은 퍼트남(H. Putnam)의 책을 보게 되었다. 기대를 갖고 보았지만, 이내 식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개념적 영역은 외부를 포함한다는 식의 주장은 지각 경험을 감각 작용에 마음의 의미론적 기능이 개입한 결과로 보는 데카르트의 생각과 별 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퍼트남의 그러한 주장은 근대 지각 이론을 그저 인과적 과정에만 집착한 수동적 이론으로 취급한 당시 대세에 대한 반응에 불과한 것이다.

 

‘X 같은 학계와 절연한 후 붉은 사과 계획은 먹고 사는 문제로 단지 기억 속에 묻어 두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겨 그 계획과 관련된 문헌들을 보기 시작하는데, 최근 본 것은 다음 책이다.

 

Silva, F.S. & Yrjönsuuri(Ed.)(2014), Active Perception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From Plato to Modern Philosophy, Springer.

 

주로 핀란드 학자들이 주도한 이 연구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서 아비세나, 아베로에스 등 중세 아랍 학자들, 피치노 및 니콜라스 쿠사 등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 그리고 데카르트, 로크, 버클리 등 근대 학자들의 지각 이론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문헌학적 연구에 따르면, 보통 수동적 지각 이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도 인과적 설명이 쉬운 감각 작용만으로는 지각적 판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마음 혹은 영혼을 가정하든, 아니면 자극에 대한 신경계의 반발 작용을 강조하든, 모두 지각의 능동적 측면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능동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지각 대상의 외부성을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무엇인가? ‘거리는 단지 으로 존재하며, 감각과 지각을 구분하고 감각에는 수동성을, 그리고 지각에는 능동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이 고대에서부터 근대 지각 이론을 관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지각자를 일종의 소실점처럼 취급하는 것은 서양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붉은 사과의 계획이 정말 필요하다는 개인적 결론에 다시 한 번 도달했다. 물론 그러한 계획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위 연구서를 통해 붉은 사과의 계획과 관련해 얻을 수 있는 별 다른 것은 없었다. 결국 그 계획을 실행하는 바탕은 나의 일상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다시 한 번 강화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학자(C. Leijenhorst)의 제 9“Active Perception from Nicholas of Cusa to Thomas Hobbes”는 지각 이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대상에서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가는 빛은 그냥 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속성을 옮기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더욱이 중세 시절에는 존재론적으로 상위 계층에 속한다고 가정된 영혼이 물질에 의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을 거부하는 입장이 대세였다. 이 때문에 영혼이 어떻게 외부 자극과 같은 것을 수용할 수 있는지가 논쟁거리였고, 그 논쟁은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말기에 접어들면서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대상의 속성들을 간직한 존재와 같은 것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이때부터 지각의 외부 원천은 물리적으로 탐구 가능한 자극에 불과하다는 관점이 굳어진다. 하지만 감각 작용을 수동적으로, 지각을 능동적으로 여기는 것은 중세부터 근대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제 9장의 결론이다. 특히 제 9장의 내용은 대상 인식과 관련해 중세와 르네상스 인물들의 기발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재미가 SF 애니메이션을 압도하는 측면도 있다. 사실 제 9장만 정독해도 이 책의 핵심 내용과 방향성을 파악할 수 있다. 위 연구서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Introduction: The World as a Stereogram

José Filipe Silva and Mikko Yrjönsuuri

 

2. Plato: Interaction Between the External Body and the Perceiver in the Timaeus

Pauliina Remes

 

3. Activity, Passivity, and Perceptual Discrimination in Aristotle

Klaus Corcilius

 

4. on Activity and Passivity in Perception: Aristotle, Philoponus, and Pseudo-Simplicius

Miira Tuominen

 

5. Augustine on Active Perception

José Filipe Silva

 

6. Avicenna on the Soul’s Activity in Perception

Jari Kaukua

 

7. Medieval Theories of Active Perception: An Overview

José Filipe Silva

 

8. Agent Sense in Averroes and Latin Averroism

Jean-Baptiste Brenet

 

9. Active Perception from Nicholas of Cusa to Thomas Hobbes

Cees Leijenhorst

 

10. Seeing Distance

Mikko Yrjönsuuri

 

11. Descartes and Active Perception

Cecilia Wee

 

12. Locke and Active Perception

Vili Lähteenmäki

 

13. Spinoza on Activity in Sense Perception

Valtteri Viljanen

 

14. Berkeley and Activity in Visual Perception

Ville Paukkonen

 

15. Activity and Passivity in Theories of Perception: Descartes to Kant

Gary Hatfield